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승한 자를 대상으로 하여, 카라반의 리더 천인사(天人師)
한국불교에서 스님에 대하여 ‘인천의 스승’이라고 한다. 이는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의 하나인 천인사를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천인사는 부처님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이다.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다. 이는 삿타데와마눗사낭(satthādeva-manussānaṃ: 天人導師)을 번역한 말이다.
카라반의 리더로서 부처님
청정도론에 천인사에 대한 설명이 있다. 가장 먼저 “현세와 내세와 궁극적 의미로 적절하게 가르치시기 때문에 스승이다. (Diṭṭhadhammikasamparāyikaparamatthehi yathārahaṃ anusāsatīti satthā)”(Vism.7.49)라고 했다. 여기서 궁극적 의미(paramattha)는 열반을 말한다.
부처님은 현세(Diṭṭhadhammika)뿐만 아니라 내세(samparāyika)에서도 궁극적인 열반을 가르치는(anusāsatī) 스승(satthā)라고 했다. 여기서 현세는 이 세상을 말하고, 내세는 저 세상을 말한다. 이 세상은 인간세상을 말하고, 저 세상은 신들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삿타데와마눗사낭이라 하여 신들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라고 한다.
스승을 뜻하는 삿타(satthā)는 본래 대상의 뜻이다. 사막을 건너는 카라반을 말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삿타와하(satthavāha)가 된다. 이는 ‘a caravan leader’의 뜻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카라반의 리더로서 부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예를 들어 카라반의 지도자가 카라반을 인도하여 황야를 건너게 하고, 도적이 출몰하는 황야를 건너게 하고, 맹수가 출몰하는 황야를 건너게 하고, 기근이 닦치는 황야를 건너게 하고, 물이 없는 황야를 건너게 하고, 넘어서게 하고, 가로지르게 하고, 벗어나게 하여, 안온한 땅에 도착하게 한다.”(Vism.7.49)
이 말은 닛데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삿타를 키워드로 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 검색해 보니 경전적 근거가 있다. 두 개의 경에서 발견된다.
카라반의 리더로서 부처님에 대하여 디가나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나는 돈과 재물을 가지고 사막을 가로질러 길을 여행했는데, 이제는 안전하게 위험없이 사막을 빠져나왔고 나에게 재산상의 손실도 없었다.” (D2.70)라는 내용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돈과 재물을 가지고 사막을 가로질러 여행하는데 손실이 없었음을 말한다. 이는 카라반 리더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
두 카라반 리더가 있었는데
사막을 건널 때 리더를 잘 만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돈과 재산을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도 잃는다. 디가니까야 ‘빠야시경’(D23)에서는 이런 위험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경에서는 두 명의 카라반 지도자 비유를 들었다.
부처님은 종종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본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도 말한 의미를 이해합니다.”(D23.24)라고 했다.
옛날에 천 대의 수레를 가진 카라반이 동쪽에서 서쪽 지방으로 가고 있었다. 인도에서 서쪽 지방은 동쪽에 비해 건조해서 황무지도 많고 사막도 있다. 서쪽으로 무역을 하려면 반드시 황야나 사막을 건너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니 가는 곳마다 물도 부족하고 땔감도 부족했다. 그래서 수레를 반으로 나누기로 했다. 각각 오백대로 나누어 건너기로 한 것이다.
먼저 오백대 수레가 출발했다. 그런데 먼저 출발한 카라반 리더는 사람을 잘 믿었던 것 같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의 말만 믿고서 가지고 있던 물과 땔감을 모두 버려 버렸던 것이다. 저 너머에는 물과 땔감이 풍부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정보였다.
먼저 떠난 오백대 수레는 물 없이 땔감 없이 사막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물도 없었고 땔감도 없었다.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에서는 “그들은 모두 불운과 파멸에 빠졌습니다. 그 카라반에 소속된 사람들과 동물들은 인간이 아닌 야차의 밥이 되었으니, 오직 해골들만 남았습니다.”(D23.24)라고 했다.
먼저 떠난 오백대 수레는 카라반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사막에서 모두 죽었다. 그러나 나중에 떠난 오백대의 카라반 지도자는 현명했다. 반대편에서 온 자가 말하는 정보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물도 땔감도 버리지 않고 사막으로 갔다.
