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왜 꾸살라(kusala)행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6. 16:29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왜 꾸살라(kusala)행인가

 

 

강병균교수의 윤회관

 

강병균교수의 윤회관은 무엇일까? 불교닷컴 환망공상시리즈 74번째 이야기는 윤회이다. 이 윤회에 대하여 영원히 이어져야 하는 것은 중생의 행복이지 나의 존재가 아니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불자들이 알고 있는 윤회가 있다. 그것은 삼계육도윤회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그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철저하게 자신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따른 것이다그런데 수학자 강병균교수가 생각하는 윤회는 다르다.

 

강교수는 윤회 같은 것은 없다고 하였다. 있다면 이를 통속적인 윤회라 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정도로 보는 것이다. 또 윤회가 있다면 지금 이 생에서 겪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것이라 한다. 죽음이후는 생각지 말자는 것이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듯 아무도 죽음이후의 일을 알 수 없고 또한 태어남 이전의 일도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오로지 현세에서 행복하게 착하게 잘 살면된다고 말한다. 이런 말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강병균교수의 윤회론을 보면 그렇다.

 

강병균교수는 과학적 상식에 의거하여 새롭게 불교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과학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배척 된다. 설령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폐기의 대상이 된다. 그런 강교수의 윤회관은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이 출현한 것은 45억년도 안 되므로 지구상 윤회의 역사도 그 정도이다.”

 

(강병균교수, 윤회(輪回), 불교닷컴, 2015-11-16)

 

 

강교수가 생각하는 윤회관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 정도라 한다. 그런 지구의 역사는 어떤 것일까? 글에 따르면 진화초기의 생물인 단세포 생물, 다세포 생물, 삼엽충과, 지렁이, 굼벵이, 무당벌레 같은 벌레와, 송사리, 피라미, 붕어, 가물치, 모래무지, 메기, 뱀장어 등의 어류를 언급하면서 이들 생명체들이 전생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인간이 단세포에서부터 진화해 왔다면 인간의 전생은 지렁이, 굼벵이, ,붕어, 가물치 등이 될 것이다. 또 원숭이 종류도 될 수 있다. 불자들은 이런 윤회관을 받아 들여야 할까?

 

과학의 시대라 하지만 아직 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 진화론에 따르면 영장류가 원숭이류에서부터 진화해 왔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 진 것이 없다.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라 불리우는 크로마뇽인이 출현한 것은 불과 15만년전의 일이다. 하지만 이전 인류와의 연결고리가 없다. 그래서 미싱링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창조론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음에도 현생인류가 단세포에서 진화해 온 것이라 한다. 이런 과학적 상식을 바탕으로 하여 윤회의 역사가 지구의 역사와 같은 45억년 정도 된다고 한다. 과연 강병균교수의 윤회관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부처님은 윤회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S15.1)라 하였다. 부천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시작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강병균교수가 지구를 기반으로 한 윤회와는 다른 것이다.

 





samsara

 

 

부처님은 과거 무명에 의하여 내가 있게 되었고, 갈애를 원인으로 내생이 있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유전하고 윤회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강병균교수의 윤회론을 보면 지구의 역사에 한정 되어 있다. 이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또 물질적 기반에 따른 것이다.

 

물질을 기반으로 한 존재론은 필연적으로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몸이 물질로 이루어졌는데 이 몸이 파괴 되어 죽었을 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남는 것이 있다면 자식에게 유전형질을 물려 준 것과 이룩해 놓은 성과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강교수는 DNA가 유전한다고 한다. 또 사회적 유전자 밈이 있어서 이 유전한다고 한다. 이는 철저하게 물질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부처님은 물질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정신에 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정신에 대한 것은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오온 등의 근본 가르침은 물질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인식에 기반을 둔 정신적인 가르침들이다.

 

불교에서 절대선을 추구한다고?

 

윤회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윤회를 말씀 하시고 육도를 말씀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윤회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오온 등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그럼에도 강병균교수는 불교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절대적인 선이다.”라 하였다. 그냥 선도 아니고 절대적(absolute)’이라 하였다.

 

불교에서는 절대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양극단을 배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도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극단적 쾌락이나 극단적 고행을 배격하고 중도를 말씀 하셨다. 그 중도는 중간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닦는 목적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다.

