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두를 향상으로 이끄는 초인의 힘과 의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2. 15:24


모두를 향상으로 이끄는 초인의 힘과 의지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

 

맛지마니까야에 모든 번뇌의 경(M2)’이 있다. 번뇌를 피하기 위한 일곱 가지 방법이 제시 되어 있다. 그 중에 피함으로 번뇌를 끊는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예가 있다.

 

언젠가 어느 법우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다. 절에서 봉사활동을 하는데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괴로웠다고 한다. 참고 지내자니 불선심만 일어 나서 고민하던 중에 맛지마니까야 한구절이 떠 올랐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피함으로써 끊어지는 번뇌라는 것이다. 법우님은 봉사요일을 바꿈으로써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다. 아마 이것이 피함으로 끊어지는 번뇌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흔히 듣는 말 중에 저 사람이 있어서 절에 가지 않아요라는 말이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절로 옮겼는데 또 다시 그 사람을 보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다시 다른 절을 찾아 가야 할까? 어느 곳에서든지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그럴 때 마다 절을 옮겨 다닌다고 문제가 해결 될까?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말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나와 동등하고나 나와 나은 자를 사귀라고 하였다. 그런 자가 없으면 차라리 홀로 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래서 훌륭하거나 비슷한 친구를 사귀되, 이런 벗을 만나지 못하면 허물 없음을 즐기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47) 라든가,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61) 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와 보기 싫은 자는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모두 기피대상이다. 이런 자들이 보기 싫다고 하여 절을 떠난다면 자신만 손해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피하면 된다. 마치 삼십육계에서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여의치 않으면 피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피함으로 끊는 번뇌이다. 그래서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그리고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앉고, 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로 가고,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와 사귀면 현명한 동료 수행자들이 나쁜 경우에 해당하거나 악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성찰하여 그러한 적당하지 않은 자리, 그러한 적당하지 않은 장소, 그러한 악한 친구를 피한다.수행승들이여,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M2)

 

 

피함으로 끊는 번뇌에 대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장소와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모임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저열한 자라도 수승한자와 함께 있으면 성장하게 되어 있다. 다만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를 사귀지 않고 그가 있는 장소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다.

 

탁월한 자들과 함께 있으면

 

동등한 자나 탁월한 자와 함께 있으면 성장이 기대된다. 이는 “메기야여, 여기 수행승이 선한 벗, 선한 친구, 선한 동료와 사귄다. 메기야여, 마음에 의한 해탈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이 첫번째 원리가 성숙에 도움이 된다. (A9.3) 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향상을 이끈다는 말이다. 수행승들이여,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성실하고, 공경받을 만하고, 가르침을 주고, 충고를 받아 들이고, 심오한 대화를 이끌고,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몰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이라면, 거절하더라도, 도반으로 삼고, 사귀고, 섬겨야 한다.” (A7.37)라는 가르침도 있다. 좋은 친구가 있다면 그가 거절해도 쫓아 다닐 것을 말한다.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백승영교수의 니체강연에서

 

탁월한 자들과 함께 있으면 성장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니체의 사상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튜브에서 백승영 교수의 강연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인문학 강좌 [지혜의 향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백승영 교수)가 그것이다. 백승영 교수는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 : 초인)’를 설명하면서 힘의 의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힘의 의지들은 항상 힘상승과 지배와 강화를 추구하는 의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힘이 세져 가지고 다른 힘의 의지들을 누르려고 해요. 지배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그럴 려면 힘겨루기 관계가 형성 되어야 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누르고 지배하려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힘의 의지 A와 나머지 전체와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힘의 의지 A가 더 힘을 가지고 노력하는 경향성은 다른 힘의 의지들에 비례해서 올라 간다는 거에요. 마치 이런 거죠. 경쟁자가 훌륭하면 나를 발전시키려 하는 욕구가 더 커지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의 향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백승영 교수))

 

 

Übermensch

 

 

니체가 말한 초인의 힘의 의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떠 올리게 한다. 나와 동등하거나 우월한 자를 사귀었을 때 향상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는 최상의 모임으로 달성된다.

 

니체사상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부처님이 말씀 하신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일까? 앙굿따라니까야 모임의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수행승들이여이것을 최상의 모임이 한다.

 

(parisāsutta모임의 경앙굿따라니까야 A3.9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장로수행승이 열심히 정진하였을 때 모든 수행승들이 따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 니체의 힘의 의지를 보는 것 같다. 어느 힘의 의지가 다른 힘의 의지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힘겨루기이다. 이런 힘겨루기에 의해서 상호간 힘이 커지게 될 때 모두를 향상으로 이끔을 말한다.

