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아파트 분리수거의 날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6. 09:53

아파트 분리수거의 날에
 
 
매주 월요일저녁과 화요일 오전은 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좁은 아파트에는 쓰레기로 가득하다. 어디서 이 많은 쓰레기가 나왔을까?
 
아파트 단지 면적은 얼마나 될까? 아마 가로가 120미터 세로가 70미터 가량 되는 것 같다. 이 좁은 면적에 다섯 개의 동이 있다. 한동은 25층에 달한다. 세대 수를 계산해 보니 무려 300세대이다. 마치 닭장을 연상케 한다.
 

 
비좁은 아파트에 밀집해서 살다 보니 쓰레기도 엄청나게 나온다. 쓰레기 버리는 날에 쓰레기를 보면 그야말로 산더미를 이룬다. 매주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가 넘으면 사람들은 하나 둘 쓰레기를 들고 나온다. 어떤 이는 자동차로 나른다. 어떤 이는 이마트 카트로 나른다.
 

 
쓰레기는 잘 구분되어 있다. 종이를 버리는 곳 따로, 플라스틱 따로. 비닐 따로, 철류 따로, 병류 따로로 구분되어 있다. 이른바 분리수거시스템이 잘 작동되는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척도는 분리수거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후진국일수록 생활쓰레기, 음식쓰레기, 캔, 병, 비닐, 플라스틱 등이 구분 없이 버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갈수록 철저하게 분리되어 되어 진다.
 

 
한국은 분리수거 선진국이나 다름 없다. 생활에서는 물론 모임에서도 분리수거가 이루어진다. 법회모임을 갖고 난 다음 먹은 도시락을 분리수거하는 것이다. 이런 분리수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도 볼 수 있고 공원에서도 볼 수 있다.
 
요즘 버리기운동을 하고 있다. 매일 조금씩 버리고 있다. 이는 처가 유튜브에서 아파트 풍수에 대한 것을 보고 난 후부터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옷가지를 비롯하여, 가구, 책 등 닥치는 대로 버리고 있다.
 

 
살림이 많지 않다. 아파트 평수가 소형이다 보니 쌓아 놓을 공간이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한번 버리기로 마음 먹자 버릴 것이 끊임 없이 나온다. 매일매일 버리기에 바빴다.
 
버리는 데는 돈이 들어간다. 의자 하나를 버려도 폐기물수거비로 2천원 주어야 한다. 나무로 된 장식장처럼 무게가 있는 것은 더 주어야 한다. 가전제품도 돈 주고 버려야 한다. 컴퓨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파트 경비원에 따르면 컴퓨터를 버리는데도 수거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사무소에 가져다 주면 무료로 수거해 간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주민센터에 본체와 모니터를 가져다 주었다. 컴퓨터를 포함한 가전제품은 동사무소에 가져다 주면 수거비를 주지 않아도 된다.
 

 
일주일이상 매일 버렸다. 아무리 많이 버려도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버림의 효과는 있다. 공간이 넓어진 것이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불필요한 것을 치워 버리니 마음도 깨끗해진 것 같았다. 마치 청소를 마쳤을 때 산뜻한 기분 같은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은 물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때도 버려야 한다. 머리맡에 있는 쌍윳따니까야를 보다가 새겨 둘만한 가르침을 발견했다.
 
 
존자들이여, 이와 같이 시각은 형상에 묶여 있지 않고 형상은 시각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욕망과 탐욕이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찟따장자가 수행승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것도 장로수행승들에게 말했다. 마치 대승경전 유마경에서 유마거사가 십대제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과 탐욕’에 대한 것이다. 진정으로 버려야 할 것은 욕망과 탐욕인 것이다.
 
찟따장자의 이야기를 보고서 혜능선사를 떠올렸다. 이는 ‘바람이 움직이냐 깃발이 움직이냐?’에 대한 것이다. 어쩌면 혜능선사의 풍동번동(風動幡動)에 대한 이야기는 찟따장자가 말한 것이 모티브가 된 것인지 모른다.
 
풍동번동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바람에 움직이는 깃발을 보고서 어느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분명히 깃발이 움직이지 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자 어느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다. 이 말도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렇게 다투고 있을 때 이를 한방에 제압한 인물이 있었다. 숨어 지내던 혜능선사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그대 스님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혜능선사는 마음이 움직인다고 말했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마치 허를 찔린 듯한 말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일체유심조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찟따장자는 “시각은 형상에 묶여 있지 않고 형상은 시각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욕망과 탐욕이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S41.1)라고 말했다.
 
