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똑같아요, 예수의 말이나 부처의 말이나”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8. 11:54

 

 

똑같아요, 예수의 말이나 부처의 말이나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고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영상법문이다. 법문을 듣게 된 동기는 각산스님이 동영상 강의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종종 방문하여 법에 대하여 논의한다고 하였다. 강북에 있는 Y H스님이다.

 

H스님은 미국에서 살다 온 스님이다. 어떤 연유로 미국에 가게 되어 그곳 교포사회에서 절을 맡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아이엠에프 무렵 들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법문을 들어 보니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근 스님의 법문을 보면 똑같아요, 예수의 말이나 부처의 말이나”(2015 11 1일 법문) 라며 모든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예수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다 그랬는데, 진리나 길은 여러분 자신을 말하는 거에요.”라 하였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나 빛이 불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속에 부처가 있고 신이 있는데 살다 정신이 맑고 깨끗해가지고 난 이렇게 가야 겠다 난 이런 사람이 좋다해서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고. 석가모니를 알려면 석가모니가 말한 불성을 깨달아야 하고 예수를 알려면 그쪽 말로 신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갓이즈인유(God is in you)’신은 네 안에 있다 이말에요. 전혀 둘이 아녜요. 종합해 보면 성인들은 사람속에 있는 길을 보고 길이 도에요. 불성을 보고 신을 보고 말하는 거에요.”

 

(H스님, 2015년 11월 1 법문)

 

 

기독교에서는 이 있고 불교에서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신이나 불성이 사실 같은 것이라 한다. 이런 사실을 종교인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도들도 모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는 가짜에요. 내가 아는 불교, 내가 아는 기독교 모두 가짜에요.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거에요.”라 하였다.

 

남는 것이 없는 법문

 

H스님의 법문을 여러 편 들었다. 그리고 틈틈히 녹취해 두었다. 그런데 전반적인 느낌은 ()’()’이다. 아무리 들어도 텅 빈 것 같고,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스님 자신의 이야기만 있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불성이니 자성이니 하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오온 등과 같은 근본 가르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주절주절 이야기 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듣고 나서도 받아 적을 것이 없다.

 

H스님이 법이라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성이다. 법문 내내 주변이야기, 신변이야기만 하다가 어쩌다 툭 던지는 말이 불성이다. 불성 이외 특별한 다른 말은 찾아 보기 힘들다.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불성은 어떤 것일까?

 

불성(佛性)이란 무엇인가

 

불성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보이지 않는다. 빠알리니까야 어느 곳을 보아도 우리 마음속에 부처가 될 종자라든가 부처가 될 성품이라는 말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성이라는 말은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다름 아닌 중국 불교의 산물이다.

 

불성(佛性)이라는 말은 중국식 불교용어이다. 이 불성이라는 말에 대하여 동국대 김종욱 교수는 인도불교와 중국전통사상이 혼합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인도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과 중국 유가의 성품사상이 결합된 것이라 하였다.

 

여래장(如來藏)사상은 인도에서 발생된 사상으로서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이를 따타가따가르바(tathagatagarbha)’라 한다. 따라서 여래장은 깨달음의 자궁(Bhddhahood embryo) 또는 태아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깨닫는데 그 세월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보살로서의 삶을 살아온 과정과 유사함을 말한다. 그것은 4아승지 겁 이상의 보살도를 닦아야 하고 또한 살아 있는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여래장사상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한량 없는 세월을 필요로 한다.

 

여래장 사상이 중국으로 건너 왔을 때 중국 고유의 성품사상과 결합하게 된다. 그런 성품은 누구에게나 내재 해 있다고 보는 중국고유의 사상이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것들이디. 그런데 이런 성품사상이 여래장 사상과 결합하였을 때 불성이 된 것이다. 즉 불성이라는 말은 인도불교의 여래장사상에서 을 가져 온 것이고, 중국고대 성품사상에서 자를 가져와서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부처가 될 성품이라 하여 불성이라 한다. 이런 불성사상은 중국에서 중국적 환경에서 생겨난 중국불교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중국불교라 볼 수 있는 선종의 핵심사상이 불성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불성사상은 인도의 여래장 사상처럼 시간이 한량없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이익을 중시한다. 그런 사상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것이 불성사상이다. 인도 여래장 사상에사는 부처가 되는데 4아승지 겁 이상이 걸리지만 중국불교 선종에서는 현세에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현실적이고 이익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성품에 기인한다. 사상이다. 내안에 있는 부처성품만 보면 현세에서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불성사상이다. H스님이 하는 법문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중국불교, 중국선종의 불성사상에 대한 법문이라 볼 수 있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目)

