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의 미학
포기하면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꽉 움켜 쥐고 있던 것을 놓아 버렸을 때 해방감을 느낀다. 그동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하나 둘 깨지기 시작할 때 놓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을 유폐하여 어둠속에 가만 있다 보면 편안함을 느낀다. 포기의 미학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집착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S22.8)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것은 오온을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고, 나이고, 나의 자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라는데
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etaṃ mama)’이라고 한다. 주석에 따르면 “이것은 갈애에 구속되어 있음을 드러난 것이다.(taṇhāggāha)”라고 했다. 나의 것과 갈애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빠알리어 마마(mama)는 ‘this is mine’의 뜻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오온을 말하고 나의 것은 갈애를 뜻한다. 이 몸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나의 것이라고 갈애 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갈애, 느낌에 대한 갈애, 지각에 대한 갈애, 형성에 대한 갈애, 의식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갈애가 더욱 강화된 것이 집착이다. 집착은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접착제 같은 것이다. 몸에 집착하면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얼굴에 집착하면 얼굴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기면 갈애가 일어난다. 갈애는 윤회하는 요인이 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닾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이다.
갈애가 일어나면 연기가 회전된다. 결과는 어떤 것일까? 십이연기 정형문에서 보는 것처럼 항상 절망으로 귀결된다.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절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것은 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이 나’ (eso'hamasmi)라고 여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것은 자만심에 구속되어 있음을 드러난 것이다.( mānaggāha)”라고 했다. 나와 자만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아스미(asmi)는 ‘I am’의 뜻이다. 나는 나인 것이다. 어떤 나인가? “내가 누군데!”라며 자만에 가득찬 나이다.
자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우월적 자만, 동등적 자만, 열등적 자만을 말한다. 자만이 반드시 우월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D33)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자만에는 우월, 동등, 열등이라는 세 가지 자만이 있다. 그런데 우월에서도 우월, 동등, 열등이라는 자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합하면 ‘아홉 가지 자만(九慢)’이 있다. 자만중의 자만은 우월중의 우월일 것이다. 이는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는 식으로 표현된다.
한나라의 왕이라면 국토와 백성이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자로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Smv.999-991)라고 했다. 수행자에게서도 자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Smv.999-991)라고 했다.
자만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는다. 아라한 되기 전까지는 “내가수다원인데.”라든가, “내가 아나함인데.”라는 미세한 마음의 오염원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프라이드이다. 이런 프라이드가 있었기에 그만한 위치에 올라 갔을 것이다.
자만은 한마디로 ‘내가 누군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이라면 “내가 스님인데.”라는 자만이 있을 것이다. 이를 스님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직에 있다면 직위를 불러 주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상을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퇴임했음에도 전직 직위를 불러 주어서 ‘의원님’ ‘장관님’ 하는 것도 하나의 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상이 형성되면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이 된다.
똥냄새와 같은 자만
똥걸레는 빨아도 똥걸레이다. 아무리 세탁을 해도 더러운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세탁기에 여러 번 돌렸다면 최후로 남는 것은 비누냄새일 것이다. 그럼에도 똥냄새는 미세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미세하게 남아 있는 똥냄새 같은 것이 자만이다.
범부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내가 수다원인데.”라는 미세한 자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을 한다. 수행자는 가 인가해 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보고서 자신이 수다원인 것을 알고서 “내가 수다원이다.”라는 자만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나함이라면 자신을 “내가 아나함인데.”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자만을 제거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케마까의 경’(S22.89)이 그것이다.
수행승 케마까는 중병에 걸렸다. 중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했다. 케마까가 아라한이었다면 괴로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는 괴로워도 정신만큼은 괴로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중병에 걸린 장자 나꿀라삐따에게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재가불자 나꿀라삐따는 중병에 걸려 괴로워 했는데 이는 육체적 괴로움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이라면 육체적 괴로움에서 끝날 것이다. 육체적 괴로움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케마까는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은 것이다.
