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스님의 연과내재론(緣果內在論)과 상키야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유사성
“연(緣)이 과(果)안에 내재되어 있어요.”이 말은 유튜브에서 범일스님의 특강에서 들은 것입니다. 선운사 초기불교 승가대학원 특강 연기법(∥ 범일스님 ∥ 선운사 초기불교승가대학원 특강5.2 연기법)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로 그 동안 의문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난 느낌입니다.
십이연기를 독특하게 해석하는 그룹
십이연기를 독특하게 해석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중표 교수 계열의 그룹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그룹에 속해 있는 대표적인 사람을 들라면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범일스님과 해피스님입니다. 공통적으로 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니까야에 실려 있는 문구만 나름대로 해석하여 독특한 이론을 전개합니다.
최근 해피스님은 테라와다 교단을 떠났습니다. 해피스님만의 독특한 니까야 해석에 따르면 논장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윤회와 관련하여 삼세양중인과와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빠알리 삼장에 기반하는 테라와다의 입장에서 논장을 부정하는 스님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중표 교수는 퇴임을 앞두고 각종 강연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중표 교수는 중론에 입각하여 니까야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시 논장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일까 논장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기조는 범일스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해피스님의 강연에 이중표 교수가 초대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범일스님 출간회에서도 이중표 교수가 초대받았습니다. 이중표 교수가 중론에 입각한 니까야 해석 방식에 동의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중표 교수의 해석 방식에 대하여 경장과 논장에 근거하여 비판 글을 수차례 올린 바 있습니다.
범일스님 연과내재론(緣果內在論)과 상키야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이번에 범일스님의 선운사 특강을 들으면서 “연(緣)이 과(果)안에 내재되어 있어요.”라는 말에 크게 충격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연과내재론(緣果內在論)은 다름 아닌 상키야학파의 원질론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전재성박사가 완역한 청정도론에 따르면 “원질론자들의 원질처럼 결과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Vism.16.9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pakativadin: 자성론자(自性論者)라 한다. 불교적 자성론과 구별하기 위해 원질론이라 한다. 쌍키야(Samkhya) 학파를 말한다. 쌍키야 학파는 결과가 태초부터 존재하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을 주장한다. 결과는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의 전변일 뿐이다. 결과는 원인속에 내재 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 원인을 근본원질이라 하는데, 이것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물질적 우주를 전개시키는 실체로서 우주의 제1원인이다.”(청정도론, Vism.16.91항 각주)
청정도론은 5세기 붓다고사가 앗타까따라는 고주석을 참고하여 저술한 것입니다. 그 시기에 대륙에서 대승불교가 꽃 피우고 있었고 또한 힌두교의 교리가 체계화 되어 가던 시기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위기를 느꼈음에 틀림 없습니다. 마치 대승의 아공법공 논리로 상키야학파의 논리를 부수고 있습니다. 그런 상키야학파의 논리를 ‘자성론’이라 하는데 전재성박사는 불교의 자성과 구분하기 위하여 ‘원질론’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상키야학파의 자성론을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이라 합니다. 결과는 원인속에 내재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원인이 전변된 것이라 하여 이를 ‘전변설(轉變說)’이라 합니다. 그런데 붓다고사는 인중유과론에 대하여 “불사의 진리에는 실체가 없다.”(Vism.16.90)라 하여 도성제와 멸성제와의 인과관계를 부수어 버립니다. 이는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 가운데 괴로움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 가운데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원인에는 결과가 없다는 뜻이다.”(각주)로 설명됩니다. 소멸에는 실체가 없어서 “이처럼 이것들에는 공만이 존재한다.” (Vism.16.90)라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붓다고사는 공의 입장에서 사성제를 설명하면서 상키야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과 바이세쉬까학파의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를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아공법공이라는 공의 논리로 비판한 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멸성제에서 소멸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중유과론도 아니고 인중무과론도 아닙니다.
그들이 논장을 무시하는 이유는
범일스님의 연과론(緣果論)에 따르면 “노사안에 생이 내재 되어 있고 생이 과가 되면 유가 생안에 내재 되어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무명에서부터 생사까지 모두 내재 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안에 연이 이미 내재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결과를 원할 때 그 바탕이 되는 연이 그 과안에 다 내재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부처가 되고자 원할 때 모든 연들이 내재 되어 있다고 합니다.
범일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치 모든 정보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제8식 아뢰야식을 연상케 합니다. 또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연만 만들어 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의 논리와도 유사합니다. 그래서일까 이중표 교수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초기불교 바탕 하에 대승불교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뿌리는 초기불교라 합니다. 그런데 연(緣)이 과(果)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자성론은 다름 아닌 상키야 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주장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명색을 이름-형태로 해석합니다. 이는 니까야에 실려 있는 정신-물질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명색을 이름-형태로 해석해야 인식론적으로 십이연기가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 결과 삼세양중인과는 시간과 공간개념이라 하여 무시하고 오로지 현재 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하는 십이연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중표교수류에 속하는 범일스님이나 해피스님은 논장을 무시합니다. 아니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논장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이론은 설자리를 잃게 되어 버립니다. 그 출발점은 명색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됩니다.
명색을 이중표 교수의 주장대로 이름-형태로 해석하는 것은 우파니샤드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부처님은 정신-물질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초기경전에 명백히 실려 있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가르침을 해석하여 논장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경전을 해석하는 자들은 명색을 이름-형태라는 우파니샤드 방식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십이연기에 인과에 대하여 상키야 학파의 인중유과론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중표류의 경전해석방식은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그래서일까 6세기 청정도론 저자 붓다고사는 “원질론자들의 원질처럼 결과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Vism.16.91)라고 오늘날 상황을 예견하여 써 놓았는지 모릅니다.
2018-05-30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상을 탕탕치는 이유는 (0) | 2018.06.04 |
---|---|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0) | 2018.06.03 |
사랑도 미움도 슬픔도 (0) | 2018.05.30 |
“지금을 즐겨라! 나중에 후회한다.”달콤한 악마의 속삭임 (0) | 2018.05.29 |
초기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절이다 (0) | 2018.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