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와 혼침은 악마의 군대
피곤했나 보다. 점심을 먹고 졸음이 쏟아 졌다. 의자에 앉아서 잠깐 졸았다, 기분 좋은 꿀맛 같은 잠이다. 깊은 잠도 아닌 옅은 잠이다. 나른한 기분이 되어서 기분 좋은 잠이다. 이 상태 그대로 계속 있고 싶어 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상태가 있다. 점심을 먹고 졸린 상태를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 경계에 걸쳐 있어서 몸과 마음이 이완된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즐기고자한다. 더구나 바람까지 살랑살랑 부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런 행복은 돈 주고 살 수 없다. 왕권이 부럽지 않고 천상이 부럽지 않다.
오후 식곤증이 와서 졸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졸림을 즐겨야 할까 벗어나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이전에 읽었던 경이 생각났다. 경의 이름은 ‘졸고 있음 경’이다.
목갈라나 존자가 졸고 있을 때
앙굿따라니까야 일곱 번째 법수에 ‘졸고 있음 경’(A7.61)이 있다. 경의 제목이 순수한 우리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 ‘졸림의 경’이라고 작명했다. 이는 빠짤라(pacalā)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shaking, trembling, wavering’의 뜻이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조는 모습이 연상된다.
부처님은 천안통으로 마하 목갈라나 존자가 조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눈 깜짝할 사이에 목갈라나 존자 앞에 나타났다. 부처님은 “그대는 졸고 있지 않았는가?”라며 물었다. 이에 목갈라나 존자는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라며 솔직하게 말했다.
목갈라나 존자는 명상 중에 있었다. 그러나 혼침이 와서 졸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혼침을 즐기고 있었을지 모른다. 먼저 부처님은 “혼침에 빠뜨리는 그러한 지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고 그러한 지각을 익히지 말라.”(A7.61)라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일곱 가지 혼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1) 듣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마음으로 사유하고 숙고하고 정신으로 탐구하여야 한다.
2) 듣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상세히 암송해야 한다.
3) 양쪽 귀를 잡아당기고 손으로 신체를 마찰해야 한다.
4)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양쪽 눈을 씻고 사방을 쳐다보고, 별자리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5)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기울이고, 대낮에 대한 지각을 확립해야 한다.
6) 앞과 뒤를 지각하면서 감관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정신을 밖으로 흩어지게 하지 않고 경행한다.
7)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자가 누운 형상을 취해야 한다.”(A7.61)
잠을 잘 때는 깨어 날 것을 염두에 두며 자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깨어 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잠자리에 들면 잠자기 직전까지 사띠하는 것이 되고, 또한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사띠하는 것이 된다.
잠을 싹 달아나게 하려면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의 글을 보았다. 선방에서 좌선하는 어느 스님은 앉아 마자 방아를 찢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또 유튜브에서 어느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스님은 열반을 체험했다고 말하는데 혼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좌선한다고 하여 모두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집중을 잘못했을 때 혼침이 될 가능성이 높음을 말한다. 어떤 것인가? 이는 부처님이 “혼침에 빠뜨리는 그러한 지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그러한 지각(taṃ saññaṃ)’은 집중하는 대상이 잘못된 것임을 말한다.
좌선중에 졸립거나 혼침이 일어나면 즉시 깨어나야 한다. 이에 대하여 가장 먼저 듣고 배운대로 사유하고 탐구해야 함을 말한다. 그 다음에 듣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암송해야 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양쪽 귀를 잡아당긴다든가 손으로 신체를 마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 항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잠이 싹 달아날 것이다.
운전할 때 졸리면 괴롭다.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장거리를 뛰면 졸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고속도로에서 졸음이 오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다음 휴게소까지는 멀리 있다. 어떻게 해서던지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창문을 열어 놓는다든가 껌을 씹는 등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안되면 노래를 부른다. 그럼에도 그 순간 졸음이 치고 들어온다. 그럼에도 졸음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차선이 바뀌어져 있을 때 화들짝 놀란다. 그때 졸음이 싹 가신다.
네 번째 항을 보면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좌선 중에 졸음이 쏟아져서 방아를 찧고 있다면 그 즉시 일어나야 한다. 맑은 물에 얼굴을 적시면 졸음이 싹 달아날 것이다. 밤 중이라면 별자리를 보라고 했다. 졸리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대졸신입사원 연수받을 때 일이다. 오후 시간만 되면 졸렸다. 강사의 강연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연수 지도하는 사람은 “졸리는 사람은 조용히 일어나서 뒤에 가서 서 있으세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졸리면 일어나서 뒤에 서 있는 것이다. 서서 졸지는 않는다.