케마까는 아라한의 전단계였다고 보여진다. 이는 케마까가 “벗들이여, 어떤 고귀한 제자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가운데 미세하게 발견되는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을 아직 끊지 못했습니다.”(S22.89)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케마까는 낮은 단계의 결박, 즉 오하분결을 끊은 성자이다. 아라한 전단계인 아나함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낮은 단계의 결박은 1)유신견(sakkāya-diṭṭhi), 2)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 3)의심(vicikicchā), 4)감각적 욕망(kāma-rāga), 5)악의(paṭigha)를 말한다. 이 중에서 앞의 세가지, 즉 유신견,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타파 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고 하여 수다원이라고 한다.
수다원이 되려면 가장 첫번째 조건은 유신견을 타파하는 것이다. 유신견은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를 말한다. 경에서 “1)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2)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3)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4)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S22.1)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오온 가운데 물질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네 가지로 여기는 사람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이라고 했다.
케마까는 수행승으로서 이미 유신견이 타파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것도 아라한의 전단계인 아나함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중병이 걸렸을 때 참아 낼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성자가 되었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은 자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상분결 중의 하나인 미세한 마음의 오염원이다. 그것은 다면 자만이라는 미세한 오염원은 어떻게 해야 끊어지는 것일까? 케마까는 문병 갔던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 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 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를 없애 버립니다.”(S22.89)
세탁을 하면 세제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똥이 묻은 세탁물을 빨았다면 미세하게 똥냄새도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세제는 오하분결 부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하분결에서 핵심은 유신견이다. 20가지 유신견이 타파되었다고 해도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은 완전히 제거 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금물 냄새, 잿물냄새, 쇠똥냄새가 남아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상분결을 상징한다.
똥 묻은 옷을 아무리 빨아도 똥냄새가 남아 있다. 그래서 세탁한 것을 향기박스에 넣는 것이다. 여기서 향기박스는 오하분결을 부수는 박스라고 볼 수 있다. 향기박스에서 똥냄새를 잡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승 케마까는 오하분결을 타파한 아나함의 경지였다. 그러나 자만은 제거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五聚溫)과 관련해서 ‘나’라’는 것을 뿌리 뽑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온이 내것이라는 유신견에서는 벗어났지만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연꽃의 비유를 들었다.
케마까는 “벗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나 홍련화나 백련화의 향기가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그것이 꽃잎의 향기, 꽃받침의 향기, 꽃 수술의 향기라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한 것입니까?”(S22.89)라며 반문 했다. 꽃 향기는 꽃의 향기일 뿐이지 꽃잎이나 꽃받침 등의 향기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에 장로들은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부정한다. 장로들은 “벗이여, 꽃의 향기라고 설명하면 바른 설명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꽃이 피면 향내가 난다. 요즘은 라일락철이다. 라일락이 피면 바람을 따라 온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래서 라일락 향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는 라일락은 없는 것이다. 라일락은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꽃의 잎과 받침, 수술에서 나오는 향기로 보아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라고 하지만 나는 없다. 인습적으로 부르는 나만 있을 뿐이다. 누군가 “내가 누군데”라고 말한다면 그런 나는 없다. 있다면 오온으로서 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케마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로에게 반문한 것은 자신이 나라는 자만에 대하여 완전하게 제거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실토한 것이러고 볼 수 있다.
케마까는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체험을 하지 못해서 마지막 관문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케마까는 장로들과 이러한 법담으로 인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이는 “이와 같은 법담이 오갈 때에 육십 명의 장로 수행승과 존자 케마까는 집착없이 벗어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성취했다.”(S22.89)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eso me attā)”라고 여긴다. 주석에서는 “그것은 사견에 구속되어 있음을 드러난 것이다. (diṭṭhiggāha)”라고 했다. 여기서 빠알리어 앗따(attā)는 'self, ego, personality’의 뜻으로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사견으로 보고 있다.
