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평온한 토요일 아침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22. 11:48

평온한 토요일 아침에

 

 

고요한 토요일 오전이다. 일터에 앉아 있다. 사무실 불은 켜지 않았다. 자연채광이 좋다. 막 좌선을 끝냈다. 청정한 이 마음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일터로 오는 길에 애완견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다. 무려 5천세대 가까이 있는 메가트리아 대단지에서 본 것이다.

 

어느 젊은 여인은 개 두 마리를 줄로 묶어서 산책 나왔다. 한 개가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고 있다. 거리를 더럽히는 행위이다. 사람이 길거리에서 오줌을 누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메가트리아에서 또 어느 여인은 개를 안고 나왔다.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다. 여인은 마치 개를 아기 안듯이 안고 간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 공원에서도 볼 수 있고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다.

 

메가트리아에서 본 것이 하나 더 있다. 어느 젊은 부부는 유모차를 끌고 나왔다. 당연히 아기가 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애완견이 들어 있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본 것이 있다.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여인은 가방을 앞으로 하고 있었다. 가방에는 놀랍게도 애완견이 들어 있었다. 애완견 전용 가방인 것이다.

 

애완견 천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애완견을 기르는 것 같다. 애완견 품종도 다양하다. 아파트 단지에서 본 것은 사람 모습이다. 곱슬곱슬한 흰털로 가득하다. 동그란 머리모양이 사람 같다.

 

애완견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나 고양이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완용으로 키우는 일은 없다. 그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새끼일 때는 볼만 하지만 다 크고 나면 징그럽다. 무엇보다 정들까봐 두렵다.

 

 

애완 동물과 24시간 살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애완동물 이미지가 형성될 것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형성되면 어떻게 될까? 그 이미지를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발생된다면 개나 고양이 등 축생의 동료로 태어날지 모른다.

 

동물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구속하지 않는 것이 좋다. 목줄을 만들어 놓고 키우는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이른바 동물의 권리를 제한 하는 것이다.

 

물건에는 품격이 있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다. 그렇다면 개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그것은 견격(犬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도에 가면 소가 돌아 다닌다. 바라나시 시내에서는 자유롭게 돌아 다니는 소를 볼 수 있다. 우격(牛格)이 존중되는 사회인 것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개도 자유롭게 돌아 다닌다. 견격이 존중되는 사회인 것 같다.

 

견격이 존중되는 나라가 또 있다. 미얀마와 스리랑카이다. 미얀마 위빠사나 선원 순례할 때의 일이다. 양곤에 있는 순룬센터와 마하시센터에서 본 것이 있다. 개가 선원을 자유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 마리가 마치 자신의 마당처럼 활보하기도 한다. 당연히 목줄 도 없다.

 

(술룬 센터)

 

 

미얀마에서 본 개는 마치 들개처럼 생겼다. 애완견만 보다가 개다운 개를 보니 품격이 느껴진다. 자유롭게 돌아 다닌다. 사람들은 내버려 둔다. 그들끼리 새끼 낳으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소유로 하지 않는다. 견격이 존중되는 나라 같다.

 

스리랑카에서도 견격이 존중되는 것을 보았다. 아누라다푸라 아바야기리 불탑 근처에서 보았다. 마치 들개처럼 보이는 개가 한가로이 누워 있다. 역시 주인이 없는 것 같다.

 

(아바야기리)

 

인도나 미얀마, 스리랑카에서 본 개는 견격이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 애완견은 보지 못했다. 물론 애완견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지에서는 보지 못했다. 테라와다불교권 국가에서는 개를 애완견으로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 같다. 견격이 존중되는 사회 같았다.

 

평온한 토요일 오전이다. 날씨는 30도가 넘는다. 움직이면 땀이 난다. 그러나 가만 앉아 있으면 쾌적하다. 더구나 죄선을 끝내고 났을 때의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상쾌한 기분이 깨질 때가 있다. 소음을 접했을 때이다. 자동차 소음을 말한다. 차 지나가는 소리는 견딜만 하다. 그러나 폭죽을 터뜨리는 듯한 소음은 참을 수 없다.

 

오늘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요란한 소음을 들었다. 마치 분노를 표출하는 듯한 폭죽소음이다. 이런 소음은 법으로 규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힘껏, 양껏, 능력껏 내지르는 폭력적 소음에 불선심이 일어났다.

