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최후의 시민군 김상집 선생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4. 09:22

최후의 시민군 김상집 선생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을 보고
 
 
최후의 파르티잔이라는 말이 있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나오는 단락 명칭이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죽거나 붙잡힌 자들의 이야기는 이후 다큐나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태의 남부군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태의 남부군을 읽은 것은 80년대 후반인 것 같다. 그때 당시 처음 출간되었을 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나오는 최후의 파르티잔은 이태의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최후의 파르티잔은 이념 투쟁의 허무함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십대 때 읽은 이태의 남부군은 계속 가슴에 남았다. 어쩌면 이 시대는 최후의 파르티잔을 요구하고 있을지 모른다.
 
빨치산은 파르티잔을 우리말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시대를 앞서간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저항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것도 최후의 파르티잔이라고 했을 때 장중한 여운이 남는다.
 
1980년 광주에서 난리가 났었다. 처음에는 이를 광주사태라고 했다. 나중에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묘역은 국립묘지가 되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까?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소요사태는 기득권층의 입장에서 본다면 폭동이다. 그러나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본다면 혁명이다. 동학이 그랬고 광주가 그랬다.
 
시민군 김상집 선생
 
2023년 7월 1일 광주 전시장에 갔었다. 메이홀에서 김상집 선생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름하여 ‘오월전사 김상집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이다. 전시회 명칭이 다 말해 주는 것 같다. 시민군 김상집 선생이 그때 기억을 되살려 그린 그림을 전시한 것이다.
 


김상집 선생은 시민군출신이다. 전시회 제목에서는 오월전사라고 했다. 시민군이나 오월전사나 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시민군이라는 말이 더 다가온다. 대한민국 역사상 시민군은 처음 있었기 때문이다.
 
김상집 선생의 전시회를 알게 된 것은 김상윤 선생의 페이스북이다. 김상윤 선생은 김상집 선생의 형이다. 페이스북에서 전시회 소식을 들었을 때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김상집 선생은 잘 알고 있다. 페이스북 친구로서 알고 있는 것이다.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활약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상집 선생이 쓴 책도 읽었다.
 
김상집 선생은 재능이 많은 것 같다.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이밖에 또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책으로 그림으로 오월을 알리는 것 같다. 그래서 김상집 선생에 대하여 ‘최후의 시민군 김상집’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보았다.
 
김상집 선생이 쓴 책 두 권을 읽었다. 하나는 ‘녹두서점의 오월’이고 또 하나는 ‘윤상원평전’이다. 전자는 김상집 선생의 가족이 공동으로 지은 책이고, 후자는 김상집 선생이 단독으로 지은 책이다.
 


김상집 선생은 책을 지어서 광주를 널리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림으로 알리고 있다. 세월이 4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선생은 여전히 시민군 같다. 그래서 최후의 시민군, 최후의 오월전사, 최후의 파르티잔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고 싶다.
 
전시회가 열리는 메이홀로
 
전시회가 열리는 메이홀은 광주 중심부에 있다. 옛날 도청이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근에 있다. 지도로 검색해 보니 광주시 동구 문화전당로 23번길 1번지이다. 조강철 선생과 만나서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7월 1일은 토요일이다. 7월 2일에 함평에서 제사가 있다. 하루 전에 가고자 했다. 가서 만나 볼 사람이 있다. 가장 먼저 정찬주 작가를 만나기로 했다. 그 다음에 메이홀에서 김상집 선생의 전시회를 보고자 했다.
 
화순 이불재에서 광주 메이홀까지는 1시간 가량 걸렸다. 차를 문화전당 지하주차장에 주차해 놓았다. 조강철 선생과 만나서 전시장에 들어갔다. 전시장은 크지 않다. 한층 사면에 유화가 전시 되어 있었다.
 
