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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건 말건 노랑 민들레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10. 09:22

누가 보건 말건 노랑 민들레

 

 

조용한 410일 아침이다. 오늘은 아마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위대한 민중혁명의 날로 기억될지 모른다. 오늘은 오만한 정권을 한표로 심판하는 날이다.

 

그들은 말 끝마다 범죄자라고 했다. 마치 이념전쟁시절 붉은 딱지를 붙이는 것과 같다.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른바 범죄자프레임이다.

 

힘을 가진 자는 힘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조폭의 주먹이 근질근질한 것과 같다. 기소권과 수사권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가지고 있는 집단은 갖가지 명목으로 옭아 매었다. 그리고 야당대표를 말끝마다범죄자라고 했다. 이에 평론가들도 따라서 범죄자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정의롭고 공정하기를 바란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억압하려 한다면 정의롭지 않고 불공정한 것이다. 오늘은 불의의 세력을 단죄하는 날이다.

 

오늘은 선거날이다. 오늘은 또한 휴일이다. 그러나 일인사업자에게 휴일은 없다. 오늘도 배낭을 메고 길로 나섰다. 목적지는 백권당이다.

 

늘 똑 같은 일상이다. 아침 일찍 일터에 와서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는 것이다. 벌써 18년 되었다.

 

 

글쓰기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에게 오대의무가 있다. 그것은 글쓰기, 좌선하기, 경전읽기, 책만들기, 빠알리어공부하기를 말한다. 이 중에서도 매일 빠짐 없이 하는 것은 글쓰기, 좌선하기, 경전읽기이다. 책만들기와 빠알리어공부하기는 틈틈히 한다.

 

무엇이든지 꾸준히 하면 효과가 있다. 글쓰기가 대표적이다. 2006년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써왔다. 주로 정신이 맑은 아침에 쓴다.

 

글은 쌓이고 쌓였다. 블로그에는 7,400개가량의 글이 있다. 일년은 365일이므로 에 365개 쓴다. 십년 쓰면 3,650개가 된다. 글을 18년 썼으니 7,400개가량 되는 것이다.

 

흔히 금자탑(金字塔)이라고 말한다. 금으로 된 글자의 탑을 말한다. 이는 대장경을 일컫는 말이다. 내가 써놓은 글도 금자탑이 될 수 있을까?

 

어느 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금자탑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블로그에 올려 놓은 글을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2018년 처음으로 책을 만들었다. 금요니까야모임 도현스님이 요청해서 만든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이 불편해서 프린트 해 달라고 해서 만든 것이다.

 

한번 시동 걸리면 앞으로 주욱 나아가게 되어 있다. 한번 책을 만들게 되자 연속으로 만들게 되었다.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만든 것이다.

 

책 만들기는 간단하다. 과거에 써 놓았던 글을 모아서 목차를 만들고 서문을 쓰면 되는 것이다.

 

한번 써 놓은 글은 버리지 않는다. 시간이 녹아 들어간 글이다. 생명과 같은 글이다.

 

마침내 금자탑이 되었다. 지금 책장에는 책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책이 백권 되었을 때 백권당(百卷堂)이라고 이름 붙였다. 정찬주 작가가 붙여준 이름이다.

 

금자탑은 대장경을 일컫는 말이다. 어찌 감히 금자탑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자가 어떻게 감히 스스로 금자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글은 어떤 경우에서 있어서라도 구업 짓는 것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언어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그것은 선업일 수도 있고 악업일 수도 있다. 선업이 되고 싶다.

 

글을 쓸 때는 늘 조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법사가 있다. 그 사람은 학자이다. 지금은 정년퇴임해서 명예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명함에 그렇게 써 있다. 그런데 그 교수는 명예를 중시하는 것 같다. 법회에서 사람이 없으면 법문할 맛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이는 단 한명만 있어도 법문하겠다고 말한다. 마치 수십명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법문하는 것이다. 사람이 없어서 맥 빠진다고 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법문과 관련하여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태국스님들은 한명만 있어도 여러명 있는 것처럼 법문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놀랍게도 천신이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사가 법문할 때 눈에 보이는 사람만 듣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도 듣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여기 모여든 모든 존재들은 지상에 있는 것이건 공중에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존재들은 행복하여지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이제 말씀을 들으십시오.”(Stn.222)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누군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보이지 않는 존재도 듣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없어서 법문 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법사의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을 쓸 때 늘 떠올리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나오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가르침을 설하라.”(S4.5)라는 말이다. 이 말을 그대로 글쓰기에 적용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하다.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당연히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 전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글을 쓰고자 한다. 또한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한다. 자연스럽게 전법하는 글쓰기가 되었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글쓰기는 200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글이라는 것을 써 본적이 없었다. 직장생활 할 때는 기안서나 보고서, 계획서 작성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인사업자가 되었을 때 시간이 남아 돌아서 쓰게 되었다.

 

글을 쓸 때는 함부로 쓰지 않았다. 누군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더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보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것을 생각해서 글다운 글을 쓰고자 했다.

 

글을 쓸 때는 책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썼다. 이런 이유로 글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서론, 본론, 결론이 있는 글을 쓰고자 했다. 점차 기, , , 결이 있는 글이 되었다.

