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도 수호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5. 10:48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도 수호된다

 

 

길거리에서 전도사들을 종종 마주치는 경우도 있다. 길목에 서 있으면 피해 가기 힘들다. 그들은 전단지나 작은 선물을 주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떤 이는 지나가면서 예수믿으세요.”라며 툭 던지고 달아나듯이 가버린다. 이런 전도행태에 대하여 어떤 목사는 널판지로 물을 때려 고기 잡는 식이라고 했다. 소리에 놀라서 모두 도망 가 버리고 피래기 몇 마리 잡을 것이라고 했다.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한다면 피곤한 것이다. 길거리 전도사들의 행태가 그렇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법을 청해야 설한다. 그것도 세 번이다. 삼 세번 법을 청해달라고 간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그래야 귀담아 듣는다.

 

가장 좋은 전도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전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포교도 그렇다.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신뢰할 것이다. 하루 한끼를 먹어도 얼굴이 맑고 깨끗하면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곡예사의 이야기가 있다.

 

곡예사의 이야기

 

부처님께서 쑴바국의 데사까라는 마을에 있었다. 부처님은 데사까 마을의 대나무곡예사의 비유를 들어 몸에 대한 관찰(身念處)’를 설명했다.

 

스승 곡예사는 제자 곡예사에게 말했다. 스승은 그대는 대나무 곡예봉에 올라 나의 어깨 위에 서라.”(S47.19)라고 말했다. 서커스에서 보는 어깨 위에 올라서기를 말한다. 그것도 대나무 위에서 하는 것이다. 이는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한순간만 방심해도 무너질 것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당부했다. 스승은 그대는 나를 수호하라. 나는 그대를 수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명한 제자는 스승과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제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자신을 수호하십시오. 저는 저 자신을 수호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수호하면서, 곡예를 보여주고 관람료를 걷고, 안전하게 곡예봉에서 내려와야 합니다.”(S47.19)

 

 

이 대화를 보면 말리까의 경’(S3.8)이 연상된다.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는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라고 물었다. 이에 지혜로운 왕비 말리까는대왕이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빠세나디왕은 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왕인 자신일 것이라는 대답을 기대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빗나갔다. 왕비는 자기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비의 말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자신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제자는 먼저 스승자신을 수호하라고 했다. 남에게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 신경쓰면 남도 자연스럽게 보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제자의 방법이 옳다고 말했다.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도 수호된다

 

곡예사 이야기는 수행에도 적용된다. 곡예하는 것처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음을 말한다. 늘 사띠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 자신을 수호할 것이다.’라며 새김의 토대를 닦아야 하고, ‘나는 남을 수호할 것이다.’라며 새김의 토대를 닦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하고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한다.”(S47.19)

 

 

사띠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 또는 느낌, 마음, 법을 관찰하여 마음이 오욕락이나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게 빼앗기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감각의 문을 수호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을 수호하면 자연스럽게 남도 수호됨을 말한다.

 

스스로 모범을 보였을 때

 

자신을 수호하면 자연스럽게 남도 수호된다. 이는 오계를 지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불살생하면 남이 수호된다. 도둑질하지 않으면 남도 수호되는 것이다. 계를 잘 지키면 자신도 수호될 뿐만 아니라 남도 수호된다. 사띠를 하여 감각의 문을 수호하면 역시 남도 수호된다. 그래서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도 수호된다. (attāna rakkhanto para rakkhati)”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한다. 수행승이 업의 정원을 버리고 밤이나 낮이나 근본적인 명상수행의 토대를 닦고 익히면, 아라한의 경지를 얻는다. 그런데 그것을 남이 보고 실로 이 선한 수행승은 올바로 실천한다.’라고 마음을 기뻐하면, 하늘나라를 구경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는 것이다.”(Srp.III.226)

 

 

바로 이것이 올바른 전도이고 올바른 포교일 것이다. 남에게 다가가서 들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모범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서 감화하게 하는 것이다. 행복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본받고자 하게 하는 것이다. 아라한의 모습이 그렇다.

 

한사람의 도인이 세상에 출현하면

 

아라한은 번뇌가 다한 사람을 말한다. 오로지 지혜와 자비로 넘쳐 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행복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천상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번뇌 다한 아라한의 모습은 천인의 얼굴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룩한 자의 얼굴을 보고서 청정한 마음이 되었을 때 자신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사람의 도인이 세상에 출현하면 세상이 밝아진다.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에 향내가 난다. 도인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간다. 사방팔방 천상에 이르기까지 멀리 퍼져 나간다. 깊은 산속에 살아도 도인의 향기는 도심에까지 이른다.

 

자신의 수행의 결과가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면 남도 보호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남을 보호하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인내하고 해치지 않고 자애롭고 연민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S47.19)라고 했다.

