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안거 해제 즈음한 탁발법회 , 재가안거 83일차
오늘은 재가안거 83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 우안거 해제 즈음한 법회가 있었다. 서울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에서 빤냐와로 스님등 한국테라와다불교 상가 아홉 분이 참석한 법회였다.
법회 시간에 맞추어 전철을 탔다. 명학역에서 남영역까지는 50분 가까이 걸린다. 선원에 도착하니 거의 10시가 다 되었다.
사람들은 상가 스님들 맞을 준비를 했다. 보시 물품이 들어 있는 쇼핑백도 보였다. 별도로 물품을 준비하지 않았다. 밴드에 공지된 대로 미리 계좌번호에 이체한 상태였다.
10월 22일 법회에서는 모두 아홉 분의 상가 스님들이 참석했다. 아짠 빤냐와로마하테로, 담마위하리스님, 떼짓사라스님, 빤냐왐사스님, 떼자사미스님, 케마짜라스님, 웃따마시리스님, 악까사또스님, 냐냐시리스님 아홉 분의 상가스님을 초청하여 모시고 왓사해제를 기념하는 보시와 왓사해제를 기념하는 법문을 듣고자 한 것이다. 또한 도반들간 법담도 나누면서 불방일의 마음을 증장시키는 뜻 깊은 시간을 갖고자 탁발법회를 갖은 것이다.
탁발법회는 탁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적 현실에서 본래의 의미의 탁발은 가능하지 않다. 실내에서 약식으로 한다. 중요한 것은 율장 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다.
식순에 따라 예경문, 삼귀의, 오계 등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법문이다. 빤냐와로 스님이 법문했다.
빤냐와로 스님은 먼저 대중을 향하여 “번뇌가 탁 끊어진 것 경험한 사람 있어요?”라고 물어 보았다. 왜 이렇게 물어 보았을까? 그것은 안거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이다. 이번 안거에서 성과가 있었는지 물어 본 것이다.
담마와나 법회는 수행법회이기 쉽다.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모두 수행자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법회는 수행점검 법회가 된다.
법회는 질의응답으로 진행되었다. 재가수행자들이 질문하면 스님이 응답을 하는 식이다.
어느 재가수행자가 물었다. 수행자는 생각과 망상이 다 없어지고 고요함만 남았다고 했다. 이에 스님은 번뇌가 떨어졌는지 물어 보았다.
번뇌가 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탐, 진, 치가 소멸된 것을 말한다. 그런데 고요함만 남았다고 해서 번뇌가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님은 고요함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말했다. 평온함도 마찬가지이다.
스님은 고요함과 평온함을 즐기지 말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주관찰 대상으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든가 경행을 하라고 했다.
고요함은 두 가지 단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는 위빠사나 3단계에 해당되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와 11단계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na)’를 말한다. 수행자들이 고요함과 평온함을 경험했다고 말할 때 두 단계이기 쉬운 것 같다.
위빠사나 지혜는 단계적으로 얻어진다. 우 조티카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에 따르면 1단계 지혜와 4단계, 5단계, 11단계 지혜가 관건이라고 한다. 누군가 고요함과 평온함에 빠져 있다면 아마 4단계 생멸의 지혜 이전에 머물러 있기 쉬울 것이다.
위빠사나 지혜 중에서 범부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상의 지혜는 11단계 상카루뻭카냐나(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일 것이다. 이 지혜 단계에 이르면 역시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게 되는데 4단계 이전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승한 것으로 본다.
고요함과 평온함, 위빠사나 수행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맛을 보았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 있을 때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대중에게 번뇌가 끊어진 사람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답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도 탐, 진, 치가 끊어진 단계에 도달한 것 같지 않다. 도와 과에 이른 수행자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결과가 없으면 다시 결제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재가안거를 하고 있다. 재가안거라는 말은 스스로 명칭 붙여 본 것이다. 7월 30일 우안거 입재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했다. 그 다음날부터 안거에 들어갔다.
안거 장소는 사무실이다. 사무실을 칸막이로 반으로 나누어 명상공간을 만들었다. 매트를 깔아 놓으니 세 평정도 되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이 공간에서 좌선도 하고 북콘서트도 한다.