 

절대(absolute)라는 말은 기독교 용어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에서는 진, , 미를 추구한다. 이는 그리스 이데아론에 영향 받은 것이다. 이데아론이 기독교와 접목되어 중세철학이 탄생하였다. 그래서 절대진, 절대선, 절대미를 추구하였다. 원본과 가까워 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선미가 있다면 절대적인 위악추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선을 추구한다면 절대악은 멸절 대상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교에서 절대선을 추구한다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강병균교수는 불교에 있지도 않은 절대선을 거론 하였다. 그러면서 인간이 지닌 본래 선한 모습의 발현이다라며 법구경 게송 하나를 소개 한다. 그는 경전에 근거하여 말하는 자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강교수가 인용한 게송은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이다. 이를 칠불통계라고 소개하며 착한 일은 뭐든지 행하고, 악한 일은 뭐든지 행하지 말며,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강병균교수가 법구경 183번 게송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선과 악이라는 쌍대성에서 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찾다 보니 법구경 칠불통계에서 착한 일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착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류 경제제도·정치제도 발전과 인권향상과 과학·문명 발달은, ‘윤회를 믿지 않거나, 믿어도 기억하지 못하는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시라. 그들은 그들의 마음의 화면에 자신들의 행이 사회와 인류에 가져올 복된 미래를 그렸기 때문이며, 자신들이 불교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칠불통계(七佛通戒)를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강병균교수, 윤회(輪回), 불교닷컴, 2015-11-16)

 

 

이 대목을 보면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단멸론자의 입장을 볼 수 있다. 이는 통속적인 윤회가 없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말은 현법열반론을 떠 올리게 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62가지 삿된 견해가 있다. 오로지 현생의 행복만을 바라며 사는 자들을 말한다. 내생과 윤회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이런 현법열반론의 특징은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아론에 입각하여 선정을 즐기는 자들 역시 현법열반론자들이라 본다.

 

현법열반에서 열반이라 하지만 가짜 열반을 말한다. 자아론에 입각하여 오욕락을 즐기거나 선정삼매를 즐기는 자들을 모두 현법열반론자들이라 한다. 그런데 강병균교수는 통속적인 윤회가 없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단멸론적 현법열반론임에 틀림 없다.

 

칠불통계에 대한 강교수의 해설을 보면 사실상 불교가 필요 없다. 게송에서처럼 착하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불교가 없는 지역에서도 착하게 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착하게 사는 자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불교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칠불통계(七佛通戒)를 실천했다라고 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 칠불통계게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요즘은 빠알리니까야의 시대

 

요즘은 빠알리니까야의 시대이다. 굳이 한문으로 된 게송이 아니어도 부처님 원음을 접할 수 있다. 칠불통계에 대한 빠알리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bbapāpassa akaraa,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      

eta Buddhāna' sāsana.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183, 전재성님역)

 

 

한문에서는 중선봉행(衆善奉行)이라 하여 선한 일은 뭐든지 행하고라 하였다. 이와 관련된 구절이 kusalassa upasampadā이다. 이는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라 번역되어 있다. 한문에서는 이라 한 것이 빠알리어로는 꾸살라(kusala)’이다. 여기서 꾸살라는 말은 단지 착함을 뜻하는 의 의미만 있을까?

 

한문게송에서 제악막작(諸惡莫作)이라 하여 악한 일은 뭐든지 행하지 말며라 하였다. 이는 Sabbapāpassa akaraa로서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라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악()과 관련된 말이 빠빠(papa)’이다.

 

한문게송에서 선과 악에 대한 것은 빠알리 게송에서는 꾸살라(kusala)와 빠빠(papa)이다. 꾸살라는 단지 착한 것이고, 빠빠는 단지 악한 것의 의미일까?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는 어떻게 다른가(2012-09-2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꾸살라행(kusala)이란 무엇인가?

 

초기경전에서 꾸살라라는 말은 무수하게 등장한다. 꾸살라에 대응하는 말이 아꾸살라(akusala)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악행을 뜻하는 빠빠(papa)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

 

꾸살라에 대헤서는 일반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행위라 번역된다. 하지만 단지 착한 것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런 꾸살라행은 지혜로운 행위이다. 그래서 꾸살라에 대하여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wholesome, skillful)”이라 한다. 이는 단지 한문에서 착할 善()자에만 집중해서 착하게 살자라고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착한 것에다 지혜가 결합된 것이 꾸살라이다. 이렇게 지혜가 결합되면 파워가 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제압한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 또는 착하고 지혜로운 행위가 꾸살라이다. 그런데 꾸살라행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 , 치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탐진치를 소멸하여 꾸살라행을 하는 자에 대하여 해탈한 사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 한다. 이는 단지 착할 선자에 의지하여 착한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다.

 

꾸살라와 유사한 말이 뿐냐(puñña)이다. 여기서 뿐냐는 공덕행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꾸살라행’과 ‘뿐냐행’으로 구분한다. 꾸살라행은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탐진치가 없이 하는 행동이지만, 뿐냐 행은 궁극적으로 윤회하는 중생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보시를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위를 하는 것이 뿐냐행이다. 그러나 꾸살라행은 윤회를 벗어나기 위한 지혜로운 행위이다. 이렇게 꾸살라행과 뿐냐행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칠불통계(七佛通戒)를 실천하는 자는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된다라고 하였다. 대체 어떤 경전, 어떤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인가?