전시장에서 김상집 선생을 처음 보았다. 그동안 페이스북에서만 보았는데 느낌 그대로이다. 느릿느릿한 전라도 말씨는 페이스북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조강철 선생과 김상집 선생은 동기간이다. 중고등학교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동급생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김상집 선생은 페이스북에서 내 글에 ‘좋아요’ 추천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전시장에는 두 명이 더 있었다. 심복자 선생과 최평지 선생이다. 심복자 선생은 이태복 선생의 부인이다. 최평지 선생은 5.18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다. 나와 조강철, 심복자, 최평지 선생 이렇게 네 명이 김상집 선생으로부터 그림 설명을 들었다.
 


사면에는 벽면 가득 크고 작은 그림이 걸려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궐기대회, 결사항전, 최후항전이다. 그때 당시 상황과 증언을 참조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김상집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이라고 했을 것이다.
 
김상집 선생은 세 그림을 주로 설명했다. 가장 먼저 최후의 항전을 설명했다. 도청이 함락 될 때 상황에 대한 것이다. 윤상원 열사의 죽음이 강조되어 있다.
 
최후의 항전 그림
 
최후의 항전 그림에서 윤상원 열사는 복부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이를 부축이고 있는 사람은 이양현 선생이다. 바로 옆에서 오열하듯이 울고 있는 사람은 김영철 열사이다. 그때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다.
 


김상집 선생에게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최후의 항전 그림에서 M16을 들고 응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 보았다. 기동타격대장 윤석루 라고 했다. 생존인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실명만 썼다.
 
기동타격대장은 왜 M16을 들고 있을까? 그때 당시 시민군은 카빈이나 M1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김상집 선생에 따르면 기간병의 M16이라고 했다. 기동타격대에게는 특별히 M16이 주어졌던 것이다. 최후항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최후의 항전)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전남도청 후문 담을 폭파하고 쳐들어온 공수들은 먼저 1층을 점령하고
교본대로 별관 끝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금남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시민군들은 공수들이 섬광탄을 터트리자 대부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으나. 용감한 기동타격대원들은 응전하며 본관쪽으로 밀리다. 온종일 불이 켜진 민원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동타격대장 윤석루가 M16으로 모든 전등을 깨트리자 기동타격대원들이 창틀마다 자리잡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정적이 흐르고
이양현이 “윤형 우리가 죽으면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순간 총성과 함께 윤상원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고, 이양현과 김영철이 윤상원을 들고 회의실 안으로 데려와
윤상원이 “우리 저세상에서도 사회운동 합시다.”
담요를 깔고 바닥에 눕혔다.

공수들이 몸은 숨기고 M16만 창안에 들이민 채 “드르륵 드르륵” 갈겨댔고,
바닥에 엎드린 이양현은 콘크리트 바닥에서 튄 유탄에 맞아
핏물로 눈이 가려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앞에서 총을 쏘고 있는 김영철에게 “형님 항복합시다 항복!” 외치고 포로가 되었다.

남은 기동타격대원들은 화장실로 들어가 30여 분을 더 버티다가
결국 포로가 되고, 전남도청은 함락되었다.

 
(오월전사 김상집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 최후의 항전 설명문)
 
 


결사항전 그림
 
다음으로 결사항전을 보았다. 김상집 선생은 결사항전 그림에 대하여 꽤 많이 설명했다. 그때 당시 긴박하고 긴급했던 상황은 인물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사항전은 도청을 사수하기로 결의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1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도록에는 각각 인물에 대한 실명이 없다. 김상집 선생에게 “이 사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그 결과 그림에 나오는 인물 전원을 알 수 있었다.
 


탁자에는 12명이 앉아 있다. 죄측 첫번째 인물이 있다. 검은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한 사람이다. 윤강옥이라고 했다. 바로 그 옆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은 허규정이다. 권총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박남선이다. 그 옆에 턱을 괴고 있는 사람은 이영현이다. 창측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람은 김준봉이다.
 
