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고
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었다. 오늘 새벽에 처음으로 경전을 열어 보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출간된 합본이다. 마치 바이블처럼 인조가죽케이스로 되어 있고 작크가 달려 있다. 더구나 종이 테두리에는 금칠이 되어 있어서 번쩍번쩍 하다.
상윳따니까야는 방대하다. 본래 일곱 권으로 된 경전이다. 이를 책장에 진열해 놓으면 두 뼘이 된다. 이런 경전을 한권에 압축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에센스만 모아 놓은 것은 아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주석까지 모두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두 단 칼럼에 폰트사이즈가 작다. 아주 얇은 종이로 하여 2,813페이지에 이른다.
합본화 한 것은?
KPTS에서는 왜 합본화 작업을 했을까?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 물어 보았다.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이 문제가 된다. 일곱 권이나 되는 상윳따니까야를 개별 권으로 출간했을 때 출간비용이 대폭 상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본으로 했을 때는 비용이 대폭 절감된다.
합본화 하는 것은 장점도 단점도 있을 것이다. 한권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에든지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장점이다. 마치 기독교신자가 바이블을 들고 어디든지 들고 다니면서 보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일곱 권으로 된 경전은 들고 다닐 수 없다. 책장에 놓고 봐야 할 것이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꺼내 보기 힘들다. 그러나 한권으로 되어 있다면 휴대가 가능하다면 어디든지 들고 다니면서 볼 수 있다. 또한 머리맡에 놓고 볼 수도 있다.
합본의 단점도 있다. 그것은 글씨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경전을 보는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이가 마흔 이상만 되면 노안으로 돋보기를 써야 독서하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합본은 폰트 사이즈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데 돋보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돋보기 보는 것은 이제 생활이 되었다. 돋보기 안경을 쓰지 않고서는 책을 보기 힘들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전의 작은 글씨는 잘 보면 보인다. 눈이 좋은 사람은 보기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노안인 사람은 돋보기를 써야 한다. 경전을 돋보기 안경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인연상윳따(S12)부터
합본 상윳따니까야는 12번째 상윳따인 인연상윳따부터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읽으려고 했으나 PTS본으로 따졌을 때 1권에 해당되는 사가타상윳따는 이미 오래 전에 읽었다. 번역비교를 하기 위해서 2013년부터 2년동안 읽었다. 두 번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올해부터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을 읽고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정선한 경의 모음을 말한다. 현재 인연상윳따 부분을 읽고 있다. 겹치기는 하지만 인연상윳따(S12)부터 읽기로 했다. 매일 조금씩 읽다 보면 금요니까야모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새벽 처음 읽은 경은 ‘연기의 경(S12.1)’이다.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실려 있는 짤막한 경이다. 마치 인연상윳따 전체를 아우르는 경과 같고 테마송같기도 하다.
두 번째 경은 ‘분별의 경’(S12.2)이다. 빠알리어로 비방가숫따라고 한다. 수많은 비방가경이 있는데 십이연기분석경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경이라는 것이다. 이 경을 빠알리로 통째로 외웠기 때문이다. 2020년 말 한달 반에 걸쳐 외웠다. 총 1,543자에 달한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으로부터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영어도 잘 하려면 단어나 문장을 외워야 한다. 어학은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학도 외울 필요가 있다. 필요한 공식은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국어도 외워야 한다. 고문을 외는 것이 좋은 예이다. 하물며 경전은 어떠한가?
부처님은 사띠를 강조했다.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쓰이면 알아차리는 것, 새기는 것이 된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다. 사띠가 교학적 의미로 쓰인다면 가르침을 외우는 것이 된다. 사띠라는 말 자체가 기억(memory)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경구는 외워야 한다. 좋은 게송이 있으면 외워야 한다. 핵심이 되는 경이 있으면 외워야 한다. 팔정도분석경이나 십이연기분석경은 외워야 한다. 이는 용어가 정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술어는 무명이다. 이 무명에 대한 정의를 모르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쉽다. 자신이 생각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견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기 쉽다. 이럴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무명이란 무엇일까? 이는 “Katamā ca bhikkhave avijjā? Yaṃ kho bhikkhave dukkhe aññāṇaṃ, dukkhasamudaye aññāṇaṃ, dukkhanirodhe añ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ññāṇ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avijjā."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을 번역하면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가 된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인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경전을 잘 읽지 않는 것 같다. 출가수행자들 역시 경전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같다. 법문이나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전 문구를 인용하면 덜 배운 사람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공부를 한 사람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한국불교가 발전하려면 경전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것도 초기경전을 말한다.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른 길로 갈 수 있다.