 

적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 될 것이다

 

백승영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힘겨루기가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 주고 고무시켜 주는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힘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 하였다. 여기서 힘 대신에 정진 등의 불교용어를 대입하면 향상을 위한 수행공동체의 관계가 훌륭하게 설명된다. 니체의 위버멘쉬에 대하여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적을 갖되,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

경멸스런 적은 갖지 말도록 하라.

너희들은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적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싸움과 전사에 대하여)

 

 

니체는 경멸스런 적을 갖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내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stn259) 에서와 같이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부처님 가르침과 유사하다. 그래서 니체는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진짜 적은 나를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적을 가졌을 때 힘의 의지가 생겨나서 나를 강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적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 될 것이다라 한 것이다. 진정한 적은 진정한 벗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상입(相入)운동에 대하여

 

그런데 힘의 의지 운동양태에서 특이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힘의 의지 A의 상승운동과 나머지 힘의 의지 상승운동이 시간적 선후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A가 촉발해서 B를 움직이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과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운동의 법칙은 인과율에 지배를 받는다. 원인은 결과에 시간상으로 선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니체의 힘의 의지는 인과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백승영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힘의 의지 A와 다른 힘의 의지들과의 긴장관계는 시간의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요. A가 움직이면 나머지도 같이 움직여 줘야 해요. 그래서 동시적인 운동을 해요. 쌍방향적으로 운동을 합니다.”

 

([지혜의 향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백승영 교수))

 

 

니체의 힘의 의지는 물리법칙과는 무관한 것이다. 힘의 의지를 추구하면 할수록 주변에 영향을 주어 동시에 힘을 촉발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에 대하여 니체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이론은 양자역학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의 의지에 따른 힘싸움(긴장)은 동시성이고 쌍방향성이다. 이런 관계에서 작용과 반작용, 능동과 수동, 내적관계와 외적관계와 같은 이원론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운동에 대하여 백승영 교수는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내부로 침투해 들어 가면서 서로 얽혀서 발생하는 운동, 일종의 상입(相入)운동이다라고 표현을 해요.”라 하였다.

 

백승영 교수는 상입운동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니체의 독창적 아이디어라 하였다. 기존으의 인과적프레임을 벗어던지면서 이제까지 설명이 안되었던 운동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힘에 의지로 세계를 설명하면 이런 결론이 나와요. 나는 관계존재, 세계도 관계존재, 나홀로 존립할 수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내 외부가 없으면 나도 없고 내가 없으면 외부도 없다.”라 하였다. 이런 상입운동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힘싸움의 함의


-관계로서의 나와 세계

-A B의 긴장 = 창조적 힘

-A의 상승운동과 B의 상승운동의 win-win관계


상대존재에 대한 인정

존재전체에 대한 인정

 

 

요약을 보면 힘에 의해 지배하려 하지만 완전한 멸절의 관계는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긴장시켜 오히려 더 상승하게 만드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 창조적 힘으로 만드는 긴장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모두 승리자가 된다. 그래서 ‘win-win관계라 하였다.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와 힘의 의지에 대한 동영상 강연을 보면서 내내 불교를 떠 올렸다. 니체의 독창적 아이디어라고 하지만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연기법으로도 설명된다. 특히 상입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iti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라는 부처님의 연기법이다. 이와 같은 연기법의 특징은 상호의존적이고 조건발생적이다.

 

불교에서 연기는 관계성이고, 그것도 상호의존적 관계성이다. 특히 법계연기에 대하여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서로 얽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버스웰 교수는 BTN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그믈을 형성하며, 그 그믈 안에서 각 부분들은 모두 연결되어 거대하고 완전한 전체, 일체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의 근간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된 상입, 혹은 완전한 융합, 즉 원융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근본개념은 이 상호관계가 개별성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상호 작용을 통해 정해진다고 합니다그래서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지는 상호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산물로 보는 것입니다.”

 

(로버트 버스웰교수,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원효의 화쟁사상,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8)

 

 

버스웰 교수가 설명한 법계연기를 보면 니체가 한 말과 매우 유사하다. 니체가 힘의 의지를 설명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내부로 침투해 들어 가면서 서로 얽혀서 발생하는 운동, 일종의 상입운동이다.”라 하였는데 이는 불교에서 오래 전에 설명 된 것이다. 법계연기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상호 작용을 통해 정해진다고 한다그래서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지는 상호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산물이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니체의 위버멘쉬에 의한 힘의 의지는 독창적 이론이 아니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니체사상

 

니체가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간한 때가 1883년 에서부터 1885년이라 되어 있다. 니체철학을 보면 불교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 니체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까? 아마 받았을 것이라 본다. 그때 당시 서양지성들은 동양철학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특히 불교가 서양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빠알리니까야가 서양에 전해진 시기와도 일치 한다.