나중에 떠난 카라반은 먼저 떠난 카라반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사람의 말을 너무 믿었던 것이다. 이에 현명한 카라반 지도자는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준 사람에 대하여 “그러나 이 사람은 우리의 친구도 아니고 친척도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를 믿고 가겠습니까?”(D23.24)라고 말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정보를 알려 주지만 그 정보가 올바른 것인지 알 수 없다. 특히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그렇다. 가는 길의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그쪽 상황을 물어보았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더구나 그가 그곳에는 물과 땔감이 많으니 무겁게 물과 땔감을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알려 주었을 때 이를 곧대로 믿는다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카라반 리더는 여행자의 말을 참고만 할 것이다. 판단은 리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남의 말만 믿고, 남이 하라는 대로 했다가는 목숨을 잃는 수가 있다. 그래서 현명한 카라반 리더는 카라반 대원들에게 “여보시오, 이 카라반은 어리석은 카라반 지도자의 인도로 불운과 파멸을 겪었소. 여보시오, 우리의 카라반에게 값싼 상품은 버리고 이 카라반의 값비싼 상품을 가지고 갑시다.”(D23.24)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카라반의 비유를 든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카라반은 무역을 상징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상업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라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의 최대 후원자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무역을 해서 크게 부자가 되었다.
어떻게 허무주의적 견해가 생겨나는가?
부처님을 카라반의 리더로 본 것에는 사견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스승들의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서 카라반의 비유를 든 것이다. 건너기 어려운 황무지나 사막을 건너는데 있어서 정견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 곧이 곧대로 믿었을 때 재난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 깟싸빠는 허무주의 사견에 빠져 있는 빠야시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자여, 이처럼 그대도 그 앞서 간 카라반의 지도자처럼, 어리석고 바보 같아서 이치에 맞지 않게 저 세상을 찾으시면서 불운과 파멸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것은 당연히 믿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들도 그 마차꾼들처럼 불운과 파멸에 빠질 것입니다. 왕자여, 사견을 버리십시오. 왕자여, 나쁜 사견을 버리십시오. 그것으로 인해 오랜 세월 불익을 겪고 고통을 겪지 마십시오.”(D23.24)
빠야시 왕자는 사견에 빠졌다. 허무주의라는 사견을 말한다. 어떻게 빠졌을까? 경을 보면 놀랍게도 오늘날 허무주의들이 단멸론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세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D23.6)라고 했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 누군가 보시를 하면 공덕이 되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악행을 저지르면 지옥에 태어난다고 말하는데 그가 정말 지옥에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아직 죽어서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이다.
사견에 빠지는 자들은 남의 말을 잘 믿는다. 죽어서 돌아온 자가 없다는 말을 믿고서 보시를 해도 공덕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고 현명한 자는 취한다.”라는 견해가 생겨날지 모른다.
천상이나 지옥을 직접 보고 온 사람이 있다면 믿을 것이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단멸론자들의 견해와 같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내세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빠야시 왕자에게는 “저는 이러한 이유로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D23.6)는 허무주의적 견해가 생겨난 것이다.
천신이 된 개구리 만두까 이야기
천인사로서 부처님은 천신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개구리 만두까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개구리 만두까가 각가라 연못에서 살았는데 부처님 설법을 듣던 목동의 막대기에 짓눌려 죽은 이야기를 말한다.
짬빠 주민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그 중에 한목동이 자신도 모르게 막대기를 바닥에 대었는데 부처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하던 개구리 만두까가 짓이겨져 죽었다.
개구리 만두까는 천상에 태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친의연(親依緣: upainissaya)으로 설명한다. 이는 “강력한 원인으로서 자조(資助)하는 것으로 의존조건 가운데 수승한 것으로 도덕적-비도덕적 상태가 각각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준다.”(KPTS본 청정도론, 1250번 각주)라고 설명 어 있다.