탁자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마치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정상용이라고 했다. 정상용 옆에는 머리를 단정히 가르마하고 참하게 생긴 사람이 있다. 김영철이라고 했다. 그 옆에는 고개를 내밀고 경청하는 듯한 사람이 있다. 윤상원이라고 했다. 주황색 옷에 안경낀 사람이 있다. 구성주라고 했다. 안경끼고 양복을 입은 사람이 있다. 김종배라고 했다. 초록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있다. 정해직이라고 했다.
 


창측에 M16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라고 했다. 창측에서 바깥의 궐기대회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윤기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탁자에서 등을 보이고 유인물을 들고 무언가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가상인물이라고 했다.
 
결사항전 그림에서 김상집 선생은 보이지 않는다. 김상집 선생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옆 방에 있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나고 들어 갔다고 한다. 그런데 김상집 선생에 따르면 결사항전 위원들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사항전을 결의한 그림은 비장해 보인다. 창 바깥에서는 궐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계속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은 계속 싸우기로 한 것이다. 결사항전에 대하여 도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결사항전)

1980년 5월 26일 오후 6시경 회의 모습입니다. 26일 오후 3시경 제5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 분수대에서 열렸고 여기에서는 “대학생은 YWCA로 모여라”라는 구호와 더불어 ‘향토 예비군들이여 총을 들고 광주를 지키자’라는 성명서가 낭독되었습니다.

궐기대회 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내 가두행진을 하고 분수대로 다시 돌아왔는데 분수대 광장에는 별도로 예비군 300여 명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제 전남대 스쿨버스가 도착하자 예비군들은 제 차로 몰려와 “총을 지 급해 달라”라고 외쳤습니다 왜냐 하면 “향토예비군들이여! 총을 들고 광주를 지키자” 라는 성명서를 제가 낭독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차를 YWCA에 세우고 예비군들에게 가서 모두 오와 열을 맞추게 하고 향토 예비군가를 부르며 도청 정문으로 인솔해 갔습니다.

그런데 도청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시민군이 우리가 향토 예비군가를 부르며 전진해 오자 도청 정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서 “예비군에게 총기를 지급하라”라고 요구하자 잠시 후에 상황실장 박남선이 나왔습니다. 박남선 상황실장은 “수습대책위에서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총기 회수만 하고 있지 총기를 지급하라는 명령은 없다”면서 총기 지급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예비군들은 “우리는 군대를 갔다 온 향토 예비군으로서 광주를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왜 우리에게 총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것이냐”라고 따지며 “너희들 필요 없다 우리가 총을 가져가겠다.”라며 도청 정문을 밀기 시작했습니다.

도청 정문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박남선이 허리에서 권총을 뽑아 하늘
한 방을 발사하며 “더 이상 들어오면 쏜다! 쏜다!”하며 위협하였습니다.

박남선 상황실장의 위협에 화가 난 예비군들이 “아나 쏴라 새끼야!”하면서 정문을 반쯤 찌그러뜨렸습니다.

놀란 박남선이 계속 하늘에 대고 총을 쏘아대자 정상용, 이양현, 윤상원이 정문으로 뛰어왔고 사태를 파악한 정상용은 “YMCA로 가있으면 무기를 지급하겠다.”라고 약속하여 예비군들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YMCA로 예비군들을 인솔한 다음 저는 광주YWCA로 가서 대학생 시민군 70여 명을 인솔하여 도청 안으로 들어가 윤상원을 찾았으나, 그 시각에 윤상원은 외신기자들에게 최후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기자회견 직전에 수습대책위는 예비군들에게 총기를 지급하는 문제로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예비군들은 “우리 향토예비 군은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 우리에게 총기를 지급하라”라며 도청 안으로 난입할 태세여서, 총기 회수만을 하고 있는 수습대책위를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습대책위 지도부는 명칭을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위원장을 정상용으로 결정했습니다. 기존 수습대책위 위원장 김종배는 부위원장으로 하고 나머지 지도부는 그대로 유임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엄군이 쳐들어 오면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우자는 결사 항전을 결의했습니다.

