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대 앞에 행운이 있기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16. 15:04

그대 앞에 행운이 있기를!



한국불교는 크게 잘못 되었다. 스님을 승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한다.

삼귀의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다. 모두 부처님과 관련되어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를 삼보라고 한다.

스님을 승보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님은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승가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스님들이 들어 갔을 때, 스님들은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스님을 승보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게 된다. 스님이 스님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게 된다. 문중이 생겨나고 종단이 생겨나는 이유가 된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귀의해야 할 대상은 승가공동체이다.

스님을 승보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보시를 스님들에게 하게 된다. 보시는 승가공동체에 해야 한다. 승가공동체에 보시하면 스님들에게 분배된다. 그럼에도 스님에게 보시하면 스님들은 재산을 갖게 된다. 스님이 소유하게 되었을 때 재가불자나 다름 없을 것이다.

승가는 공동체이다. 최소한의 인원은 4명이다. 스님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포살을 해야 한다. 안거가 끝나면 자자를 해야 한다. 자자와 포살이 없는 승가공동체는 상상할 수 없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공동체에서 성자가 출현한다.

한국불교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삼귀의를 잘못 적용한 것이다. 한글삼귀의문 영향이 크다. 승보를 스님으로 보았을 때 첫단추를 잘못 채운 것과 다름없다.

 
한글삼귀의문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접했다. 그때 당시 중학교를 배정받아 갔는데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이었다. 그때 음악시간에 음악선생님은 삼귀의를 가르쳐 주었다. 오늘날 노래형식으로 되어 있는 삼귀의를 말한다.

한글삼귀의문이 옳은 줄 알았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고 잘못된 것을 알았다. 니까야에는 분명히 승가에 귀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속은 기분이었다. 한국불교가 불자들을 감쪽같이 속인 것이다.

삼귀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불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삼귀의는 필요조건이 되고 오계는 충분조건이 된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 졌으니 그 이후 줄줄이 틀어진 것이다. 불교처럼 보이지만 무늬만 불교가 된 것이다.

번역은 대단히 중요하다. 잘못 번역하면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한국불교가 갈수록 쇠락하는 것도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귀의부터 잘못 되었으니 불교가 중흥될 리 없는 것이다.

잘못 되었으면 고쳐야 한다. 재가불교단체에서는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스님들이 나서서 고쳐야 한다. 그러나 스님들은 적극적이지 않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듯 하다. 기득권에 머무는 것 같다.

 


최근 망갈라경에 대하여 번역문제를 제기 했다. 스님들은 한결같이 행복경이라고 말한다. 망갈라는 상서로움, 길상, 행운, 길조, 축복, 번영, 안전 등의 의미가 있음에도 행복이라고 번역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느낌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느낌인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오래가지 못한다.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고 만다. 이처럼 행복은 일시적 느낌에 불과한 것이다.

행복은 즐거움과 동의어이다. 행복은 또한 쾌락과 동의어이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 되어진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이라 번역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망갈라경에는 30가지 이상 좋은 징조의 조건이 있다.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느낌이 아니다. 행복한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미래 안전에 대한 것이다. 미래 번영에 대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를 사귀지 않으면 미래 좋은 징조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봉양하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미래에 좋은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행복이라기 보다는 미래 좋은 징조, 길상, 축복, 안전, 번영, 행운에 대한 것이다.

망갈라경에는 30가지 이상의 항목이 실려 있다. 재가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출가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까지 다양하다. 이런 항목을 실천하면 미래 행운이 찾아 올 것이라 한다. 미래 행운과 행복을 가져 오는 것이다.

행복은 즐거움과 동의어라고 했다. 감각적 즐거움이 크다. 눈과 귀 등 오감으로 느끼는 즐거움이다. 이를 행복이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 되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한결같이 망갈라경에 있는 30가지 항목에 대하여 행복으로 번역했다.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번역했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날까? 감각적 삶을 살기 쉽다. 행복이라는 말이 즐거움 또는 쾌락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느낌에 불과함에도 행복한 느낌을 추구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 된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을 그때그때 관찰하라고 했다.

행복은 추구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즐기는 행복에 그쳐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궁극적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
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다. 열반이 아닌 행복은 일시적 행복이다.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번역하려면 제대로 번역해야 한다. 삼귀의를 잘못 번역하여 한국불교가 세계적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번역한다면 또다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망갈라경은 테라와다불교에서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다. 천수경처럼 자주 암송되는 생활경전인 것이다. 마치 주문처럼 경을 암송하면 불행은 물러가고 행운이 올 것이라 믿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권에서 망갈라경은 결혼식, 졸업식, 입학식, 개업식, 집들이 할 때 암송된다. 미래 행운을 불러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길상경 또는 축복경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행운경이 적합하다고 본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겪는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자신만 잘한다고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니다. 재수가 없으면, 불운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 또한 사랑하지 않은 것과 만날 수 있다. 이럴 때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대 앞에 행운이 있기를!”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행복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미래에도 행복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망갈라경에 실려 있는 30가지 이상 항목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상서로운 일, 좋은 징조, 행운, 번영, 안전, 축복이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망갈라경을 행운경으로 보는 이유에 해당된다.



2023-07-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