개구리 만두까는 “세존의 목소리에 대하여 인상을 파악하였다.”(Vism.7.51)라고 했다. 부처님 법문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름다운 목소리에서 표상을 취한 것이다. 그때 목동이 무심코 누른 막대기에 짓이겨 죽었는데 부처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한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것도 삼십삼천 환희동산에 태어났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개구리 만두까는 “잠에서 깨어난 듯, 거기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보고”(Vism.7.51)라고 묘사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화생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잠에서 깨어나듯 천상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개구리만두까는 천신이 되었다. 천녀에 둘러 쌓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서는 “오! 내가 여기에 태어나다니. 내가 어떠한 업을 지었는가?”(Vism.7.51)라며 생각했다.
천신이 된 만두까는 마음을 한곳에 모아 가만 생각해 보았다. 연못에서 목동의 막대기에 짖이겨 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부처님이 계신 천궁에 가서 두 발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런 사실을 아시는 부처님은 법문을 해 주었다.
개구리에서 천신이 된 만두까천신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흐름에 든 자가 되었다. 수다원이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해서 청정도론에서는 “그들도 세존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친의조건의 성취에 도달하여, 그 친의조건의 성취를 통해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생에서 길이나 경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Vism.7.50)라고 했다.
수승한 자를 대상으로한 천인사(天人師)
부처님은 인간에게만 법을 설한 것이 아니다. 천신들에게도 가르침을 설했다. 개구리에서 천신이 된 만두까에게 법을 설했을 때 “팔만사천 명의 뭇삶들이 법문을 꿰뚫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천상의 존재들은 수승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법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음을 말한다.
개구리 만두까 이야기를 보면 먼저 인간이나 천신이 되어야 가르침을 알아 들을 수 있다. 축생들은 가르침을 설해도 언어적 기능이 없어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성취하려면 먼저 축생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한번 축생에 떨어지면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사람 몸 받기 힘들다고 한다. 개구리 만두까는 부처님이 설법한 연못에 있었기 때문에 천신으로 태어날 수 있는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희유한 일이다.
천인사는 신들과 인간에 대한 스승으로서의 부처님이다. 이는 신들과 인간에게 가르침을 설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것은 수승한 자들을 한정하고 유능한 자들을 한정하여 말한 것이다.”(Vism.7.5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처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가르침을 설한 것임을 말한다.
선처가 있다면 악처도 있다. 부처님은 천상과 인간처럼 수승한 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을 펼치지 않으셨다. 부처님의 명호 중에 ‘조어장부’가 있는데 이는 축생과 같은 자들에게도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설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과 천신들에게 법을 설했다. 이런 부처님에 대하여 삿타데와마눗사낭(satthādeva-manussānaṃ)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과 인간의 스승임을 말한다. 한자로 천인사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인도사(天人導師)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태어남의 황야(jātikantāraṃ)를 건너게 해 주시는
부처님은 천신과 인간을 열반으로 이끌어 주시는 스승이다. 이를 사막을 건너게 하는 카라반의 리더로 설명했다. 그래서 삿타데와마눗사낭이라고 하는데, 직역을 하면 천신과인간의 카라반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카라반의 리더(satthavāha)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삿타와하로서 부처님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카라반의 지도자로서 뭇삶들을 인도하여 황야를 건너게 한다. (evameva bhagavā satthā satthavāho satte kantāraṃ tāreti)”(Vism.7.49)라고 했다. 부처님은 ‘태어남의 황야(jātikantāraṃ)’를 건너게 해 주시는 님이기도 하다.
태어남의 황야를 건너게 해주는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유익, 안녕, 행복을 위하여”(It.80)라고 했다.
부처님은 건너기 어려운 황야나 사막을 건너게 해주는 대상의 지도자 또는 카라반의 리더와 같다. 이처럼 카라반 리더로서 부처님에 대한 찬탄은 니까야 도처에서 게송으로 알려져 있다.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캐러밴의 지도자여, 허물없는 님이여,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S6.1)
“전쟁에서 승리자,
카라반의 지도자, 위없는 님에게
세 가지 명지를 지니고
죽음을 극복한 제자들이 예배하네.”(S8.7)
“위없는 카라반의 지도자에 의해
잘 설해진 길을 여행하며
행복하신 님의 가르침에 방일하지 않는 자들
그들은 세상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It.80)
2021-03-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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