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느냐고 묻거든
“사는데 뭐 이유가 있나요? 그냥 사는 거죠 뭐.”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다. 그냥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냥’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제1의 뜻은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뜻이다. “그냥 두세요.”라는 말이 좋은 예이다. 그냥을 “걍”이라고도 한다.
그냥이라는 말의 제2의 뜻은 “아무 조건 없이”라는 의미이다. 예로서 “아무 조건없이 그냥 해 본 말이야.”라고 한다. 또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그냥 여기저기 걸어 다녔어.”라는 예문도 있다.
그냥이라는 말의 제3의 뜻은 “그대로 줄곧”의 의미가 있다. “비가 며칠째 그냥 퍼붓고 있다.”라는 말이 예문이다.
그냥이라는 말에 대하여 사유해 보았다. ‘변함없이, 늘상, 있는 그대로’의 뜻이 강하다. 또 ‘그대로 그렇게, 단지, 여전히’라는 뜻도 있다. 영어로는 ‘just, simply, still, as it is’로 표현된다. 일본어로는 ‘ただ, そのまま, ありのまま’의 뜻이다.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냥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살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목표를 정해 놓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원하는 대학에 가려 하거나, 가고 싶은 직장을 목표로 한다면 단계적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오늘 이만큼 했으면 내일 또 이만큼 하는 식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하다보면 어느 순간 돌아보았을 때 엄청나게 진도가 나갔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일이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생각한 것과 실제하고 차이가 났을 때 “어? 생각대로 안되네?”라고 할 것이다.
생각대로 안되는 것은 이론과 실제가 차이 나는 것과 같다. 상황을 잘못 판단했거나 잘못 알고 있을 때 생각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계획없이 그냥 살았을 때 실제와 차이가 날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은 왜 삽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우스개소리로 어떤 이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산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는데 목표나 목적이 있다면 자신있게 ‘이렇게 산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부자를 목표로 해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을 꿈꾸어 보지만 그다지 행복한 것 같지 않다. 이럴 때는 차라리 그냥 사는게 낫다. 살다보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목표나 목적에 대하여 집착을 내려 놓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냥이라는 말은 ‘무집착’과도 상통된다.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물었을 때 “그냥 살지요.”라고 말하는 것도 무집착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목표와 목적이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본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스님, 사람이 즐겁게, 때로는 고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뭐라 답 했을까?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예요.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있나요.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처럼 사람이 사는 것도 다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삶이 즐거운지 아니면 괴로운지는 자기 마음을 제대로 쓰느냐 못 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 ‘왜 사느냐’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올바른 질문입니다.”(법륜스님)
법륜스님은 한마디로 사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이라고 했다. 식물이 자라는데 이유가 없고, 동물이 사는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도 동물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사는데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유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왜(why)가 아니라 ‘어떻게(how)’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표보다 목적이다. 일류대학이나 일류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좋지만 더 큰 목적을 가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삶의 목표가 정해지면 목표는 부수적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행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복을 목적으로 삼으면 안된다. 행복은로 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목적이 있으면 목표는 부수적으로 달성 된다. 그렇다고 수단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하나의 수단일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행복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잠을 잘 때 잠자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잠이 오는 것이 아니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 보다는 “잠이 오면 자지?”라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행복을 목적으로 삼았을 때 이는 집착이 된다.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경험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행복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았을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행복의 스펙트럼은 넓다. 눈과 귀 등 감각으로 맛보는 오욕락에서 부터 열반의 행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누군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락(樂)은 열반의 행복을 말한다. 법구경에서도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고 했다. 이와 같은 최상의 행복을 빠라마수카라고 한다. 다른 말로 궁극적 행복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니까야를 번역하는 각묵스님은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라고 했다. 또 이고득락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했다. 과연 이 말은 맞는 말일까?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을 추구한다. 열반이 궁극적 행복이기 때문에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이라고 말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을 목적으로 했을 때 집착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열반은 집착을 내려 놓았을 때 성취된다. 만일 열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열반을 목적으로 수행정진 했음에도 열반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좌절하고 말 것이다. 마치 선정수행자가 빛을 보고자 하는 마음과 같을 것이다. 빛을 보기 위해 수행 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빛을 보지 못했다면 좌절해서 수행처를 떠나고 말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마타수행자라면 빛을 보기 바랄 것이다. 그가 만약 빛만 바란다면 집착이 된다. 위빠사나수행자라면 궁극적으로 열반을 바랄 것이다. 그가 열반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역시 집착이 된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깨닫기를 바란다. 만약 그가 오로지 깨달음을 위해서만 살아 간다면 깨달음에 대한 집착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잠이 안오는데 잠자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잠이 안 올 때는 잠자려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잠자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빛을 보는 것도, 열반을 성취하는 것도, 깨달음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이 오면 자지?”와 같은 마음자세를 갖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궁극적으로 열반이나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러나 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집착하면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착과 관련이 없는 거룩한 삶이나 청정한 삶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여기서 청정한 삶은 빠알리어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를 번역한 말이다.
“수행승들이여,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험담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공덕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와 같이 나를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해서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제어하기 위해서이고, 끊어버리기 위해서이고, 사라지기 위해서이고, 소멸하기 위해서이다.”(A4.25)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는 ‘순결한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계행을 바탕으로 마음과 지혜를 닦는 삶을 말한다. 니까야에서는 구체적으로 팔정도라고 했다. 청정한 삶은 마음의 오염원을 모두 소멸시키는 삶이기 때문에 열반과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행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삶보다는 행복한 삶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착하고 건전하게 삶으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 꾸살라행(kusala)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십선행을 하는 것이다. 꾸살라행을 하면 행복은 자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웃고 말 것이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친절한 사람이라면 “사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냥 살면 되지요.”라고 말할 것이다. 땅 바닥의 풀한포기가 자라는 데는 이유가 없다. 하늘을 나는 참새가 사는데는 역시 이유가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로 인하여 태어나 살다 죽는 것이 인생이다. 여기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왕이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행복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행복은 집착으로 얻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 착하고 건전하게 살면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도덕적인 삶(持戒), 봉사하는 삶(布施), 수행하는 삶(사마타와 위빠사나)을 살면 된다.
착하고 건전하게 살면 행복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것이다. 그냥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절망에 이르게 된다. 십이연기의 종착지는 절망이다. 이는 니까야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어서,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되어 있는 십이연기 정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유전적 연기의 삶이 아니라 환멸적 연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행복한 삶을 살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 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정한 삶을 살면 열반과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실현될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살면 행복하게 된다. 거룩한 삶을 살면 거룩하게 된다. 그냥 그렇게 살면 그냥 그런 사람이 된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물어야 한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적 질문이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환멸적 연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2020-03-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