 

타인을 보호하는 네 가지 키워드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은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 타인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인내(khanti), 불상해(avihisā), 자애(metta), 연민(anudayatā) 네 가지가 키워드가 있다. 이것이 타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인내(khanti)하면 타인을 보호할 수 있다. 이는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다.”(Dhp.184, D14.9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육체적 고행이 고행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는 것이 이 가르침에 비추어 최상의 고귀한 고행임을 말한다. 그래서 출가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 님이고, 수행자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 님이다.”(Dhp.184, D14.99)라고 하는 것이다.

 

인내는 힘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힘 없는 자는 인내하지 못한다. 이는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S1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 내는 것이다. 인내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타인도 보호할 수 있다. 그래서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S11.5)라고 했다.

 

아위힝사(avihisā)를 비폭력 또는 불상해라고 한다. 이는 오계 중에서 불생계에 해당되기도 한다.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들은 폭력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Dhp.129)라고 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괴롭히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게 될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이렇게 노래했다.

 

 

예전에 살해하는 자였던 나는

이제는 살해하지 않는 자이네.

오늘 나에게 진실한 이름이 있으니

아무도 해치지 않는 자였네.”(M86)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성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는 해치는 자였으나 이제 해치지 않는 자, 아힝사까(ahisaka)가 된 것이다.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으로

 

신체적으로 제어되면 살생을 여읜 성자가 된다. 살생을 여읜다는 말은 불살생을 말하며 이는 비폭력을 의미한다. 나아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의 실천과 관계가 된다. 사무량심은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말한다.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자애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모든 존재는 행복할지어다.’라고 이익과 안녕을 바라는 것이다. 연민은 고통에 빠진 존재들에게 고통을 여의게 바라는 것이다. 기쁨은 안락을 얻은 존재를 볼 때에 마음에 일어나는 섬세한 만족을 뜻한다. 평정은 모든 존재들에게 한결같이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량없는 마음이란 한량없는 존재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DhpA.III.388)

 

 

사무량심(cattāro appamaññāyo)에 대한 설명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은 네 가지 한량없는 대상을 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지옥에서부터 천상에 이르는 존재에게 이르기까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 중에서 자애와 연민이 핵심이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바라는 마음이 자애이고,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연민이다. 경에서는 타인을 보호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대하여 인내(khanti), 불상해(avihisā), 자애(metta), 연민(anudayatā)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말했다.

 

여기서 ‘anudayatā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연민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동정으로 번역했다. 빠알리어 아누다야(anudayā)연민을 뜻하는 까루나와 같은 뜻이다. 한자어로 연민(憐愍), 애민(哀愍), 애련(愛憐)의 뜻이다. 애처럽고 가엽게 여긴다는 말이다. 연민이나 동정을 뜻하는 까루나 보다는 좀더 강도가 센 말이다.

 

나를 수호하면 남도 수호된다. 이렇게 해야 남도 수호되고 또한 자신도 수호된다. 마치 곡예사가 자신을 먼저 보호하고 남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사념처를 닦았을 때 자신도 보호되고 동시에 남도 보호된다. 이는 남도 보호함으로써 자신도 보호되는 것이다. 이는 인내, 불상해, 자애, 연민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여기서 수행승이 밤이나 낮이나 이러한 청정한 삶 가운데 세 가지나 네 가지 선정을 일으켜, 그 선정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에 접촉해서 관법을 발전시켜 아라한의 경지를 얻는다.”(Srp.III.227)라고 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테라가타에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한다.(Dhammo have rakikhati dhammacāri)”(Thag.303)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법을 따르는 자는 법이 보호해 준다.”라는 말과 같다. 가르침을 잘 실천하면 그 공덕으로 악처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 데싸까의 경’(S47.19)에서는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도 수호한다.”라고 했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도 사랑할 줄 안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은 거꾸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다.

 

먼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도 사랑할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말리까왕비는 빠세나디 왕에게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S3.8)라고 말했다. 이는 대왕을 자신만큼이나 사랑한다는 간접적 표현이다. 이런 말을 알아챈 왕은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소.”(S3.8)라고 말했다. 왕도 왕비를 자신만큼이나 사랑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타수호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폭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가 폭력적이라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그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기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이다.”(S3.4)라고 했다.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상대방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할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자기자신이 수호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제하면 자기자신이 수호된다. 이에 대하여 그들에게 수호는 안에 있으며 그들에게 수호는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기자신은 수호된다.”(S3.5)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면 남도 보호된다. 자신을 보호하려거든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계를 잘 지키기만 해도 자신도 수호되고 남도 수호된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수호함으로써 남을 수호하고, 남을 수호함으로써 자신을 수호한다.”(S47.19)라고 한 것이다.

 

 

2020-11-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