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괴로움 중에서 가장 힘든 괴로움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27. 09:35

괴로움 중에서 가장 힘든 괴로움은

 

 

동녘하늘이 물들기 시작했다. 잠시 동쪽을 보니 해가 떠오르기 전의 하늘이다. 이때가 가장 하루 중에 가장 신비로울 때이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터에 도착하자 마자 18층 꼭대기로 올라갔다.

 

도시의 동녘은 어떤 것일까? 도시도 때로 아름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동이 트는 새벽의 도시는 깨끗하다. 도시의 이미지는 본래 더러운 것이지만 동녁에 보는 도시의 실루엣은 신비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출 직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전 730분부터 불과 일이십분 짧은 동안이기는 하지만 도시는 평온으로 가득하다. 빌딩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도 한다. 건설현장의 타워크레인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동이 텄으니 이제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할 것이다.

 

도는 세상에 있다

 

도는 세상에 있다.”이 말은 영화 삼사라에서 본 것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한 말이다. 욕정으로 불타 괴로워하는 제자 수행승에게 한 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스님은 결국 환속하고 만다. 꿈에 그리던 여인을 만나서 아들까지 낳고 살아 간다.

 

영화 삼사라는 티벳영화이다. 티벳스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티벳스님은 어린 나이에 절에 맡겨져 자랐다. 그러나 자발적 출가가 아니어서 문제가 된 것 같다. 청년이 되었을 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굴에서 오랜 기간 명상수행도 소용이 없었다. 한 여인을 보고서 모든 것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티벳스님은 환속하여 범부처럼 살았다. 때로 범부보다 더 못한 삶을 살기도 했다.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없이 자행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은사스님의 죽음 소식을 듣고 크게 후회한다. 다시 출가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미 처자식이 있다. 처는 크게 질타한다. 머리를 깍고 빨강가사를 입은 티벳스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절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도는 세상에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세상을 떠난 도는 없다.”라는 말과 같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희로애락의 세상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있음을 말한다. 특히 처자식이 있으면 더욱더 극명 해진다.

 

티벳스님은 환상속에서 살았다. 단지 욕정 때문에 환속하고 욕정 때문에 결혼했다. 그 결과 아이가 태어났다. 처자식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불선업을 지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시 재출가하려 했지만 발목이 잡힌 것이다.

 

티벳스님은 자발적 출가가 아니다. 다섯 살 때 절에 맡겨져 자란 것이다. 이런 경우 청소년기가 되면 대부분 절을 떠난다고 한다. 자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절에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티벳스님이 그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출가는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타의에 의해서 출가나 도피형 출가, 생계형 출가라면 세상을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이다. 몸은 출가했지만 마음은 출가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 것들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마음은 세상을 향하기 쉽다. 그런 세상은 어떤 것일까?

 

오물장 같은 세상에서

 

세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세상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한마디로 욕망으로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계이기 때문이다. 삼계 중에서 욕망으로 사는 세상이 욕계이다. 욕계중생은 탐, , 치로 살아간다.

 

욕망으로 사는 세상은 온갖 오염원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 , 치를 뿌리로 하는 갖가지 불선법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오물장 같은 세상이다. 그가 아무리 겉으로는 아름답고 우아해보일지라도 속마음에는 탐, , 치를 뿌리로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오물장같다.

 

오물장 같은 세상이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을 보면 감탄사가 나온다. 나약한 인간의 위대함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백색숲을 이루는 타워형 아파트단지가 멀리서 보면 장관이긴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동이 트는 아침에 보는 도시는 아름답다.

 

 

사람들은 기지개를 펴며 또 하루를 보낼 것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한송이 꽃을 피워 내는 사람들이 있다. 오물장에서 피는 연꽃과 같은 사람들이다. 부처님 같은 사람들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부처님도 세상에서 살았다. 귀하게 태어났으나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은 한번도 세상을 떠나서 신선처럼 산 적이 없다. 부처님은 항상 중생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탐, , 치의 세상에 오염되거나 물들지 않았다. 마치 흙탕물에 핀 연꽃과 같다.

 

희로애락이 있는 세상

 

세상속에 도가 있다. 희로애락이 있는 세상이야말로 도닦기 좋은 곳이다. 만일 기쁨과 행복만 있는 천상이라면 괴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깨닫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했다. 괴로움이 단순한 괴로움이 아니라 거룩하고, 성스럽고, 고귀한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괴로움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를 설했고,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하여 집성제를 설했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하여 멸성제를 설했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하여 도성제를 설했다. 모두 괴로움과 관련된 것이다.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곳이다. 즐거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시적이다. 본질적으로 괴로운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결국 괴로움으로 회귀 되고 만다. 거시적으로는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죽음이 괴로움일까?

 

죽어가는 자는 죽음이후를 모른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죽음이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는 태어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사는 중생들은 불선업을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죽으면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에 따라 적합한 세계에 다시 재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남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죽는 순간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지은 업에 따라 윤회하기 때문에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 그 사이에 있는 삶은 당연히 괴롭다. 늙는 것도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다.

 

괴로움에는 생노병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이 모든 괴로움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오온의 집착이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괴로움 중에서 가장 힘든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세상이 생겨나는 것은 괴로움이 생겨남을 의미한다. 세상이 괴롭다고 지각해야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이 즐겁다고 보면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0)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수많은 생을 윤회했다. 그러나 그 시작을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면 끝임없이 윤회하게 되어 있다. 그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고 치더라도 삶의 과정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을 겪는다.

 

괴로움 중에서 가장 힘든 괴로움은 무엇일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괴로움 중에서 최고의 괴로움을 들라면 아마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appiyehi sampayogo dukkho: 怨憎會苦)”(S56.11)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는 상황과 맞닥뜨리는 것도 괴로움이다. 현실적으로 이것 만한 괴로움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도망 갈 수도 없다. 괴로움을 감내해야만 할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말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셨다. 괴로움에 대한 문제제기로 그친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 주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요즘 매일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있다. 빠알리팔정도경을 암송하면 일시적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난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팔정도경을 암송하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리고 기쁨이 일어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암송했을 때 저절로 사두, 사두, 사두!”라고 내 뱉는다.

 

 

동녘 도시의 실루엣은 장엄하다

 

오늘 아침 오피스텔 가장 높은 곳에서 동안양을 바라보았다. 해뜨기 전의 동녘은 아름다웠다. 동쪽 하늘 구름이 빨갛게 물들 때 보는 도시의 실루엣은 장엄했다. , , 치로 살아가는 도시도 때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과가 시작되면 다시 욕망의 도시가 될 것이다. 이럴 때 부처님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한다.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0)라고.

 

 

2021-0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