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식(識)이 윤회한다? 장로들의 원칙 테라와다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7. 6. 2. 11:29

 

()이 윤회한다? 장로들의 원칙 테라와다불교

 

 

법문을 들었을 때 건질 만한 것이 있으면 참으로 유익합니다. 아짠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법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 삼장법사의 법문 중에 주목할 만한 말을 들었습니다. 법사는 우리 교단 스님 중에 한분이 이런 분이 있어요. 이는 굉장히 위험한 현상입니다.” (161202 윤회) 라 했습니다. 법명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대충 어떤 스님인지 짐작이 갔습니다.

 

식이 윤회한다?

 

삼장법사는 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하는 발상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 했습니다. 오로지 식만 윤회한다고 했을 때 이는 가르침에 맞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식이라는 것이 수, , 행이라는 마음부수와 함께 생겨나서 함께 소멸하는 것인데 오롯이 식만 윤회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작년 윤회의 진실이라는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윤회라 하여 삼세양중인과를 말하는 줄 알았으나 삶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삶을 살아 가는 과정을 도표로 설명했는데 아무리 들어도 쉽게 이해 가지 않습니다. 십이연기를 삶에 대입하여 복잡하게 설명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윤회의 진실이라 하는데,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윤회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마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 순간윤회를 윤회라 보는 듯 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에 따르면 식이 윤회한다고 오해한 수행승이 있었습니다. 경에 따르면 사띠는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M38) 라는 악한 견해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식이 윤회한다는 말은 사견도 아니고 악한 견해(pāpaka diṭṭhigata)’라 했습니다. 악견은 악처로 인도하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라며 수행승 사띠를 나무랐습니다. 부처님은 의식도 조건적으로 생겨난다는 것, ,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M38)라며 질책했습니다.

 

오염(kilesa), (kamma), 이숙(vipaka)

 

의식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 , 행 등 마음부수와 함께 발생하고 함께 소멸합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Suddha dhammasamuppāda,

suddha sakhārasantati;

Passantassa yathābhūta,

na bhaya hoti gāmai.

 

순수하게 사실들의 일어남과

순수하게 형성된 것들의 상속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에게

우두머리여, 두려움은 생겨나지 않는다.”(Thag.716)

 

 

이 게송은 아디뭇따 장로가 읊은 이십연 게송 중의 하나입니다. 이 게송에서 순수하게 사실들의 Suddha dhammasamuppāda)”이라는 말은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 등의 원리의 전개를 말합니다. 순수하게 형성된 것들의 상속사실들(suddha sakhārasantati)”이라는 말은 오염(kilesa)-(kamma)-이숙(vipaka)의 형성의 연속을 말합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유전문에 해당됩니다.

 

유전문은 윤회하는 삶을 말합니다. 무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열 두개의 과정은 조건발생이고 동시에 상속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 했을 때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세 가지 요소에 따른 것입니다. 이를 십이연기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오염, , 업의 이숙으로 본 것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사실상 외도의 주장이나 다름 없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식이 윤회한다고 했을 때 이는 아뢰야식이 윤회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변치 않는 식이 윤회하든, 축적된 식이 윤회하든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만 합니다. 한순간에 두 마음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좋아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내려 하는데 동시에 이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있다면 매우 짧은 시간에 번갈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한다면 아뜨만과 같은 하나의 마음이나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마음은 연기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오로지 하나만 있다면 조건발생과 조건소멸, 그리고 상속이라는 연기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아뢰야식과 같은 축적된 마음이 윤회한다면 축적된 마음 중에서 어느 마음이 윤회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생윤회에서 식은 재생연결식이 되어야 합니다. 십이연기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 했을 때, 이 때 식은 재생연결식(paisandhicitta: 生心)’을 말합니다. 재생연결식은 십이연기에서 하나의 과정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만 일어나기 때문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마음의 대상은 일생에 지은 업이 해당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업이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비담마논장에 따르면 무거운 업, 죽음 직전의 업, 습관적인 업, 명시되지 않은 업 순입니다.

 

무거운 업이란 살인과 같은 큰 죄업을 말합니다. 일생을 살면서 가장 무거운 업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산 자는 악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선정수행을 하거나 오계를 준수하는 삶을 산 자는 선처에 태어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식이 윤회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식이라는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조건 발생하여 상속하는 것이 연기법인데 하나의 실체를 가정하여 그 실체가 윤회한다고 보는 것은 연기와 무아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연기의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염된 마음으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하면 괴로움이 뒤 따른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명과 갈애

 

십이연기는 무명에서 시작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라 하여 사성제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했습니다.

 

사성제를 모른다는 것은 연기법을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은 사견에 집착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내가 있다는 유신견입니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등 사견에 집착되어 있으면 번뇌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를 초전법륜경에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kāmatahā bhavatahā vibhavatahā)”(S56.11) 라 했습니다. 결국 갈애(tahā)입니다.

 

윤회의 원인은 갈애

 

부처님의 오도송이 있습니다. 법구경 Dhp.8번 게송을 보면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라 했습니다. 여기서 집을 짓는 자는 갈애를 말합니다.  오랜 세월 윤회한 것은 갈애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음이 임박하면 어떻게해서든지 살고자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여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살고자 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다시 태어납니다.