 
(오월전사 김상집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 결사항전 설명문)
 
 


결사항전에 예비군들의 역할도 컸음을 알 수 있다. 결사항전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
 
김상집 선생은 결사항전을 설명하면서 도록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도 했다. 이를 동영상으로 몇 분 찍어 놓았다. 김창길 등 투항파를 몰아내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결사항전을 결의하게 된 것은 투항파를 몰아 내고 나서였다. 이에 대하여 김상집 선생은 “김창길이 투항파 요놈들이 요놈시키들이 조비오 신부하고 조아라 여사를 설득해서 뭐냐하면 ‘시민군들 다 나가’라고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디 강옥이형이 뛰어 온 거여. ‘큰일 났소. 창길이가 지금 조비오신부님과 조아라 여사를 설득하고..’…박남선 상황실장이 회의장소에 딱 들어가갔고 천장에 대고 ‘어떤 놈의 새끼가 우리를 계엄사에 팔아먹을라고 하냐’라고 천장에 총을 빵 쏘아 버링께 거기에 있는 창길이 등 투항파가 깜짝 놀라 분거여. 밖에서도 총소리가 나부링께 살살 도망쳐 버려.”라고 말했다.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광주억양을 살려 기록하고자 했다.
 

 


김상집 선생은 결사항전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 했다. 일반적으로 결사항전파 수습대책위 위원장은 김종배로 알고 있다. 그런데 26일 오후 6시에 결사항전을 결의하는 회의에서 명칭을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위원장을 정상용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상무대에서 조사 받을 때도 함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사항전 그림을 보면 정상용이 탁자 중앙에 앉아 있다. 그리고 마치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아마도 26일 오후 6시 상황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서 정상용의 위치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궐기대회 그림
 
세 번째로 설명들은 그림은 궐기대회이다. 이 그림은 매우 크다. 한쪽 벽면 가득하다.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있다. 김상집 선생에 따르면 이 궐기대회를 그리는데 2년 걸렸다고 한다.
 


궐기대회를 보면 인물 위주로 되어 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나 지도부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윤상원 열사는 분수대 좌측에 하늘색 셔츠에 점퍼차림이다. 왼손에는 유인물이 들려 있다.
 

 

김상집 선생은 어디에 있을까? 물어보니 분수대 위에서 앰프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군대에서 제대한지 몇 달 되지 않아 5.18을 맞게 되었는데 27일까지 시민군으로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녹두서점의 오월과 윤상원 평전에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궐기대호 그림을 보면 각종 구호가 보인다. 그 중에서도 ‘전두환 찢어 죽이자’라는 구호가 인상적이다. 이 구호를 모르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구호가 적힌 프랑카드를 김상집 선생과 동료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궐기대회 그림과 관련하여 도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궐기대회)

“전두환 찢어죽이자”
“독재없는 민주의 땅”
“광주시민 총궐기”
“끝까지 싸우자”

홍성담이 녹두서점에서 프랑을 썼다.

나명관 김성섭 서대석 김경국 전용호 들불형제들과
박용준 이현철 서한성 무등육아원 출신 갑장들이 각목과 노끈을 구해와 분수대에 프랑을 설치하고 투사회보를 뿌린다.

김상집과 김광섭 김효석이 가두방송하던 황금마차에서 앰프를 떼어 분수대 위에 설치하자, 김태종이 “아 아 광주시민 여러분 잘 들립니까?’
멀리 있던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답하자,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 시작된다.
먼저 애국가를 제창하고
사망자와 부상자 집계를 이현주가 울먹이며 보고한다.

 
오늘도 공수들이 전대박물관 아래 숲속에 암매장한 시신 두 구를 실어 왔습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가셔서 가족인지 아닌지 확인하시고, 없으면 도청 민원실 앞으로 가셔서 행불자로 접수해 주십시오.”
 