대승경전에 실려 있는 상당수 대부분 이야기는 초기경전에서 발견된다. 금강경에 실려 있는 ‘뗏목의 비유’도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대승경전에서 회자되는 상당수 이야기는 초기경전을 모티브로 한다. 혜능선사의 풍동번동 역시 찟따장자의 이야기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혜능선사는 깃발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찟따존자가 말한 마음은 ‘욕망과 탐욕(chandarāga)’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이런 점이 다르다. 욕망과 탐욕이라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분명히 말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비유를 들면 명확하게 일 수 있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찬다라가(욕망과 탐욕)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대상이 잘못된 것인가? 이에 대하여 찟따장자는 검은소와 흰소의 비유를 들었다.
 
검은소와 흰소를 하나의 밧줄에 묶어 놓으면 서로 묶여 있는 것이다. 시각과 형상 역시 다르지 않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보기 때문에 서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형상을 보면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맨의식이라 볼 수 있는 눈의식은 과거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의식이 생겨난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고 싫은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한다. 이른바 탐욕과 성냄이 생겨나는 것이다.
 
대상은 형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다섯 가지 감역에서 의식이 생겨난다. 대상에 대하여 좋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이를 욕망과 탐욕에 묶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되지만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욕탐이 작용한 것이다.
 
혜능선사에 따르면 깃발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찟따장자식으로 해석하면 깃발은 욕망과 탐욕에 따른 것이다. 후자가 더 구체적이다. 어떤 행위이듣지 새김과 알아차림이 없으면 욕망과 탐욕에 이끌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혜능선사의 풍동번동 이야기는 찟짜장자가 말한 “시각은 형상에 묶여 있지 않고 형상은 시각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욕망과 탐욕이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S41.1)에 근거가 있다고 본다.
 
찬다라가는 마음의 때와 같은 것이다. 마음의 때는 버려야 한다. 마음의 때는 없애 버려야 한다. 물건만 버릴 것이 아니라 마음의 때도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버리고 없애야 할 마음의 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맛지마니까에 ‘버리고 없애는 삶에 대한 경’이 있다. 마치 오늘날 생활속에서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한 경처럼 보인다. 이는 “ ‘다른 사람들이 잔인하더라도 우리는 잔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M8)로 시작되는 44가지를 말한다.
 
버리고 없애는 삶은 열가지 불선법과 다섯 가지 장애 등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는 삶을 말한다. 이는 마음의 때와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악취나는 오물장 같은 불선법을 버리는 것이다. 그 중에 찬다라가, 즉 욕망과 탐욕이 가장 크다.
 
오래 전에 주식을 했었다. 그때 마음은 탐욕에 오염되어 있었다. 마치 도박장에서 돈 넣고 돈 먹기 하는 식 같았다. 오로지 이익과 손실만을 생각했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황폐화되었다. 마음 속에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쓰레기를 버리고 나면 후련하다. 버릴 때 쾌감이 있다. 아파트 쓰레기 버리는 날에 쓰레기를 투척하면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다.
 
작은 평수 아파트가 넓어 졌다. 일주일 이상 지속적으로 버린 결과에 따른 것이다. 입지 않은 옷은 과감하게 버렸다. 책도 버렸다. 한번도 떠들어 볼 일 없는 책도 종이류 버리는 곳에 투척했다.
 
집에 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때 벽면 가득 책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책상과 가구를 버릴 때 책도 내다 버렸다. 다만 한가지 버리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쓴 책이다.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올린다. 긴 글이다. 의미와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했기 때문에 글이 길다. 이런 글이 쌓이고 쌓여서 산을 이루었다. 이제는 책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책은 두 권 만든다. 한권은 사무실에 보관하고 또 한권은 집에 보관한다. 집에는 내가 만든 책 밖에 없다. 누군가 오면 보여 줄 것이다. 작은 평수 집에 보여 줄 것은 내가 쓴 120권의 책 밖에 없다.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미니멀라이프라 하여 물건만 버리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때도 버려야 한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니멀라이프의 실현일 것이다.
 
버리고 없애고 나면 텅 빌 것이다. 그런데 텅 비면 채워지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책을 버리고 났더니 책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내가 만든 책으로 방 한면을 장식했다.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악하고 불건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모으고 가지는 삶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덕이다. 구체적으로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미니멀라이프는 버리고 없애는 삶에 대한 것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법을 버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 착하고 건전한 법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이제 버렸으니 채워 넣어야 한다.
 
 
2024-02-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