입재법회 다음날부터 오늘까지 재가안거를 하고 있다. 오늘로서 83일째이다. 이제 7일만 지나면 해제가 된다. 거의 석달이 다 되었다. 나는 성과가 있었는가?
처음부터 성과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몸 길들이기를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매일 한시간씩 의무적으로 앉아 있다 보니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 그것은 통증을 본 것이다.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평좌한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도중에 포기하기도 했고 도중에 자세를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적응 되었다.
어느 날 통증과 맞짱떴다. 통증과 싸워서 이겨보고자 한 것이다. 몇 번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통증을 이겨냈다. 통증 따로, 마음 따로로 본 것이 주효했다.
통증은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괴로운 느낌이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분리해서 보고자 했다. 통증을 따로 새기고, 이를 아는 마음도 따로 새기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따로 따로 새기다 보니 통증은 통증이고, 아는 마음은 아는 마음이 되었다. 정신과 물질을 따로 따로 본 것이다.
통증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면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래서 “아파 죽겠네.”라고 말한다. 그러나 통증을 남의 다리 보듯이 관찰하면 통증이 마음으로 까지 전이 되지 않는다. 발이 아픈 것과 이를 지켜 보는 마음은 별개가 된다. 마치 제3자가 관찰하듯이 지켜 보는 것이다.
통증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어떤 통증이든지 오면 반갑다. 마치 손님처럼 맞이 하는 것이다.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좋은 찬스가 된다.
질의응답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수행자가 두려움에 대하여 말했다. 사업에서 두려움을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개념으로 본다고 했다.
두려움은 왜 일어날까? 아마 그것은 내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실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님에 따르면 실재를 보는데도 두려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두려움의 지혜가 있다. 4단계 ‘생멸의 지혜’와 5단계 ‘무너짐의 지혜’에 이어 일어나는 6단계 지혜를 말한다. 실재를 보았을 때 두려움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마 6단계 ‘공포의 지혜(bhaya ñāna)’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스님은 해법을 제시했다. 빠르게 변하는 것을 받아 들이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아마 생멸의 지혜 다음에 이어지는 무너짐의 지혜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서는 “평온하게 대상을 관찰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번 법회 법문은 수행점검 위주로 진행되었다. 그런 한편 당부의 말도 있었다. 스님은 “이번 안거에서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탐, 진, 치가 일어납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스님에게 크게 의지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법문을 들으러 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의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스님에게 의지하려는 것도 ‘찬다’라고 했다.
빠알리어 찬다(chanda)는 열의, 욕구, 의지로 번역된다. 이 말의 주된 특성은 ‘하려는 바람’이다. 이러한 열의는 특정한 마음부수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찬다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4여의족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스님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럼에도 스님을 놓고 있지 않다면 이는 바른 찬다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스님은 “의존대상을 끊어야만 바른 찬다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빤냐와로 스님은 왜 바른 찬다를 말했을까? 그것은 이어지는 말로 알 수 있다. 수행자가 법이나 스님에게 의지하면 수행에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스님은 몸과 마음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흔히 자귀의와 법귀의를 말한다. 자신과 가르침을 섬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이는 자신과 법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과 같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이런 섬은 열반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빤냐와로 스님은 법과 스님에게 의지하면 수행의 진전이 없다고 했다. 왜 그럴까? 아마 그것은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자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는 빤냐와로 스님이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수행은 자신이 하는 것이다.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다. 병아리가 부화할 때 스스로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스승은 단지 지도만 해 줄 뿐이다. 그래서 빤냐와로 스님은 법과 스님에 대해서는 단지 수단으로만 삼으라고 했다.
무엇이든지 반복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불과 40분 정도 되는 질의응답과 법문에서 강조해서 반복한 것이 있다. 그것은 찬다가 까맛찬다(kāmacchanda)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찬다는 선법도 아니고 불선법도 아니다. 그러나 찬다가 불선법과 결합되면 불선한 것이 될 수 있다. 열의를 뜻하는 찬다가 감각적 욕망을 뜻하는 까마와 결합되었을 때 까맛찬다가 된다. 이는 ‘attachment to sensual pleasure’의 뜻이다. 감각적 욕망에 집착된 상태를 말한다.