 

H스님이 말하는 불성사상을 보면 기독교의 그것과 유사하다. H스님은 법문에서 마음속에 부처가 있고 신이 있는데라 하는가 하면 전혀 둘이 아녜요라 한다. 사실상 같은 것이라 한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것이 된다. 절망 그렇다면 굳이 힘들게 산에 있는 절에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가서 앉아 있으나 깊은 산중의 절에 있으나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이 몇 해 전 뉴욕 교회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目)’이라는 화두를 이야기 하였다.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 진제스님이 대중에게 영어로 "What is your true self?(당신의 참나는 무엇인가)"라고 물음을 던지자 박수소리가 교회 안을 가득 메웠다.”라 하였다. 왜 기독교인들은 진제스님에게 기립박수를 보냈을까? 이에 대하여 조사스님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마하야나와 젠부디즘(2014-07-1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진제스님이 기립박수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라는 화두와 거의 똑 같은 말이 바이블에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에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 (요한복음 1) 라는 말이 있다. 바로 이 말이 진제스님이 늘 입에 달고 다니듯이 말하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으로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What is my true self before my parents gave birth to me?)”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종에서 말하는 불성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안의 하나님은 너무나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H스님도 전혀 둘이 아녜요.”라 하였을 것이다.

 

외국인 스님들에 대하여

 

H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스님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불자들이 생각하는 스님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먼저 H스님은 자신의 체험위주로 법문하였다.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출가동기가 불분명하거나 문제가 많은 자들이라 하였다. 먼저 스님은 외국인 스님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미국서 살다보니 참 이상하더라고.  전에 송광사에 서양애들이 50명 왔는데 얼굴 하얕고 승복입고 걸망 맨 것이 위대해 뵈더라고. , 저 사람들은 잘 산 나라에서 대학졸업 하고 출가했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구산스님도 그렇고. 구산스님도 이발사 하다 들어 왔기 때문에. 또 키도 크고 한복을 입으면 의젓해요. 걸망지고 다니면 대단하게 보이더라구요.”

 

(H스님, 1015년 9월 20일자 법문)

 

 

H스님은 출가하여 송광사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그 때 당시 구산스님이 있었을 때 외국인들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매우 의젓해 보였다고 하였다. 모두 백인으로서 명문대를 나오고 부자집 자제들인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한 이년 살게 되었을 때 실상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멋 모르고 미국을 갔지요. 한 이년 사니까 , 이런 애들이 한국에 와가지고 중노릇 하는구나’”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출가하는가

 

스님은 한국에서 출가한 자들을 예로 들어 외국인 스님들을 설명한다. 그렇다면어떤 사람들이 출가할까?

 

 

똑같이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절에 들어와요. 세상살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잘사는 사람들은 절대 안 들어 옵니다. 부처님이 되기 전에는 보고 듣는 부에 취해 지면 중이 안되요. 뭐 인생이 막힌 것이 있든지 성격에 장애가 있든지 뭔가 있어요. 일반적인 사람은 부모 없이 크고 학교를 못배우고 그런 사람들은 절에 와서 꼭 그것을 해요. 절대 공부 안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너무 인생이 어려워서 계모라든가 느닷없이 망해가지고 세상이 무상해서 스승을 믿고 한 사람이 도인이 되기는 한데, 도인 되어도 방황을 똑같이 하더라구요. 전강스님 보니까. 별짓다하더라구요. 깨치고 나서도 별짓 다 해요. 그런 곳이 절이더라구요.”