 

서양에서 학자들이 빠알리경전을 연구하기 시작하던 때가 1800년이라 하였다. 1826년 크리스찬 라쎈에 의하여 빠알리어에 대한 평론이 발표 되었고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1855년에는 덴마크 학자 빈센트 하우스뵐이 법구경을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1869년 법구경이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1881년 리즈 데이비스는 빠알리성전협회(PTS)를 창립하여 본격적으로 번역에 착수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독일에서 독일지성들이 불교적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이는 이진우교수가 EBS 인문학 강좌에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니체가 직접적으로 동양사상 불교 힌두교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니체가 문헌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본대학에서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겼을 때 거리를 걸어 가다가 도서관에 들어 갔는데, 우연히 쇼펜하우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면서 ‘철학적 해방감을 느꼈다’이렇게 표현 하거든요.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뿐만 아니라 니체가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유럽의 지성인들이 사상가들이 동양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집니다.”

 

(EBS 인문학 특강 월- 24:10 ~ 25:00,  이진우 교수의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 5)

 

 

이진우교수에 따르면 니체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 없다. 니체 당시 유럽의 지성들은 불교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의 힘의 의지에 대한 강좌를 들었을 때 니체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님을 알았다. 이미 불교에 있었던 사상인 것이다. 불교의 연기법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설명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가 불교경전을 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상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동시에 향상으로 이끄는 수행자의 힘

 

니체의 힘의 의지에 대한 설명에서 상입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떠 올렸다. 한 가지 더 떠 올린 것은 향상에 대한 것이다. 이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함께 수행하였을 때 향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모임의 경에서 장로수행승이 열심히 정진하였을 때 다른 수행승들에게 자극을 주어 따라 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실현 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A3.93) 이라 하였다.

 

여기서 니체의 대신 정진을 집어 넣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상호의존적 연기로 훌륭하게 설명된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하는 것이다. 나와 동등하거나 나은 자를 사귀면 향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깟싸빠곳따여, 배움을 열망하고, 배움의 수용을 칭찬하는 장로수행승이 배움을 열망하지 않는 다른 수행승에게 배움을 권유하고, 배움을 열망하는 다른 수행승에 대한 칭찬을 진실하게 때 맞춰 한다면, 깟싸빠곳따여, 이와 같은 장로수행승을 나는 칭찬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스승이 그를 칭찬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와 사귀려 들 것이다. 그를 사귀면 그를 모방할 것이다. 그를 모방하면, 그들에게 오랜 세월 유익과 행복이 초래될 것이다. (A3.90)

 

 

부처님은 칭찬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수행공동체에서 열심히 정진하는수행승을 칭찬하였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까? 어리석은 자라면 시기와 질투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 수행자들은 칭찬받은 자를 따라 하려 할 것이다. 이는 나도 저와 같이라며 분발요인이 된다. 그래서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A3.93)라 하였다.

 

열심히 노력하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의 구성원이 향상되게 된다. 한사람의 힘의 의지에 따라 모두를 향상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말한 힘의 의지 A와 다른 힘의 의지들과의 긴장관계는 시간의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라는 말과 일치 한다. 이는 잘하는 한사람이 있을 때 그를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정진에 열중할 때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동시에 향상으로 이끈다.

 

저열한 자에 대하여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나와 같거나 나은 자를 사귀어여야 한다. 그래야 향상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나보다 못한 자를 배척하라는 말은 아니다. 어리석은 자를 멀리 하라는 말이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있으면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또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일단 피하고 볼 일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하는 법우님도 있었다.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피함으로 인해 끊는 번뇌에대하여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차별 없이 제도한 가르침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포기 하지 말고 구제 하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강조하였다. 이에 공감한다. 그렇다고 하여 쫓아다니며 제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초기경전에 답이 있다.

 

부처님은 앙굿따라니까야 사귀어야할 사람의 경에서 사귀지 말아야 하고 친하지 말아야 하고 섬기지 말아야 할 세 사람이 있다.”(A3.26) 라고 하였다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수행승들이여, 사귀지 말아야 하고 친하지 말아야 하고 섬기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계행과 삼매와 지혜가 우리보다 저열한데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애를 베풀고 연민을 베풀 뿐, 사귀지 말아야 하고 친하지 말아야 하고 섬기지 말아야 한다.” (A3.26)

 

 

부처님은 자신 보다 못한 저열한 사람을 사귀지 말아야 함을 말씀 하셨다. 이런 말을 누군가 들으면 차별 없이 자비를 베푸는 대승보살정신에 어긋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비의 눈으로 지켜 볼 일이다. 그래서 자애를 베풀고 연민을 베풀 뿐이라 하였다. 이는 상대방에게 행복하기를하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고, 또 상대방에게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저열한 자에 대하여 자애와 연민을 베풀 뿐 사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탁월한 자를 사귀어야 하는 이유

 