다섯 번째는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기울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좌선 중에 졸리면 광명상을 취하라는 것이다. 이는“빛에 대한 지각을 갖추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D2.6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빛에 대한 지각은(ālokasaññā)’은 광명상(光明想)을 말한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빛을 지각할 수 있기 위하여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각을 갖춘다.”(Smv.211)라고 했다.
여섯 번째는 경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행은 ‘caṅkam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a terraced walk; walking up and down’로 설명된다. 가볍게 걷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처에서 경행은 몸을 푸는 것 이상이다. 경행하면서 한동작 한동작 알아차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선(行禪) 또는 보수행(步修行)이라고 한다.
미얀마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좌선과 행선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그래서 좌선을 한시간 하면 반드시 행선을 한시간 해야 한다. 선원에서 시간표를 보면 짝수 타임은 좌선시간이고, 홀수 타임은 행선시간이다.
좌선과 행선을 번갈아 하면 졸리지 않는다. 또한 상기병도 생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위빠사나 지혜를 증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이다.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지, 수, 화, 풍 사대를 관찰할 뿐만 아니라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도 갖게 된다.
가장 최후의 수단은 자는 것이다. 이런 저런 방법을 시도해 보아도 혼침이 계속된다면 정식으로 자는 것이다. 밤을 새면서 좌선할 수 없다. 몇 날 몇 일을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잠을 자면 가뿐하다. 잠을 자고 나면 산뜻한 마음이 되어서 효율이 높아진다. 또한 잠을 잘 자면 면역력도 높아진다.
부처님도 잠을 잤다. 그러나 많이 자지 않았다. 심야에 잠시 눈을 붙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자가 누운 형상을 취하며 잠을 잤다고 한다. 등을 대고 자지 않고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자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깨어 있음을 말한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원리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야 할까? 배고프다고 먹고 졸린다고 잔다면 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 어느 수행승이 은사스님(upajjhāyo)에게 “존자여, 지금 제 몸은 권태롭고, 저는 방향을 잃었습니다. 가르침도 제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해태와 혼침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A5.56)라고 말했다. 이럴 때 은사스님은 무어라고 말해 주어야 할까? 경에서는 은사스님이 부처님에게 어떻게 하면 수행승을 지도하면 좋을지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이여, 감관의 문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양을 모르고, 깨어 있음에 몰입할 줄 모르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하여 통찰하지 못하고, 초야와 후야에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대한 명상수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항상 그렇다. 그의 몸은 권태롭고 방향을 잃는다. 가르침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다. 해태와 혼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감동도 없이 청정한 삶을 산다. 그에게는 가르침에 대한 의혹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수행승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나는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깨어 있음에 몰입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하여 통찰하고, 초야와 후야에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대한 명상수행을 닦겠다.’라고 배워야 한다.”(A5.56)
부처님이 말씀하신 요점은 세 가지이다. 감관수호, 음식절제, 깨어있음에 전념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만 잘 지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이 세 가지에 대하여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라는 말은 부처님 가르침에 없다.
권태와 수면은 악마의 군대
백년도 못사는 인생이다. 또 인생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것처럼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 간다. 그런 것 중에는 잠도 있다.
잠을 많이 자는 것은 좋지 않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원리는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A3.10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즐겨도 만족이 없는 것 세 가지는 잠, 술, 섹스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수행자에게 허용되는 것은 잠이다. 그러나 아무 때나 자서는 안될 것이다. 졸린다고 자서도 안될 것이다. 잠자리는 드는 시간을 제외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특히 혼침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수행자에게 혼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잠은 아무리 많이 자도 만족이 없다. 잠을 많이 자면 꿈만 많아질 것이다. 짧은 인생을 꿈속에서 보낼 수 없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했다. 특히 혼침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심지어 부처님은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Stn.437) 라고 했다. 부처님은‘해태와 혼침(thinamiddha)’에 대하여 마구니, 악마의 군대(mārasenā)로 본 것이다.
잠을 잘 자는 자가 깨달은 자
오수를 즐길 것인가 말 것 인가?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이면 피로가 풀린다. 그리고 활력이 생겨난다. 고속도로 주행하다 졸리면 졸음쉼터에서 잠시 눈을 붙이면 졸림에서 해방되고 사고도 예방된다. 그러나 잠을 잘 잔 사람에게는 늘 깨어 있다.
잠을 잘 자는 자가 깨달은 자이다. 잠을 잘 자는 탐, 진, 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잠을 잘 자는 것이다. 그에게 탐욕의 밤이나 성냄의 밤이나 어리석음의 밤이 된다면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고 말씀하셨다.
2021-02-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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