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을 지적해 주는 이에게 감사하자
동네가 조용하다.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세상이 평화롭다. 페이스북에서 두 명을 차단시켰다.
오늘날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본래 친구나 아는 사람 위주의 커뮤니티이지만 불특정 다수의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인간군상을 보게 된다.
스님은 늘 참견한다. 조금이라도 대승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토를 다는 것이다. 쓰는데 자기검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신대로 쓸 수가 없었다. 분명히 문제 삼을 것을 염려 하여 사전에 차단했다. 이것도 허물이 되는 것일까?
그는 마치 스토커같다.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서 말을 건다.
일주일전의 일이다. 글을 하나 올리고 납품 갔었다. 고속도로를 목숨을 걸고 달렸다. 그는 메신저에 왜 곧바로 답글을 달지 않느냐고 채근했다.
그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다. 얼굴을 숨기고 있다. 어떤 심벌을 얼굴을 대신하고 있다. 그는 학위가 높다. 프로필을 보면 피에치디(Ph.D) 타이틀을 올려 놓았다. 자칭타칭 불교학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왜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는 것일까?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다. 삼진아웃이라는 말도 있다. 세 번까지는 참는다. 네 번째 되었을 때는 인내에 한계를 느낀다. 지난번 고속도로 달릴 때도 그랬다. 고속도로에서 답신하기 힘들었다. 정체 되었을 때 간신히 ‘고속도로’라고 쓰고 “너무하네”라고 썼다.
메시지를 보내면 답을 해 주어야 한다. 문자를 보냈음에도 답신을 하지 않는다면 요즘 말로 “문자를 씹는다.”라고 말한다. 또한 ‘읽씹’이라 하여 “읽고 씹는다.”라고 말한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 놓고 곧바로 답신을 달라고 채근 했을 때 스토킹당하는 것 같았다. 네 번째 채근 당했을 때 차단했다. 이런 것도 허물일까?
피함에 의해서 끊는 번뇌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 부처님은 번뇌의 대상에 대하여 피하라고 했다. 어떤 가르침인가? 맛지마니까야 2번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 말뚝, 가시덤불, 갱도, 절벽, 웅덩이, 늪지를 피한다. 총명한 길벗은 앉기에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앉는 자, 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로 가는 자,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와 사귀는 자를 악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는 성찰하여 이와 같은 적당하지 않은 자리, 적당하지 않은 장소, 악한 친구를 피한다. 수행승들이여,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M2)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sabbāsavasutta)’(M2)에 실려 있다. 번뇌를 끊기 위한 일곱 가지 방법에 대한 대한 경이다.
사홍서원에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 있다. “끝이 없는 번뇌라도 기필코 다 끊겠습니다.”라며 큰 서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번뇌를 끊어야 할까? 맛지마니까야에서는 “1)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2)수호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3)수용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4)인내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5)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6)제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7)수행에 의해서 사라지는 번뇌가 있다.”(M2)라고 했다.
스토커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섯 번째 ‘피함에 의해서’ 번뇌를 끊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친구를 피하라고 했다.
저 사람 꼴보기 싫어서
불교에 입문하고 난 다음 듣던 이야기가 있다. 모임에서 어느 법우는 “저 사람 보기 싫어서 안나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지나친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갖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보기 싫은 사람도 있고 보기 좋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싫어서 모임에 나가기 싫은 반면에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나갈 수도 있다.
어떤 모임이든지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불화하기 위해서 모이지는 않는다. 모임은 기본적으로 화합을 바탕으로 한다. 더 좋은 것은 성장과 발전이 있는 모임이다. 그런 모임이 정진의 모임이다.
모임이 많은 것은 아니다. 2015년 이전에는 오로지 한 개의 모임만 있었다. 2004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했을 때 불교교양대학동기모임이 유일했다. 어떤 인연으로 2015년 재가불교단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현재 9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런 저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흔히 ‘오지랖 넓다’는 말을 한다. 이것 저것 참견하는 부정적인 말이다. 모임이 많은 것도 오지랖 넓은 것이 된다.
참여하고 있는 모임을 세어 보았다. 세어 보니 ‘능인불교교양대학37기모임’, ‘천장사모임’, ‘정의평화불교연대모임’, ‘전재성선생의 금요니까야모임’,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담마와나선원모임’, 그리고 최근에 가입한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모임’이 있다. 이밖에도 대학 ‘학과동기모임’도 있고, 미얀마 선원에서 함께 수행하던 ‘수행자모임’도 있다. 이런 모임에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어느 모임이든지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보기 싫다고 나가지 않는다면 나만 손해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적극적으로 피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 나오지 않는 날에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무시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나도 무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 최대 인정투쟁일지 모른다.