자신과 동등하거나 나은 자를 사귀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나보다 나은 자를 사귀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존경하고 존중하며 사귀어야 하고 친해야 하고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계행과 삼매와 지혜가 우리보다 수승한데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존중하며 사귀어야 하고 친해야 하고 섬겨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원만하지 않은 계행의 다발을 원만하게 할 것이고 원만한 계행의 다발을 그때그때 지혜로써 수호할 수 있으며, 원만하지 않은 삼매의 다발을 원만하게 할 것이고 원만한 삼매의 다발을 그때그때 지혜로써 수호할 수 있으며, 원만하지 않은 지혜의 다발을 원만하게 할 것이고 원만한 지혜의 다발을 그때그때 지혜로써 수호할 수 있다.’라는 것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존중하며 사귀어야 하고 친해야 하고 섬겨야 한다.” (A3.26)

 

 

이것이 탁월한 자, 수승한 자를 사귀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계행과 삼매와 지혜가 탁월한 자이다. 이런 자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섬겼을 때 나도 그 사람 같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느는 것은 글 밖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일과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이른 아침 일터에 나와 글쓰기에 몰두 하다 보면 점심먹을 시간이다. 이렇게 매일 그것도 십년 가까이 지속하다 보니 느는 것은 글 밖에 없다.

 

글쓰기를 하면서 특별하게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가르침이 좋아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생각을 펼쳐 나간다. 이렇게 늘어나는 것은 글 밖에 없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이렇게 글쓰기 하는 것도 일종의 권력의지일 것이다.

 

글쓰기가 권력의지라 하여 남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인터넷상에서 누구나 접속하면 볼 수 있는 것이 글이기 때문에 보고 보지 않고는 자유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종종 댓글을 받는다. 어느 법우님이 꽃님의 글을 읽고 많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1분만에 읽어내려간다 하나 어떤 부분에는 멈추고 연꽃님의 글을 기록하기도하며 꽤 오래 새겨 읽는 독자들도 많다고 봅니다. 좋은 글로 많은 이들의 눈을 밝게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라는 글을 보내 왔다. 또 어느 법우님은  .. 전 이 블로그를 항상 절을 찾는 마음으로 들러서 글을 읽습니다. 마음아픔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더 깊은 불심으로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신재가 심출가자가 되기 위해 더 정진하려 합니다 매일 들려 좋은 말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 하였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법우님들로 받은 댓글이다. 이런 글을 받을 때 마다 힘이 작용했음을 느끼게 된다.

 

초인이 공동체에 있을 때

 

여기 열심히 정진하는 수행자가 있다. 더구나 공동체에서 칭찬을 받으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 힘이 생겨난다. 그런 힘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더구나 힘은 보통 힘이 아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초인적 힘을 발휘하였을 때 초인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초인이 공동체에 있을 때 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권력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수행의 힘, 즉 수행권력이 남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내에 초인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다. 모범이 되어서 본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깟사빠존자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깟사빠 존자는 두타제일로 알려져 있다. 숲속에서 살며 탁발에 의존하면 분소의로 살았다. 그런데 열 세 가지 두타행을 보면 눕지 않는 수행도 있다. 이른바 장좌불와를 말한다. 이런 두타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인적 의지를 가진 자만 가능하다.

 

부처님은 깟싸빠의 두타행에 대하여 칭찬하였다. 그래서 깟싸빠여, 훌륭하다. 깟싸빠여, 훌륭하다. 그대는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참으로 이와 같이 실천해왔다.”(S16.5) 라 칭찬하였다. 한 초인수행자의 힘이 모두를 향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귀감이 될 것이라 하였다.

 

모두를 향상으로 이끄는 초인의 힘과 의지

 

니체는 위버멘쉬(초인)에 의한 힘의 의지(권력)가 주변에 긴장관계를 조성한다고 하였다. 이런 긴장관계는 건전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모두를 향상(성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를 상입(相入)’이라 하였다. 그런데 독창적 이론이라는 니체의 초인사상은 부처님 가르침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으로 초인사상과 권력에 의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힘의 의지에 따른 긴장관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향상을 이끈다는 이론은 앙굿따라니까야 사귀어야할 사람의 경(A3.26)’ 등 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니체사상은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한국불교에 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것도 초인적 힘을 말한다. 그런 수행자의 힘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오력(五力)’을 들 수 있다. 수행자에게는 다섯 가지 힘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의 힘을 말한다. 이런 다섯 가지 힘은 마치 인드라신이 영역역 내에서 지배력을 행사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초인적인 힘이다.

 

수행자는 오력을 갖추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수행자의 힘은 주변을 변화시킨다. 어느 시대나 초인을 기다렸다. 분명한 사실은 수행자가 초인적 힘을 발휘하였을 때 모두를 향상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2015-11-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