자아가 있다는 것은 오온에 대하여 자아에 집착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20가지 유신견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1)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2)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3)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4)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물질에 대하여 네 가지 경우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수, 상, 행, 식에도 그대로 적용하면 모두 20가지 유신견이 된다.
유신견을 갖게 되면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될수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나꿀라삐따의 경’(S22.1)에서 볼 수 있다.
장자가 나꿀라삐따는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이었다. 수다원 단계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중병이 걸려 몸이 아팠을 때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문병을 하여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씀했다. 장자는 이 말을 듣고 기뻐했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부처님 상호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 옆에 있던 사리뿟따 존자가 “그대의 감관은 고요하고 안색이 청정하고 밝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장자는 부처님의 설법에만 만족했다. 이를 ‘충만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는 장자가 “세존께서 가르친 설법으로 감로와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으로서 태도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사리뿟따는 “왜 더 질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며 다그치듯이 물어 본다. 이는 부처님이 ‘배워야 한다’라고 말 했을 때 더 배우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불만을 완곡하게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루뿟따존자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장자에게 설법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수다원이 되기 위한 설법이다. 장자는 신심은 있었지만 유신견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리뿟따존자는 물질에 대하여 네 가지 유신견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즉 1)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2)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3)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4)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라는 것이다. 이런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중병에 걸렸을 때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어서 제2의 화살을 맞게 되는 것이다.
유신견은 모두 20가지가 있다. 물질에 네 가지가 있듯이,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도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네 가지를 합하면 모두 20가지 유신견이 있게 된다.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장자에게 20가지 유신견을 설해 주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일반범부들은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라고 했다. 이런 설법은 장자에게는 맞춤 설법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장기가 퇴화 되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슬퍼한다. 중병이 들면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괴로움도 함께 오기 때문에 더욱 더 고통스러워 한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자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자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몸은 변한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시시각각 변한다. 그럼에도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꼭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몸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임에도 나의 것이라고 꼭 붙잡고 있었을 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고 했다. 이는 정신적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육체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까지 아픈 것이다.
향기박스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심오하다. 오온과 관련하여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오하분결에서 유신견과 오상분결에서 자만에 대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두 가르침은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S22)에서 ‘나꿀라삐따의 경’(S22.1)과 ‘케마까의 경’(S22.89)에서 설명되어 있다.
나꿀라삐따의 경과 케마까의 경에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전자는 재가신자인 나꿀라삐따 장자이고, 후자는 수행승인 케마까이다. 둘 다 경에서는 중병에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나꿀라삐따는 부처님에 대한 신심은 있지만 법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래서 중병에 걸렸을 때 사리뿟따존자에게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다.”라는 20가지 유신견에 대한 설법을 듣고서 환희하고 기뻐했다. 이와 같은 20가지 유신견은 성자의 흐름에 들면 파괴된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에서 20가지 유신견 정형구는 견도를 위한 법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신견을 타파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면 견도가 된다. 다음에는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번뇌는 일반 범부에 비하여 많지 않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S13.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수다원이 된 제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매우 미미함을 말한다. 이렇게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이 수행도이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오상분결을 부수어야 한다. 오하분결이 아나함이 되기 까지 거친번뇌라면, 오상분결은 아라한이 되기 까지 미세한 번뇌를 말한다. 그 중에 자만이 있다. 자만을 부수어야만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케마까의 경에서는 자만을 부수기 위한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이를 세탁물과 향기박스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거친 때가 빠진 것에 대하여 유신견 등 오하분결로 비유했고, 그럼에도 세탁과정에 남아 있는 미세한 냄새를 빼는 것에 대하여 자만 등 오상분결로 비유했다. 그런데 오상분결에서 자만은 매우 미세한 번뇌로서 오온에 대하여‘이것은 나’라고 집착된 것을 말한다.
집착된 것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자만이 그렇다. 똥이 묻은 옷이 있다면 아무리 세탁을 해도 미세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비누와 같은 세제 냄새와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냄새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케마까의 경에서는 향기박스에 집어 넣으면 향기의 훈습으로 인하여 비누냄새와 똥냄새가 제거될 것이라고 했다.