모임에 본받을 사람이 있어서
모임이라 하여 단지 모이는 것으로 그친다면 의미가 없다. 모여서 술이나 마신다면 발전이 없다.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투입해서 참여 했다면 이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임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이른바 정진의 모임을 말한다.
모임은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모임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진의 모임이 되기 위한 조건은 어떤 것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라고 한다.”(A3.93)
정진의 모임은 최상의 모임이 된다. 최상의 모임은 본 받을 사람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이 스승이 될 수도 있고 도반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A3.93)라고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한명은 본받을 사람이 있다고 했다. 모임에서도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다. 정진의 모임에서는 그 사람같이 되고자 할 것이다. 여러 개의 모임이 있는데 그 중에 정진의 모임은 몇 개나 될까?
자신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바꾸려 한다면
“안되면 되게 하라.” 이 말은 특전사 구호이다. 그렇다면 모임에서 보기 싫은 사람,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을 교화 시켜서 내사람으로 만들어야 할까?
매일 아침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좌선이 끝나면 글을 쓴다. 설령 망상으로 보냈을지라도 좌선하고 나면 머리가 개운하다. 머리를 비워낸 상태에서 글을 쓰면 진실에 가깝기 쉽다. 이렇게 노력하는 것도 나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나를 얼마나 알까? 나 자신의 문제를 안다면 나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하던 방식대로 살아간다. 관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업대로 사는 것이다. 하물며 남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자신을 변화시키기 힘들다. 자신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바꾸려 한다면 반발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차라리 피하는 것이 낫다. 그 자리를 피함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얼굴에 검댕이가 묻은 것을 모르고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는다. 머리맡에 경전을 놓고 매일 읽는 것도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을 해설해 놓은 책도 읽는다. 이른바 논서나 주석을 말한다. 그 중에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도 있다.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꼭 새기고 싶은 내용이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축제나 대중회의에 갈 사람의 얼굴에 검은 자국이 있다고 합시다. 가까운 이가 얼굴에 검은 자국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면 기쁘게 받아 들이고 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 준 이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사실을 말해 줄 이가 없어 검은 자국을 묻힌 채 사람들 앞에 가게 되면 창피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허물을 다른 이가 말해 주면 기쁘게 받아들이고 고마워해야 합니다.”(담마짝까법문, 171쪽)
이 말은 자자(自恣: pavāraṇā)에 대한 것이다. 우안거가 끝난 다음에 대중이 함께 모여서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은 모를 수 있다. 남에게는 잘 보이는 것이다. 이런 때 말해 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치 얼굴에 검댕이가 묻은 채 밖에 나가는 것과 같다.
승가에 자자에 포살이 있다. 자자와 포살이 없는 승가는 승가라고 할 수 없다. 하나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스님들 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승가가 청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여 살아야 할 것이다. 독각승승처럼 홀로 산다면 청정해질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자신의 허물을 자신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제달의 보름날에 승가 5명이 있으면 승가에 청하고, 5명이 없으면 서로 청하도록 부처님께서 계목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담마짝까법문, 171쪽)라고 했다.
포살은 보름마다 계목을 합송하는 날이다. 보름마다 계행을 점검하는 날이기도 하다. 자자는 안거가 끝났을 때 허물을 알려 주는 날이다. 자신은 몰라도 남은 알 수 있는 것이 허물이다.
자자를 하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다른 사람은 알고 스스로는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허물이 있으면 다른 스님들이 지적해서 그 허물에 대하여 참회하면 된다. 이는 출죄(出罪)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자자를 행함으로써 승가는 청정해진다.
증상계학(增上戒學) 네 가지
자자는 반드시 승가에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 모임에서도 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모임이 있지만 아직까지 자자를 한 것을 보지 못했다.
부처님도 허물이 있을까? 쌍윳따니까야 ‘빠라와나경’(S8.7)을 보면 보름날 밤의 자자에 대한 장면이 있다. 부처님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자 수행승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마음 편히 말하라. 그대들이 볼 때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할 것이 있는가?”라며 물어 보았다.
부처님에게 허물이 있을 수 없다. 깨달은 자의 계행은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볼 때, 세존께서는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아무것도 비난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S8.7)라고 말했다. 자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행이 청정해야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배움의 경’(A3.88)에 따르면 증상계학(增上戒學) 에 대한 것이 있다. 어떤 가르침일까? 부처님은 증상계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고,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지켜야 할 학습계율을 수용하며 배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학습계율이라 한다.”(A3.88)
증상계학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이는 1)의무계율을 수호하는 것(pātimokkhasaṃvarasaṃvuto), 2)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는 것(viharati ācāragocarasampanno), 3)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는 것(anumattesu vajjesu bhayadassāvī), 4)지켜야 할 학습계율을 수용하며 배우는 것(samādāya sikkhati sikkhāpadesu)을 말한다. 이러한 학습계율은 오점이 없는 것이다.