 

착하게 살면 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일까? 강병균교수는 그렇게 보는 것 같다. 이는 인류 경제제도·정치제도 발전과 인권향상과 과학·문명 발달은, ‘윤회를 믿지 않거나, 믿어도 기억하지 못하는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시라라 하면서 이들이 자신들이 불교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칠불통계(七佛通戒)를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강병균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이 땅에 불교가 있을 필요가 없다. 착하게만 살면 되기 때문이다.

 

열 가지 꾸살라행에 대하여

 

한문게송에 근거하여 착하게 살자를 말하는 강병균 교수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고 있다. 경전을 읽어 보고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칠불통계게에서 말하는 꾸살라는 단순하게 착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다. 착하고 건전하게 살되 지혜롭게 살자는 것이다. 지혜의 의미가 더 크다. 그런 지혜는 어떤 지혜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지혜이다. 궁극적으로 사성제를 아는 지혜이다.

 

꾸살라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에서는 “It is defined in M. 9 as the 10 wholesome courses of action (s. kammapatha)”라 하였다. 맛지마니까야 9번 경에서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añcāvuso kusala ? Pāātipātā veramaī kusala, adinnādānā veramaī kusala, kāmesu micchācārā veramaī kusala, musāvādā veramaī kusala, pisuāvācā veramaī kusala, pharusāvācā veramaī kusala, samphappalāpā veramaī kusala, anabhijjhā kusala, abyāpādo kusala, sammādiṭṭhi kusala, ida vuccatāvuso kusala.

 

[싸리뿟따]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까? 벗들이여,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5) 이간질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6) 욕지거리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7)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8) 탐욕이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9) 분노가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고,

10) 바른 견해가 착하고 건전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올바른 견해의 경, 맛지마니까야 M9, 전재성님역)

 

 

이것이 꾸살라행이다. 흔히 말하는 십선행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십선행과 하나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열 번째 바른 견해가 착하고 건전한 것들입니다. (sammādiṭṭhi kusala)”라는 말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어리석지 않음(무치)’이라 하고 있다.

 

무엇이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正見)인가?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正見)’ 란 무엇을 말할까? 정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간적 정견이고 또 하나는 출세간적 정견이다. 세간적 정견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꾸살라행 열 가지에서 열번째가 바른 견해이다. 세간적 정견으로 사용될 때에 정형구가 있다. 이는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흘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 (M41) 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선업과보를 받고,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악업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내생과 윤회를부정하는 잘못된 견해이다. 이렇게 본다면 꾸살라행은 업과 과보를 인정하고 내생과 윤회를 인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출세간적으로 보면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꾸살라행이다. 그럼에도 불교를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살았던 자들이 칠불통계(七佛通戒)를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계급장을 떼어 버리고 글을 썼다면

 

칠불통계게에서 칠불은 과거 출현하였던 부처님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하여 모두 일곱 분의 행적이 니까야에 기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과거에 부처님들이 출현하였을까? 이는 정법이 오래 가지 않았음을 말한다.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펼쳤어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질 되어 사라져 갔음을 뜻한다. 그래서 다음 부처님이 출현할 때 까지는 암흑시대이다. 여기서 암흑이라 한 것은 정법이 사라져 버려서 성자도 출현하지도 않고 열반도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량 없는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또 다시 부처가 출현한다. 이러기를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할 때까지 일곱 번 있었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할 때 마다 모두 깨달은 내용이 동일하였다는 것이다. 과거 부처님이 발견하였던 것은 연기법이었다.

 

칠불통계게는 과거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다. 짤막한 게송에 팔만사천 가르침이 함축 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한문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꾸살라로써 단순한 착함은 아니다. ‘지혜롭게 살자라 볼 수 있다. 그런 지혜는 불교적 지혜이다. 이는 정견을 말한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것,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며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이 출현한 것은 45억년도 안 되므로 지구상 윤회의 역사도 그 정도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더구나 전생을 기억하는 것에 대하여 정신병동이나 기도원에 가면 자신이 전생에 예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수천 명이나 볼 수 있다라 하여 미친자로 보고 있다. 이는 내생과 윤회, 특히 육도윤회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윤회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을 미친자로 보는 것이다. 

 

강병균교수의 이력은 화려하다 화려한 스펙을 가진 자의 계급장을 떼어 버리고 글을 썼다면 어떻게 볼까? 과학적 상식을 바탕으로 하여 윤회의 역사가 지구의 역사와 같은 45억년 정도 된다고 라든가  또 진화연기론운운하며 글을 썼다면 어떤 소리를 들을까?

 

 

 

2015-11-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