똥냄새와 같은 자만은 제거 되어야 한다. 오온에 집착된 다발에서 발견되는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에 집착된 나라는 관념을 부수어야 한다. 이는 오온을 생멸을 관찰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오하분결에서 자만은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면 제거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이라 불리우는 ‘다섯 명의 경’(S22.59)에서 발견된다. 이 경은 별도로 무아상경이라고 한다.
다섯 명의 경에서 오온의 생멸은 무상, 고, 무아로 관찰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라고 묻는다. 이에 제자들은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이렇게 문답식으로 진행되는데 결국 오온의 생멸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온의 생멸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았을 때 오온에 집착된 나는 파괴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어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된다.”(S22.59)라고 말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하분결을 대표하는 유신견의 정형구와 오상분결을 대표하는 자만을 일으키는 정형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로 시작되는 20가지 유신견 정형구는 거친 것으로 자아에 대한 것이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먼저 부수어야 성자의 흐름으로 들어가고 견도가 된다. 이후 과정은 번뇌를 부수는 수행도이다. 아라한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무아상경(S22.59)이다. 무아상경에서는 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정형구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표현된다. 견해(자아)를 포함하여 갈애(나의 것)와 자만(나)까지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케마까의 경은 자만을 부수기 위한 경이다. 이미 자아라는 거친 견해는 유신견으로 부수어 졌고 남은 것은 나라는 미세한 자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자만은 오온의 생멸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부수어진다. 오온의 생멸은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를 관찰된다. 이렇게 본다면 미세한 자만은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특징에 의해 파괴된다. 이렇게 본다면 케마까의 경에서 언급된 향기박스는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라는 향기박스임을 알 수 있다. 삼법인이 향기박스인 것이다.
심오한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심오하다. 어느 정도로 심오할까? 아난다가 부처님의 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 자신은 이해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난다를 나무라며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했다.”(D14.2)로 말했다. 이 연기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심오한 것은 연기법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실려 있는 오온의 가르침도 연기법 못지 않게 심오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오부니까야에 실려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56개의 주제로 되어 있는 상윳따니까야라 할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중에서도 핵심은 연기의 가르침인 니다나상윳따(S12)와 오온의 가르침인 칸다상윳따(S22), 그리고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 대한 가르침인 살라야따나상윳따(S35)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만 꽤뚫어 알면 부처님 가르침을 모두 아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심오하다는 것이다.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터매틱(Systematic)하다는 것이다. 마치 톱니바뀌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포기의 미학
때로 포기하고 살 때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았을 때 해방감을 느낀다. 이는 다름 아닌 집착을 내려 놓는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속이 상하는 것도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을 것을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나에 대한 것이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아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로 보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으로 본다는 것은 갈애에 따른 것이다. 갈애가 개입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갈애는 모든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이 된다. 오온을 나로 본다면 이는 자만이다. 자만은 매우 미세한 번뇌로서 아라한이 되어서나 없어진다.
나는 없다. 나는 꽃과 같은 것이다. 꽃에는 향기가 나지만 꽃이 향기가 아닌 것과 같다. 꽃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꽃이라는 실체가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있지만 이름만 있을 뿐 나라는 실체는 없다. 있다면 오온에 집착된 나만 있을 뿐이다. 오온에 집착된 나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다발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볼 필요가 없다.
나는 단지 인습적으로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집착한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끊임없이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자아가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갈애(나의 것), 자만(나), 견해(자아)라고 했다. 어쩌면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포기의 미학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때로 포기하고 살면 마음이 편하다. 어느 것에든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2020-04-13
담마다사 이병욱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해야 세상의 끝장을 볼 수 있을까? (0) | 2020.04.15 |
---|---|
반야심경은 아라한찬가 (0) | 2020.04.14 |
무착(無着)의 안온 (0) | 2020.04.07 |
내가 괴로운 이유 (0) | 2020.04.05 |
가사는 아라한의 깃발 (0) | 2020.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