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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불교에서 팔정도가 생소한 이유,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4. 1. 14:05

 

동아시아불교에서 팔정도가 생소한 이유,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에서

 

 

 

 

 

 

 

도인돌인이 있는데

 

도인돌인이 있다고 한다. 도인과 돌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통점은 평소에 둘 다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해야 될 때야 말을 하면 도인이고, 말을 하지 않으면 돌인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할 필요가 있을 때만 하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의 행복경(mangala-sutta)에서도 부처님께서 때로는 이치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라고 말 하였다.

 

쓸데 없는 잡담이나 험담과 같은불선업을 짖는 구업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한 구절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더 없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법에 대하여 말을 해 야 할 때 말을 못한다면 침묵을 지킨다면 도인이 아니라 돌인이라는 것이다.

 

이 보다 더한 경우는 경전에도 없는 잘못된 견해를 말하거나, 경전상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왜곡 하는 경우이다. 이런 잘못된 견해로 상대방을 윽박지르는 사람을 시쳇말로 또라이라 한다.

 

불교의 도는

 

도란 무엇일까. 도라고 말하면 노자의 도덕경의 첫 구절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를 떠 올리게 된다. 이 말뜻은 말로 형상화(形狀化)된 도(可道)는 늘 그러한 원래(原來)의 도(常道)가 아님’을 말한다. 도교의 도가 그런 것이라면 불교의 도는 어떤 것일까.

 

불교의 도를 불도라 한다. 불자들이 법회에 참여 하였을 때 법회가 끝난후 4가지 서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사홍서원이다. 중생을 다 건지고, 번뇌를 다 끊고, 법문을 다 배우고, 맨 나중에 불도를 다 이루겠다고 다짐 하는데 불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불도가 부처님의 도임에는 분명한데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기 위하여 인터넷사전을 찾아 보았다.

 

불도(佛道)는 국어사전에 부처님의 가르침’ ‘수행을 쌓아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짤막 하게 나와 있다. 또 불도를 영어사전에서 찾아 보면 ‘Buddhism’ ‘Buddhist doctrines’ ‘the teachings of Buddha’로 역시 짤막 하게 나와 있다.

 

이렇게 보면 불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불교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도자가 들어 간다면 무언가 수행이 관련이 있을 듯 싶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라고 하지 않던가.

 

동아시아불교에서 생소한 팔정도

 

불교란 무엇일까. 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나름대로 불교는 이런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각자 체험하고 사유한 바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제각각 이지만 무아연기법으로 귀결된다.

 

이를 단지 아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부처님의 위대성은 빛바랜다. 이를 실천하여 수행하는 것이 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도를 실천 하여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단이 팔정도이다. 그래서 팔정도를 사성제와 더불어 부처님의 신성한가르침으로 간주 하는 것이다.

 

신성하다는 뜻은 빠알리어로 아리야(Ariya)라 한다. 또 영어로는 노블(Noble)이라 한다. 부처님의 신성한 가르침인 팔정도를 빠알리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팔지성도가 된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The Noble eightfold Path’이다.

 

 

팔정도

빠일리어

우리말

영어

Ariya-atthangika-magga

(아리야 아땅기까 막가)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의 각지 (八支聖道)

The Noble eightfold Path

 

 

 

팔정도는 한국불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생소한 가르침이다. 실제로 대승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에서 팔정도는 매우 낯선 용어이다. 대신 팔정도 대신에 보살의 실천수행 덕목으로서 육바라밀의 수행이 강조 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대승경전에서 6바라밀의 실천이 강조 되고 있는 것과 달리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 하고 있는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니까야에서는 팔정도가 강조 되고 있다.

 

그러나 팔정도는 속인들(lay people)을 위한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런 팔정도는 부처님이 사성제와 더불어 늘 강조 하던 사항이라 한다.

  

왜 팔정도인가

 

동아시아 불교의 전통에서 팔정도가 생소하지만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는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의 중요함은 니까야 에 나와 있다. 부처님이 위 없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팔정도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을 초전법륜이라 한다. 그 대상은 같이 수행 하였던콘단냐, 아사지, 바파, 마하나마, 밧디야 이렇게 다섯명이었다. 다섯명의 수행자에게 설한 법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八正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S56:11, 상윳따니까야 초전법륜경)

 

 

중도와 팔정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중도가 곧 팔정도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또 열반에 들기 전에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Subhadda)에게 최후로 설한 법도 팔정도이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그러나 나의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불교교단)에만 사문이 있다

(D16, 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부처님은 왜 이렇게 팔정도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을까. 반면에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팔정도가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바로 그것은 깨달음을 추구 하는 방법의 차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대승불교와 상좌불교의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만 따르면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랐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는 것은 부처님이 설한 말씀대로 실천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니까야에 있는 대로 실천 하였다면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로 가는 것이다. 그 길의 종착지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실천해야 되는 것이다. 팔정도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의 대반열반경에서 볼 수 있다.

 

 

수밧다여

 세상에는 많은 종교와 가지가지 가르침이 있다

 종교에 성인 되는  팔정도 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봐라

만약에 팔정도 법이 없으면  가르침을 아무리 열심히 실천 수행 하더라도 

 번째 아리야(성자수다원 성인이 나올  없다.  

 번째 아리야 사다함 성자

 번째 아리야 아나함 성자

 번째 아리야 아라한 성자가 절대로 나올  없다

(대반열반경)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 같은 성자가 되려면 팔정도를 닦아야 하다는 것이다. 팔정도를 닦지 않으면 성자가 될 수 없고, 결코 열반과 해탈에 이를 수 없음을 부처님이 열반 하는 순간까지 강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

 

반면에 아라한이 되기 보다 부처님 자체가 되려 한다면 니까야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이 이미 개척해 놓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길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이 보살의 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세세생생 수 겁에 걸쳐서 보살행을 실천하며 부처가 되기 위한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만 가면 수다원이 되었을 경우 7생 이내에 다시는 어떤 존재로 태어 나지 않는다는 데, 불자들은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 중 어느 길로 가야 할까.

 

 

 

2010-04-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