임영희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투사회보를 낭독하고
김영철이 대학생들은 YWCA로 모여라”라고 호소한다.

윤강옥이 즉각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외치고
윤기현이 적십자사를 통해 고립된 광주 밖으로 학살의 진상을 알리자고 주장한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절규가 이어지고

살인마 전두환” 허수아비에 나명관과 김성섭이 불을 붙인다.

김상집이 “향토예비군들이여 총을 들고 광주를 지킵시다”를 낭독하고 이양현이 “민주시민투쟁위원회는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여성들과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를 외쳤다.

 
윤상원이 ‘80만 광주시민 결의문을 낭독하고 사회를 맡은 김태종이 “이제 민주대행진을 시작하겠습니다. 금남로에서 공용터미널, 신역, 유동삼거리를 거쳐 금남로를 관통하여 다시 이곳 분수대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안내한다.

선두에 대형태극기를 펼쳐 들고 황금마차가 방송을 하며 출발하자 광주시민 모두가 투사의 노래를 부르며 민주대행진을 하고 다시 돌아온 곳, 분수대,

 
(오월전사 김상집의 한없이 또렷한 기억전, 궐기대회 설명문)
 
 

 

 
궐기대회 그림에서 주연은 없다. 모두가 주인공들이다. 항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다. 궐기대회에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식별이 가능한 인물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항쟁하다 도망 간 사람들은 넣지 않았다고 한다.
 
점심 시간에
 
점심 시간이 되었다. 메이홀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서 우거지국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그림은 어떻게 그리게 되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김상집 선생은 5.18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림은 전문가들이 그려야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김상집 선생은 그림을 배웠다. 순전히 5.18기록화를 그리기 위해서 그림을 배운 것이다. 처음에는 미술학원에 다니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화가를 소개 받아 개인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김상집 선생은 그림을 6년 배웠다. 그리고 그림을 기록으로 남을 그림을 그렸다. 벽면 가득한 궐기대회는 2년동안 그렸다고 한다. 인물 사진을 입수하고 상황에 맞게 그린 것이 궐기대회, 결사항전, 최후항전 그림이다.
 
죽음으로써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고 다시 메이홀로 돌아 왔다. 나머지 못다한 그림 설명을 들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때 당시 김창길 등 투항파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때 당시 투항파 말대로 계엄군에게 투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5.18은 폭동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은 폭도가 되었을 것이다. 결사항전이 있었기에 항쟁이 되고 민주화운동이 된 것이다.
 


내 주면 되찾아 올 수 없다. 그러나 빼앗긴 것은 되찾아 올 수 있다. 그때 투항파 말대로 내 주었다면 되찾아 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죽음으로써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주정신이다.
 
광주정신은 항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순히 궐기로 끝났다면 사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불의의 쿠데타 세력과 민중을 적으로 아는 불의의 군대와 맞서 끝까지 싸웠기 때문에 오늘날 5.18이 있게 된 것이다.
 
최후의 시민군
 
김상집 선생은 시민군 출신이다. 27일까지 항전했다. 그런데 시민군출신 김상집 선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저술활동을 하고 그림을 그려서 알렸기 때문이다.
 
김상집 선생에 대해서 잘 모른다. 최근 사년동안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하면서 광주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정찬주 작가의 소설 ‘광주아리랑’을 읽고 알게 되었고, 김상집 선생의 ‘윤상원 평전’과 ‘녹두서점의 오월’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밖에도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김상집 선생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시민군 또는 오월전사로 불린다. 그런데 김상집 선생을 최후의 시민군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 그런가? 끊임없이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집 선생은 ‘윤상원 평전’을 써서 알리고 ‘녹두서점의 오월’을 통해서 알렸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그림으로 알렸다. 이러니 최후의 시민군이라 할만하지 않는가?
 
 
2023-07-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