 

(H스님, 1015년 9월 20일자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절에 간 사람들이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갈데 없는 자들, 성격결함이 있는 자들 등이 절에 온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절에 왔을 때 절대 공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백인들이 한국불교로 출가하였을 불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잘사는 나라에서 모두 대학교육까지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곳은 오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인들 스님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교전문기자의 책에 따르면 외국인 승려에 대한 인터뷰에서 출가하니 뭐가 가장 좋던가요?”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결론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종일 참선만 하면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출가했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타락하였는데

 

H스님은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젊었을 때 발심출가 했다고 한다. 누구 보다도 기쁨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방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시적 타락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창녀촌이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자포자기가 되어 걸식하며 돌아 다녔다고 한다. 그런 곳 중에 창녀촌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창녀촌에 가니 그렇게 마음이 푸근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창녀들과 성적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함께 가장 낮은 위치에 함께 있었을 때 오히려 사람사는 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화엄경 입법계품에 실려 있는 창녀이야기를 한다.

 

창녀에게서 배운다?

 

화엄경 입법계품을 보면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나선다. 일종의 구도여행이다. 그런데 구도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매우 높은 지위도 있지만 가장 낮은 지위도 있다. 가장 낮은 지위가 바로 창녀 바수밀다이다.

 

선재동자가 창녀 또는 유녀 바수밀다를 찾아 간 것은 배움을 위해서이다. 창녀에게도 배움이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반드시 모든 이들이 여색에 대해서 가지는 깨끗하다는 생각을 깨뜨리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여인 중에는 몸을 파는 창녀도 있음을 말한다.

 

선재동자는 바수밀다를 만나자 성자시여, 저는 이이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지만,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도를 닦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듣사오니 성자께서 잘 가르쳐 주신다 하오니 원컨대 말씀해 주소서.”라며 배움을 청한다.

 

선재동자가 바수밀다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았을까? 이에 대하여 바수밀다는 어떤 중생이 애욕에 얽매여 내게 오면, 나는 그에게 법을 말하여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집착 없는 경계의 삼매를 얻게 한다.”라 하였다. 누군가 욕정을 못이겨 자신을 찾았을 때 탐욕이 사라지는 법을 설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어떤 중생이 나를 끌어 안으면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을 거두어주면서 떠나지 않는 삼매를 얻으며, 어떤 중생이 내 입술만 한 번 맞추어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의 복덕을 늘게 하는 삼매를 얻는다.”

 

(화엄경 입법계품, 바수밀다편)

 

 

애욕에 가득 찬 어떤 중생이 창녀인 자신을 안거나 입을 맞추면 애욕이 사라지는 삼매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신체의 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창녀촌을 가까이 하는 스님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승려는 가장 환영받는 단골손님

 

창녀촌에 가는 것도 하나의 공부 과정으로 보는 것은 대승경전의 최고봉이라 불리우는 화엄경에 나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공부 목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창녀촌을 찾는 스님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종교전문기자의 책을 보면 창녀촌에서 승려는 가장 환영받는 단골손님이라 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알 수 있다.

 

 

20여 년 전 막 불교에 입문할 당시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신도회 회장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중구의 한 경찰서장이 한 말이 퍼져 내 귀까지 온것이었다.

 

1970~80년대 서울역 앞 양동 홍등가 지역을 급습해보면 방에서 나오는 반이 승려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변해 있지만 한때 그곳에서 승려가 가장 환영받는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아마 수계 절차없이 외양만 삭발하고 승복을 갖춰 입은 ‘땡중’이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승려들이 고급 요정에  드나든다는 말이 매체를 통해 흘로나온 적이 있다. 본사이든 말사이든 다른 종교에 비해 주머니가 두둑하고 시간 여유가 많은 주지라면 딴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승려에게는 대처가 가능한 종단으로 옮기라고 권하고 싶다.

 

(김나미 기자, 신앙지옥 불신천국)

 

 

종교전문기자의 글에 따르면 창녀촌에서 반은 승려라 하였다. 물론 승려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기자는 아마 땡중일 것이라 하였다.

 

H스님의 경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안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걸식하며 유랑하며 심지어 창녀촌에도 갔다고 했다. 일부로 타락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 배경에는 대승경전의 교리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성자의 삶의 조건은

 

 

대승경전에 따르면 창녀도 선지식이라 하여 창녀로부터도 배울 수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초기경전, 빠알리니까에서는 입법계품과 같은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성자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성자의 삶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적 접촉을 금하는 것이다. 이는 팔계에서 순결하지 못한 성적 교섭을 떠나라.”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은 성적교섭에 팀닉하는 자는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잘못 실천합니다.  그의 안에 있는 탐닉은 천한 것입니다.” (stn815) 라든가, “여태까지는 홀로 살다가 나중에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수레가 길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stn816) 라 하였다. 아낙네는 해탈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오.” (stn703) 라고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청정한 삶(brahmacariya)’의 조건에 성적교섭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승경전에서는 창녀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며 창녀와의 접촉을 정당화 하는 듯 하다.

