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시를 읊은 대가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9. 6. 9. 11:20

 

시를 읊은 대가로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향유하지 않으리.”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한 말이다. 부처님이 걸식 나갔는데 바라문의 집 앞으로 가게 되었다. 일곱 집을 차례로 돌기 때문에 이교도의 집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모욕당했다. 어느 바라문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바라문출신들이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바라문 아쑤린다까 바라드와자는 욕설을 퍼부었다. 부처님이 침묵하자 수행자여, 그대가 졌다. 수행자여, 그대가 졌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말로 거칠게 꾸짖으면서 어리석은 자는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인내가 무엇인가 안다면 승리는 바로 그의 것이네.”(S7.3)라고 하면서 인내하는 자가 승리자임을 말했다.

 

바라문 쑨다리까 바라드와자가 불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제사를 다 지내고 난다 음에 누군가에게 공양하고자 했다. 주변을 둘러 보니 두건을 쓴 부처님을 보았다. 부처님이 두건을 벗자 이 존자는 머리를 빡빡 깍았네. 이 존자는 머리를 빡빡 깍았네.”라며 실망했다.

 

부처님 당시에는 머리 깍은 자는 천한 사람이었다.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사성계급을 부정했기 때문에 누구나 승가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머리를 깍은 자가 어느 출신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라문이 보기에 머리를 깍은 자가 노예출신일 수도 있기 때문에 천하게 본 것이다. 그럼에도 바라문은 그대는 어느 가문 출신입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혹시 바라문 출신이라면 제사 지내고 난 음식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십시오.”(Stn.462)라며 출신성분을 따지는 것을 부정했다.

 

바라문은 탁발나온 부처님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얻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신님(如來)은 헌과를 받을 만합니다.”라며 음식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나는 시를 읊은 대가를 향유하지 않습니다.”(Stn.480)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그리고서는 바라문이여, 그것은 바로 보는 이에게 옳지 않습니다. 시를 읊은 대가를 깨달은 이는 물리치니, 바라문이여, 법이 있다면 그것이 진솔한 삶입니다.”(Stn.480)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시를 읊은 것에 대하여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았다. 이는 바라문교 성직자들이 만뜨라를 읊은 대가로 삶을 연명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부처님이 시를 읊은 것은 음식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만일 시를 읊어서 음식을 구걸하고자 했다면 바라문 성직자나 다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바라문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깨달음을 이룬 자들이 게송을 읊어서 음식 얻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 즉 아라한은 어떻게 음식을 얻는 것일까? 이는 부채없이 음식을 즐기네.”(M86, Thag.882))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자기 것을 즐긴다는 말이다. 왜 자기 것인가? 번뇌가 부수어진 아라한은 복전이기 때문에 공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는 굳이 게송을 읊거나 만트라를 낭송한 대가로 음식을 얻지 않아도 된다.

 

수행자가 음식을 즐기는데 있어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도둑질한 것을 즐기는 자이다. 출가했지만 계행이 엉망인자가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한다. 더구나 출가를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도둑중의 도둑일 것이다.

 

둘째로, 빚진 것을 즐기는 자이다. 계행을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지만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자를 말한다. 시주의 시은(施恩)으로 사는 자들이다. 빚진 자들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計功多小量彼來處 忖己德行全缺應供)”라는 공양게송도 빚진 자로서 음식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유산으로 즐기는 자이다. 부처님 교단으로 출가했다면 모두 부처님의 아들과 딸들이다. 승가에서 먹고, 자고, 입는 것이 해결되어 있다면 부처님 은혜로 인한 것이다. 아라한을 제외한 유학이 이에 해당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나는 정법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받아야 한다. 게으른 자가 그것을 받을 수 없다.”(Vism.4.55)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음식에 대하여 부처님의 유산으로 생각하고 먹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것을 즐기는 자이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었을 때 복전이 된다. 비로소 자기 것을 찾아 먹는다. 그래서 주인으로서 음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여법한 삶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를 읊은 대가로 음식 수용을 거절하며 원리가 있다면 그것이 진솔한 삶입니다.”(Stn.480)라고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여법하게 얻은 음식을 수용했다. 게송을 읊거나 만트라를 외운 대가로 음식을 얻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 경전을 낭송하고 게송을 읊고 만트라를 외운 대가로 음식을 얻는다면 도둑질에 해당된다. 누군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다면 도둑질한 것이나 다름 없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향유하지 않으리.

바라문이여, 그것은 올바로 보는 님에게 옳지 않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깨달은 님들은 물리치네.

바라문이여,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진솔한 삶이네.

 

번뇌가 부서지고 회한이 소멸된

원만하고 위대한 선인에게

다른 음식과 음료수로 공양하라.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그는 복밭이 되리.”(S7.8)

 

 

2019-06-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