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이 거리 이 도시를 사랑한다, ‘안양애 도시의 기억과 풍경’ 전시회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7. 18:50

이 거리 이 도시를 사랑한다, ‘안양애 도시의 기억과 풍경’ 전시회를 보고

 

 

이웃사촌이라 한다. 정 들면 고향이라 한다. 내가 현재 발 붙이고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다. 안양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안양아트센터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안양애() 전시회이다. 안양사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정식명칭은 안양애 도시의 기억과 풍경이다. 문자 그대로 안양의 과거에 대한 사진전이다.

 

 

 

안양은 특별한 것도 없고 볼 것이 있는 것도 없다. 그저 수도가까이에 있는 수도권 도시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인구는 꽤 된다. 인구가 60만명이 넘는 대도시이기 때문이다.

 

안양은 안양시로 그치지 않는다. 안양권이라 하여 군포와 의왕을 합한다. 여기에 과천까지 합하면 안양권은 100만명이 넘는다.

 

수도권에 백만명이 넘는 도시는 즐비하다. 수원, 용인, 고양은 백만이 넘는다. 성남은 백만명에 근접해 있다. 화성과 시흥, 평택은 조만간 백만을 돌파할 것이다. 국토의 11%에 해당되는 서울과 경기도에 전체 인구의 60%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와 비례하여 지방도시의 인구는 점점 줄어 들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은 일자리도 많고 기회도 많기 때문에 청년들이 몰리고 있는 것도 요인이 된다.

 

안양의 변화는 눈부시다. 1995년이후 안양에 28년 살고 있다. 매년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십년전의 스카이라인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비산동의 변화가 그렇다.

 

안야에서는 주로 비산동에서 살았다. 비산사거리 지역에서 대부분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비산동의 변화를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오늘 안양애 도시의 기억과 풍경전을 보면서 50년전의 비산동 사거리 부분의 항공사진을 보았다. 1974년 촬영된 항공사진이다. 사진에서 보는 비산동은 논밭이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있다. 50년전 비산동은 논밭이었다. 이후 아파트가 들어서고 시장도 생겼다. 이런 상태가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그 결과 논밭은 사라지고 아파트, 빌라, 상가로 채워졌다. 그러나 또 한번 탈바꿈 했다. 지금은 재개발되고, 재건축되어 타워형 아파트가 건설됨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지금 보고 있는 안양 풍경은 언제 또 다시 바뀔지 모른다. 50년전에는 논밭이었던 곳이 아파트와 빌라가 들어서고, 세월이 흐르자 허물고 고층 타워형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항상 그대로 있을 것 같다. 천년만년 그대로 갈 것 같다. 그러나 보장되지 않는다. 현재 보고 있는 타워형 아파트를 허물고 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인구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아파트단지의 스카이라인이 어떻게 바뀔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 한가지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저 높은 산이다. 관악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다.

 

 

안양애 전시회를 보면서 과거 일제시대때 글도 보았다. 그때 당시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썼던 것 같다. 이런 에피소드를 전한다.

 

 

(안양역)

그뿐이냐 경부선 시흥역을 지내면 안양정거장이 잇다. 안양은 일본말로 안요인데 안양까지 가서 나릴 무식한 초행손님이 안양정거장에 가서 그곳이 안양인지 어디인지 알지를 못하고 역부에게 여기가 안양이요라고 묻는판에 역부는 그저 안요-안요- 소리치고 지나가니까 그 손님은 안양이 안이란 말로만 듯고 나리지를 안코 그냥 더 가서 곤난을 바덧다 한다. 조선사람이 만히 타는 차에서 일본말만 쓰는 폐해가 이박게도 얼마나 또 잇는지 알 수 잇는냐.” (근대잡지 「별건곤] 통권 41, 1931,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어떤 사람이 안양역에서 내리려고 했나 보다. 차장에게 안양이라고 말하자, 차장은 안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안요라는 말은 안양의 일본식 발음이다. 그 사람은 차장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고 지나쳤다는 것이다.

 

별건곤이라는 잡지를 보면 비판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시대상황을 설명하면서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사람이 많이 타는 차에서는 조선말로 해야 함에도 일본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일제시대때 풍경과 50년전의 풍경은 다르다. 50년전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다르다. 그럼에도 하천의 흐름과 산의 모습은 그대로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리산은 그대로 있다.

 

 

안양애 전시회에서 50년전의 안양 항공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그때 당시 평촌은 들판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로 빼곡하다. 평촌이 고향인 사람들은 고향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관악산과 수리산은 그대로 있다. 안양천도 그대로 흐르고 학의천도 그대로 흐른다. 무엇보다 하늘이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

 

 

한가한 여름 날의 오후이다. 하늘은 높고 청명하다. 오후의 햇살에 도시가 빛난다. 이런 도시를 사랑한다. 50년전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도 아름다웠겠지만 잘 정비된 도시의 모습도 아름답다. 정들면 고향이라 하는데 이 거리, 이 도시를 사랑한다.

 

 

 

2023-07-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