 

 

폭죽소음을 몰고 다니는 사람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소시오패스, 나르시스트, 거울신경이 마비된 자, 지독한 이기주의자 등 온갖 것을 다 붙일 수 있다.

 

폭죽소음을 내는 차를 보면 신고하고자 한다. 그러나 쏜 살 같이 달아나 버리고 만다. 마치 하나의 미꾸라지를 보는 것 같다. 맑은 마음에 흙탕물이 일어나는 것 같다.

 

미꾸라지 같은 사람이 있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사회적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소음기를 단 차를 다니면서 거리를 헤집고 돌아 다닐 때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하게 할 것이다.

 

소음기를 단 차를 모는 자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들었을 때 미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사람들로부터 저주의 말을 들었을 때 저주의 말대로 되기 쉬울 것이다.

 

세상에는 짜증나는 일이 많다. 거리에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좋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애완견이 거리에 오줌을 누고 똥을 싸면 거리가 더럽혀진다. 사람이 거리에 오줌을 누고 똥을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대로변에 산다. 아파트가 대로변에 있어서 차량 소음에 시달린다. 그래서 여름철에도 창문을 닫고 살아 간다. 다만 새벽에는 비교적 소음이 덜하다.

 

오늘 새벽에 창문을 열어 놓았다.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새벽 3시대에 소음기를 단 차가 요란한 폭죽소리를 낸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었을 때 도망 가고 싶어 진다.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살고 싶어 진다.

 

심산유곡에서 살면 소음 공해에서 해방될 것 같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도 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텃세에 시달릴 수 있다.

 

세상에는 보기 싫은 것이 많다. 뉴스를 보지 않는 것도 보기 싫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대선 이후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보기 싫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런 욕망의 세상에서 도망가고자 한다.

 

창문을 닫고 사는 것도 답이 아니다. 산중에서 신선처럼 사는 것도 답이 되지 않는다. 욕망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욕계를 떠나 색계나 무색계로 간다면 보기 싫은 것, 혐오하는 것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욕망의 세계뿐만 아니라 색계, 무색계의 세상에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싫어하여 사라져야 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부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 라훌라에게도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Stn.340)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산천초목삼라만상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실망해서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자각을 지녀라.”(Prj.II.343)라고 설명되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세상을 싫어하여 사라지는 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싫어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을 싫어하여 사라지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해탈이다.

 

부처님은 니까야 도처에서 닙비다(嫌惡), 비라가(離貪), 니로다(解脫)를 말했다. 이 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혐오하여(닙비다), 마치 천의 색깔이 빛 바래는 것처럼 욕망을 사라지게 하고(비라가), 다시는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이 해탈하는 것(니로다)이다.

 

평온한 토요일 오전이다. 오늘 새벽 3시에 일어나 글을 하나 썼다. 잠이 오지 않아 쓴 것이다. 어제 정평법회 후기를 썼다. 이렇게 글을 하나 쓰고 나니 피로가 몰려 왔다.

 

일터로 가는 길에 애완견을 보고 소음기를 장착한 차를 보았다. 폭죽 같은 소음을 들었을 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심산유곡에 살고 싶었다. 그러나 멀리 도망간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터에 와서 유튜브를 보지 않았다. 책도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좌선을 했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났기 때문에 피곤했다. 좌선을 하다 그대로 누워서 잠시 휴식했다.

 

좌선할 때는 추리닝바지를 입고 한다.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잠시 누워 휴식을 취하고 좌선에 임했다. 좌선은 건강할 때, 힘이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좌선을 하고 나기 상쾌했다. 이전에 불쾌하고 짜증났던 마음은 옛날 마음이 되었다. 날씨가 30도 넘지만 자연채광에 이렇게 글을 쓰니 최상의 기분이다. 그러나 이런 기분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수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 수원역에서 3차 시국법회가 열린다. 이전에 두 번 열린 시국법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민주시민으로서 이번 수원법회는 꼭 참석하고자 한다.

 

안양에서 수원가는 것은 마실 가는 것과 같다. 명학역에서 불과 7역 밖에 되지 않는다. 금정, 군포, 당정, 성균관대, 화서 다음에 수원역이다.

 

현 집권세력은 혐오스럽다. 소음기를 장착한 사람들만큼이나 혐오스럽다. 이런 정부를 만들어 준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소위 2번을 찍은 사람들이다. 뙤얕볕에 앉아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2023-04-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