까맛찬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서원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부처가 되기로 보살로 살기로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수행자는 11단계 상카루뻭카냐나 단계에서 진척이 되지 않는다. 형성평온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런 것도 괴로움 중의 하나라고 했다.
상카루뻭카냐나 단계에 이르면 도와 과는 머지 않았다. 그럼에도 머물러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까맛찬다로 설명했다. 전생에 부처가 되기로 보살이 되기로 서원했을 때 진척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보살로 살 때 부처가 되기로 서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와 과를 이루어 열반에 들지 않아야 한다. 11단계 상카루뻭카냐나 단계에서 머물며 세세세생생 윤회하며 바라밀 공덕을 쌓아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일체의 번뇌를 불사르고 참모임의 신참자로서 람마 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겉모습을 통해, 내가 번뇌를 불사르고 열반을 성취할 필요는 없다. 디빵까라 부처님처럼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의 배를 띄워 많은 사람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한 뒤, 나중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야겠다. 이것이 나에게 알맞은 것이다.”(자타카, 766쪽,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수메다 존자의 서원이다. 수메다 존자는 부처가 되기를 서원했다. 그래서 “내가 번뇌를 불사르고 열반을 성취할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범부로서는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지혜인 상카루뻭카냐나 단계에 머물겠다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가 11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을 때 서원을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원이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서원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나 서원을 할 수 있다. 부처나 보살이 되겠다고 큰 서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서원은 과도한 열의로 인한 것이다. 열의에 욕망과 갈애가 결합되면 까맛찬다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스님은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데도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빤냐와로 스님은 질의응답과 법문을 통해서 수많은 말을 했다. 그 중에 새기고 싶은 말도 많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찬다는 균형을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4여의족에서 바란스를 맞추어 주는 것이 찬다입니다.”
2) “열반을 바라는 사람은 무상, 고, 무아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3) “닙바나를 경험해야 도와 과의 맛을 느낍니다.”
4) “의존 대상을 끊어버려야만 바른 찬다가 됩니다.”
5) “법과 스님은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수행수단입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관찰해야 합니다.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끊임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6) “도와 과를 이루기 전에는 몸과 마음을 관찰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외 것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7) “가족을 의지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단지 행복하게 살기 위한 모임체입니다. 재산에 의지해서도 안됩니다. 재산은 힘들지 않게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8) “수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9) “사띠가 없으면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났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평온하기 바랍니다.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며 법문을 마쳤다.
질의응답은 점심 식사 후에도 이어졌다. 빤냐와로 스님과 떼짓사라 스님 두 분이 질의에 응답했다.
재가수행자들은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질의응답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오후 질의응답 시간에 나온 말은 오전과 비슷했다. 어떻게 하면 고요함과 평온함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수행이 고요함과 평온함에서 딱 멈추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고요함과 평온함을 즐기지 말라고 했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는 재빨리 주관찰 대상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엉덩이 등으로 대상을 늘리라고 했다. 그리고 경행을 하라고 했다.
재가안거 83일째이다.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지만 질문을 하지 않았다. 특별하게 체험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안거에서는 한시간 앉아있기가 본래 목표였다. 세 달 동안 몸만들기를 하고자 한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이 법문 서두에 주문한 것이 있다. 이번 안거에서 성과가 없었다면 다시 안거를 하라고 했다. 이 말에 자극 받았다. 안거가 끝나도 계속 한시간 좌선할 생각이다.
오늘 법회를 마치고 사무실로 귀환했다. 오늘 한시간 좌선을 못했기 때문에 오자마자 한시간 좌선에 들어갔다. 그러나 법문에서 들은 이야기 등이 떠올라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오늘 후기 쓰기 위하여 좌선한 것인지 모른다.
오늘 전철로 내려 오면서 노트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좌선시간에 법문 내용을 떠올렸다. 노트를 보고서 후기를 작성한 것이다. 가장 와 닿는 내용은 “수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라는 말이다. 도와 과를 이루는 그 순간까지 정신과 물질을 새기라는 말과 같다.
2023-10-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