 

부처님은 집을 짓는 자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윤회하는 원인이 갈애인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마음의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Dhp.154)라 하여 분명히 윤회의 원인이 갈애임을 말씀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갈애를 소멸할 수 있을까?

 

십이연기는 열 두 개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견으로 인한 무명으로 연기가 끊임 없이 회전됩니다. 돌도 도는 원동력은 갈애입니다.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합니다.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갈애입니다. 좋으면 거머 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합니다. 이것이 탐욕이고 성냄입니다.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느낌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늘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좋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좋은 느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면 그만이지만, 좋아 죽겠네라며 즐긴다면 이미 갈애로 넘어간 것입니다.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이 집착입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갈 때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하는데, 집착단계가 되면 이제 업이 형성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른 바 업에 의한 탄생입니다. 이것이 업생입니다. 업과 관련하여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Ya karoti naro kamma,

kalyāa yadi pāpaka;

Tassa tasseva dāyādo,

ya ya kamma pakubbatī

 

착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사람이 업을 지으면,

어떠한 업을 짓든 간에,

그는 그 상속자이다.”(Thag.144)

 

 

 

 

 

 

 

조띠다싸 장로가 읊은 게송입니다. 업의 상속자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이다.”(M135)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업의 가르침은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부처님이 업과 업의 과보를 말씀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윤회의 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무명은 과거의 원인이고, 갈애는 현재의 미래의 원인이 됩니다. 윤회를 멈추게 하려면 갈애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좋고 싫은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말하는 것도 느낌이 갈애로 전개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장로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훌륭한 법문을 들으면 마음이 맑아 집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사유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건질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빤냐와로 삼장법사는 2016 12월 초 법문에서 우리 교단 스님 중에 한분이 이런 분이 있어요. 이는 굉장히 위험한 현상입니다.”라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당시 수행승 사띠처럼 식이 윤회한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빅쿠가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식이 윤회한다는 자가 있습니다. 마치 아뢰야식처럼 식의 실체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장이나 논장에 따르면 식이 윤회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윤회한다면 업식(業識)이 윤회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을 말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가장 무거운 업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 한 존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비담마 논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장로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했을 때 수행승 사띠처럼 가르침을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차 결집당시에

 

어느 시대나 장로들의 말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승단이 혼란에 빠질 때 장로들이 나서서 수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네 차례 결집이 그것입니다. 특히 제3차 결집에서는 비불교적 요소들을 척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236년이 되었을 때 제3차 결집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승원에는 이교도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아소까왕 당시에 이교도들은 자신들에 대한 명성이나 이득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자 불교교단에 들어 온 것입니다. 들어 와서는 자신들의 교리가 진리이고 계율이라고 선언하면서 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또 한편 승단에 들어 가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 머리를 삭발하고 노란가사를 입고 이 사찰 저 사찰 돌아다니면서 정식비구인양 우뽀삿따 등 각종 의식에 슬그머니 끼여 들었습니다.

 

이교도들이 증가함에 따라 한동안 우포삿따 의식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비법이 득세하고 정법이 훼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아소까왕은 목갈리뿟따 띳사장로에게 교단정화에 대하여 논의했습니다. 이것이 제3차 결집의 시작입니다.

 

마하왕사에 따르면 아소까왕은 다양한 견해를 가진 비구들을 모아 놓고 질문했습니다. 아소까왕은 비구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은 분은 제시했습니까?”라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자신의 교리대로 어떤 이는 부처님은 영원주의자라 답하고, 또 어떤 이는 단멸론자, 회의론자 등으로 답했습니다. 아소까왕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교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추방된 비구가 6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소까왕의 보호아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 의해 주도된 3차 결집으로 교단이 정화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천명의 비구에 의하여 9개월에 걸쳐서 결집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천명의 결집이라 합니다.

 

율장, 경장, 논장의 성립

 

3차 결집으로 율장, 경장, 논장 삼장이 성립되었습니다. 3차 결집으로 테라와다불교가 완성된 것입니다. 빠알리어 ‘theravāda’라는 말은 ‘the doctrine of the Theras’의 뜻으로 장로들의 원칙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된 율장, 경장, 논장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교단의 의미입니다.

 

아소까왕은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만이 평화와 행복을 가져 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제3차 결집으로 완성된 율장, 경장, 논장을 인도 주변의 여러 나라에 전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스리랑카입니다. 스리랑카에 전승된 빠알리 삼장은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한국불자들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테라와다는 장로들에 의해 전승된 불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로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보수적입니다. 어느 시대나 어른이 있듯이, 어른은 전통을 지키고 유지해 왔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 하여 정법이 변질 될 때 장로들이 나서서 바로 잡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결집이 좋은 예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외도의 견해로 빠지기 쉽습니다. 부처님이 분명히 식이 윤회하지 않는다고 수 차례 가르침을 폈지만 이를 잘못 이해 하여 식이 윤회한다고 믿고 있는 수생승이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 귀담아 듣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아서 발생된 것입니다.

 

왜 논장을 무시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오늘날 전승되어 온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은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어 온 논서와 주석서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빠알리삼장의 일부인 논장을 무시하고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 했을 때 외도의 견해가 되기 쉽습니다.

 

부처님 그분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려면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석을 보아야 합니다. 논서에는 이해 하기 쉽도록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장로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가르침을 해석한다면 빗나간 견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2017-06-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