계율에는 오점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담마다사(dhammadasa), 즉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계행도 청정해야 한다. 어떻게 청정한 계행인가? 이는 “그는 파괴되지 않고 균열되지 않고 잡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현자가 칭찬하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는 계행을 갖춘다.”(S55.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님
옷에 얼룩이 묻으면 닦아 내고자 한다. 계행에서 허물이 발견되면 닦아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모르고 남은 알 수 있다. 이런 때 옆 사람이 허물을 알려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마치 얼굴에 검댕이가 묻은 채로 거리에 나가는 것과 같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
이러한 현자와 교류하라.
그러한 사람과 교류하면,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없으리.(Dhp.76)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왜 그런가?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다. ‘나는 이러한 그의 부당함과 실책에 대하여 승가 안에서 그에게 모욕을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남의 잘못만을 찾는 자와 모든 잘못을 관찰하여 이해되지 않은 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덕성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사람의 잘못을 그만두게 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 자가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 사람이 해당한다. 욕하고 때리더라도, ‘이것을 가져라.’라고 보물을 보여 주면, 가난한 자가 화를 내지 않고 기뻐하듯, 사람은 자기의 부당함과 실책을 보고, 누군가가 지적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사람은 이와 같이 ‘그대가 아사리나 친교사의 입장에서 내게 행하고 훈계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거듭 그렇게 하길 부탁한다.’라고 그를 초대해야 한다.”(Dhp.A.II.107)
잘못을 지적하는데 두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부류는 망신을 주기 위한 것이고, 또 한부류는 충고를 하기 위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 가난한 자가 보물을 보듯이 받으라고 했다.
글을 쓰다 보면 오자와 탈자가 발생하는데
글을 쓰다 보면 오자와 탈자가 발생한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것도 발생된다. 심지어 반대로 표현한 것도 있다. 이런 것은 독자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리고 난 다음에 반드시 교정에 들어간다. 한번 더 읽어 보는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소제목을 다는 등 한번 읽어 보았지만 그래도 빠져 나가는 것이 있다. 이런 때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난 다음 다시 읽어 보아서 오류가 발생되면 바로 잡는다.
글에 오류가 발견되면 오점이 생긴 것과 같다. 옷에 더러운 것이 묻은 것과 같다. 더러움이 있는 채로 살 수 없다. 십년전에 쓴 글이라도 오류가 발견되면 수정에 들어간다. 계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계행은 오염되기 쉽다. 누군가 알려 주지 않으면 오물이 묻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같다. 얼굴에 검댕이 묻은 채로 사람 앞에 서는 것과 같다. 이런 때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고마울까?
허물을 지적해 주는 이에게 감사하자
최근 페이스북에서 두 사람을 잘랐다. 스님 한분과 최고의 학위를 가진 자를 차단 시킨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동네가 조용한 것 같다. 이를 피함으로 번뇌를 차단하는 것과 같다. 그런 한편 나의 허물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아니 허물이 있어도 내버려 두기 때문일 것이다. 허물을 지적하는 순간 멀어질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허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허물은 잘 보인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모임에서나 허물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성장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적해 주어야 할 것이다.
“훈계하고 가르쳐야 한다.
거친 행동을 막아야 한다.
참사람이 아닌 자에게 그는 사랑스럽지 않지만,
참사람에게는 그가 사랑스럽다.”(Dhp.77)
여러 모로 부족한 사람이다. 모임에서 어떤 이가 훈계를 했다. 이에 몹시 마음 상한 적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망신 시킨 것 같아서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이후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피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 보기 싫어서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임에는 반드시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 지적을 받으면 수용한다. 그래서 “참사람이 아닌 자에게 그는 사랑스럽지 않지만, 참사람에게는 그가 사랑스럽다.”(Dhp.77)라고 했을 것이다.
허물은 참사람이 지적해준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자자에서“스스로 알지 못하는 허물을 다른 이가 말해 주면 기쁘게 받아들이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깨끗하게 출죄해야 합니다.”(171쪽)라고 말했다.
재가에 살지만 출세간을 지향한다. 허물이 있을 때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고마워해 해야 한다. 마치 글에서 오류를 발견하여 알려 주는 것처럼 반갑게 맞이 해야 한다. 마치 얼굴에 검댕이가 묻은 것을 알려 주는 것처럼 감사해야 한다. 나의 허물을 지적해 주는 이에게 감사하자.
2024-08-07
담마다사 이병욱
'마하시사야도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끊임 없이 흐르는 명색(名色)의 강 (1) | 2024.10.23 |
---|---|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3) | 2024.10.10 |
담마와나선원 가는 날에 (9) | 2024.08.04 |
저열한 구함과 고귀한 구함, 담마짝까법문 읽기 시동을 걸고 (7) | 2024.07.27 |
윤회의 방랑자가 되지 않으리, 아리야와사법문 완독 (9) | 2024.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