 

꿈은 이루어졌다. 책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것은 책장에 꼽혀 있는 백권의 책으로 실현되었다.

 

현재 책장에는 121권의 책이 있다. 책은 계속 나온다. 판매용은 아니다. 인터넷 배포용이다. 피디에프(pdf)파일을 만들어 블로그에 올려 놓는 것이다. 누구든지 다운 받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책장에 있는 책은 보관용이다. 사무실에 한질 있고 집에 한질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금자탑이다. 마치 대장경을 보는 것처럼 진열해 놓은 것이다.

 

 

글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어제 쓴 글은 A411페이지가 되었다. 오전 8시 반부터 쓰기 시작하여 오후 2시 반에 끝났다. 점심시간 포함하여 무려 6시간 쓴 것이다.

 

한시간 글쓰기 하면 A4로 두 장 된다. 두 시간 글쓰기 하면 네 장이고, 세 시간 글쓰기 하면 여섯 장이 된다. 보통 A4로 네 장 내지 여섯 장 쓴다. 오전이 다 지나가는 것이다.

 

글이 긴 것에는 이유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경전을 인용했을 때는 더 길어진다. 더구나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하다 보니 길어진 것이다.

 

어제 글은 무척 길었다. 이는 진실선언에 대한 글로서 며칠 준비한 글이다. 자료조사를 하고 숙고를 해서 완성된 글이다. 주로 자타카를 인용했다.

 

함부로 글을 쓰지 않는다. 자랑하는 글이나 지적하는 글쓰기는 지양한다. 이는 블로그 글쓰기에서 유래한 것인지 모른다.

 

글을 쓰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려 놓는다. 2017년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2017년 이전에는 블로그에만 글을 올렸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은 환경이 다르다. 블로그는 한적한 암자와도 같고 페이스북은북적거리는 시장과도 같다. 이렇게 환경이 다른 결정적 이유는 실시간 소통에 있다.

 

블로그는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분야에 대하여 차분한 글쓰기가 요청된다. 이렇게 본다면 블로그는 전문가 영역이다. 반면에 실시간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페이스북에서 긴 글은 환영 받지 못한다. 글이 길어지면 패싱당한다.

 

블로거의 글은 페이스북에서 맞지 않는다. 전문가영역에서 글쓰기를 페이스북에 적용했을 때 긴 길이의 글을 볼 인내심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일까 어제 페이스북친구는 좋은 말씀을 하시고 전해주시는데도 눈이 피곤해져서 다 읽지를 못함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라고 써 놓았다. 이에 글이 길어 죄송합니다.”라고 답글을 달았다.

 

사람들은 긴 글을 보지 않는다. 긴 글을 쓰면 패싱당한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올린다. 올리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스마트폰 작은 글씨를 보느라 눈이 아플 것이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다. 무엇보다 시간 빼앗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다.

 

어떤 스님은 페이스북에서 배운다고 한다. 심산유곡에 살고 있는 스님은 페이스북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에서도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페이스북은 또 하나의 삶의 현장이다.

 

페이스북에는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올린 콘텐츠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나 다름 없다. 또한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다름 없다. 그 사람이 올려 놓은 글이나 사진, 영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다양하다. 대부분 자랑하는 글이 많다. 지적하는 글도 많다. 그러나 성찰하는 글은 드물다. 더구나 긴 글은 더욱더 드물다.

 

페이스북에는 다양한 글이 있다. 긴 글도 다양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본다면 긴 글 쓰는 사람 하나 정도 있어도 될 것 같다.

 

글을 쓴지 18년 되었다. 쌓이고 쌓인 글은 이제 책장 가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명사가 된 것은 아니다. 누구도 찾아 오지 않고 어느 매체에서도 인터뷰요청도 없다.

 

글을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흔적을 남겨서 알고 있다. 글이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꾸준히 좋아요공감 이모티콘을 눌러 준다.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이 공감해 주었을 때는 인정받는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 패싱하는 것 같다. 특히 지식인은 애써 무시하는 것 같다.

 

 

며칠전 건물 한켠에서 민들레를 발견했다. 노랑색깔의 민들레가 화강함 계단 모서리에 피어 있었다. 이것은 기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노오란 꽃을 피워냈을까? 나흘전 방생법회를 갔었다. 그때 금강 갯벌 너른 초원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노랑 민들레가 여기저기 피어 있다. 흙이 조금만 묻어 있어도 씨가 날아와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낸다. 저 들판에 있는 야생화는 누가 보건 말건 피고 진다.

 

블로거는 오늘도 글을 쓴다. 쓰다 보니 또 긴 글이 되었다. 시간 없는 사람은 패싱할 것이다. 감각적인 것을 즐기는 사람 역시 패싱할 것이다. 그럼에도 눈길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꽃은 누군가 보아 주었을 때 존재감이 있다. 마치 기적처럼 피어 있는 노랑민들레 역시 보아 주었을 때 존재감이 있다. 이름 없는 블로거의 글 역시 누군가 보아 주었을 때 존재감이 있다. 그러나 저 들판의 야생화처럼 누가 보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2024-04-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