여기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여기 두 갈래 길이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부처님은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S22.85)”라고 했다.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이념에 대한 것은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 통용되던 말을 한 것이다.
부처님은 두 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다. 왼쪽은 사도이고 오른쪽은 정도인 것이다. 니까야를 읽으면 정도로 가는 것이 된다. 방향을 잘 잡은 것이다.
오늘 새벽 니까야읽기 시동을 걸면서 의외로 수확한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길의 경(Paṭipadāsutta)’(S12.3)이다. 이 경에는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이 소개 되어 있다. 놀랍게도 순관에 대해서는 ‘잘못된 길(micchāpaṭipadā)’이라고 했다. 역관에서 대해서는 ‘올바른 길(sammāpaṭipadā)’이라고 했다. 마치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선택하는 것 같다.
매일매일 삶을 살고 있다. 이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등 아무 생각없이 산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경에 따르면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것은 잘못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길이란 무엇인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을 의식이 생겨나고,…”라 하여 십이연기 순관을 설했다.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삶은 사건의 흐름이다. 대부분 탐, 진, 치로 살아 간다. 대부분 갈애로 살아간다. 갈애가 있는 한 연기는 회전되기 마련이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발생이다. 그래서 십이연기가 회전된다. 이렇게 십이연기의 고리가 순방향으로 회전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잘못된 길’이라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대다수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간다. 그러나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괴로움의 길로 가는 것과 같다. 그 끝은 어디일까? 이는 십이연기에서“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3_라는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현재와 같은 삶을 살아 간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삶을 살다 보면 결국 절망에 이를 것이다. 죽음이라는 절망을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고성제만 말했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부처님이 십이연기에서 연기의 순관만 이야기했다면 무책임하다고 비난 받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반드시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환멸문이다. 십이연기의 역관을 말한다.
연기는 조건발생이다. 그런데 생겨난 것은 그대로 있지 않다. 변화하고 소멸한다. 생겨난 것은 이유가 있고 조건이 있지만 사라질 때는 그냥 사라진다.
두 손바닥을 마주 보고 때렸을 때 “딱”하고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나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지는데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할까?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조건을 만들면 된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역관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고 죽음이라는 절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면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길이란 무엇인가? 곧 무명이 사라져 남김없이 없어지므로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없어지므로 의식이 소멸하고,…”(S12.3)라 하여 십이연기 역관을 설했다.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팔사도이고, 또 하나는 팔정도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십이연기순관이고, 또 하나는 십이연기역관이다. 두 가지 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십이연기순관의 길을 간다. 즉 연기가 회전하는 길을 간다. 그 길로 죽 가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날 것이다. 요즘 속된 말로 “골로”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다. 팔정도의 길로 가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순관과 역관이다. 순관의 길은 죽음의 길이다. 역관은 죽음을 초월하는 길이다.
죽음을 초월하는 길로 가야 한다. 이것을 ‘올바른 길’이라고 했다. 이렇게 올바른 길로 가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S12.3)라고 했다.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하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고
오늘 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머리맡에 놓고 틈만 나면 수시로 열어 볼 것이다. 그리고 새기며 읽어야 한다. 감동을 받으면 글로 표현해야 한다.
맛지마니까야 읽기는 6개월 걸렸다. 디가니까야 읽기는 7개월 걸렸다. 상윳따니까야는 1년 이상 걸릴 것 같다. 이렇게 선언했으니 앞으로 주욱 나아갈 수밖에 없다.
상윳따니까야는 지난 십년 동안 수없이 읽었다. 그러나 필요한 경만 읽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곱 권짜리 상윳따니까야를 보면 형광메모리칠로 울긋불긋 하다. 이런 방식의 경전읽기를 지양한다. 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석까지 낱낱이 읽어야 한다.
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었다. 마치 걸어서 국토를 일주하는 것 같다. 마치 오토바이 여행자가 대륙을 횡단하는 것 같다. 가다 보면 멀리 가 있을 것이다. 어느 때 뒤돌아 보면 멀리 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욕심 부리지 않고 하루 한페이지라도 읽다 보면 어느 때 종착지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3-07-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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