 

절대로 어릴 때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H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한국불교의 구조적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권승들의 행태에 대하여 동진출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원인을 보니까 한결같이 총무원에 있는 사람들 99.99가 다 그런 사람들이에요. 절대로 어릴 때 들어온 사람들입니다.”라 하였다.

 

소년시절에 들어 온 스님들이 왜 문제일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서 들오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부모가 없거나 편부나 편모이거나 하여 절에 맡겨진 아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나중에 스님이 되었을 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동진출가는 자의적 출가가 아니다. 타의에 의해서 절에 맡겨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님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총무원 권승들 대다수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절에 맡겨져서 자란 동진출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H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처럼 사회생활하면서 정상적인 행태에서 친구도 만나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사회를 바로 알아요. 또 정상적인 부모를 가진 사람들 밑에서 큰 사람들은 친구도 사귀고 하는데, 중들은 어릴 때 들어와 가지고 독신생활을 억지로 묶어가지고 학교를 보내니까 바깥에서 사귀고 싶은데.  혼란이 오는 거죠. 그러면서 경학을 배우다 보니까 머리는 발달한데 인격이 비정상이 안되것어요. 그러다 보니 사고가 나더라고요.”

 

(H스님, 2015년 9월 6일자 법문)

 

 

어릴 때 절에 들어 온 소년들은 부모 밑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한 것과 다르다. 대체로 절이라는 곳이 그다지 자비심이 없고 대체로 냉정한 곳이라 하는데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H스님은 법을 혼란케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릴 때 들어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청소년기 애정결핍으로

 

어릴 때 절에 오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많다. 이는 일반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애정결핍으로 자랐을 때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법을 혼란케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릴 때 들어왔다는 거에요. 쉽게 말해 연애도 제대로 못해보고 결혼도 안해보고 직장생활도 안해 보니까 돈이 어디서 들어 온지도 몰라요. 제사지내면 돈 많이 들어 오니까 푹 써 버린다 말이에요.”라 하였다.

 

동진출가한 스님들을 보면 유독 세상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산전수전 다겪고 출가한 자들은 세상일에 초연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절에서만 자란 스님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도 그다지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노래와 춤, 그림, 사찰음식 등 부업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본분사인 수행과 포교가 있음에도 이를 제껴 두고 엉뚱한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런 것 중에 절뺏기나 종권장악하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총무원 주변에 있는 스님들 대다수가 그렇다는 것이다.

 

절에 어렸을 때 들어 왔다고 하여 다 빗나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H스님에 따르면 대다수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아마 청소년기의 애정결핍에 따른 것일 수 있다. 또 연해 한번 못해 보고 가정 한번 가져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 돌아 가는 사정을 몰라서 일 수 있다.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

 

동진출가자는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젊은 스님은 물론 어른 스님도 예외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원장으로 있던 스님이 있었어요. 우리가 봤을 때 암것도 아닌 것인데. 그 사람도 어릴 때 들어온 사람이에요. 뭔가 공부하긴 했어요. 선원장을 하고 있는데 어떤 젊은 부부가 왔어요. 그런데 병고쳐 준다고 여자를 만진거에요. 남편이 이를 보고 고소해 가지고 완전히 쫒겨나서 어디 가서 살아요. 그 사람을 보면서 70넘었으니까 원로 아니요. 보통사람들은 그리 안합니다. 스님들은 질서가 없기 때문에 수맥 핑계로 만진거에요.

 

술먹고 여자도 저질적 여자와 놀다가 사고치고 신문에 나잖아요. 그게 전체가 어떤 사람이냐하면 동진출가한 사람들이에요. 속에 으글글해요. 근데 동진출가는 깨끗하잖습니까? 없을 때는 깨끗한데 현실에 부딪치면 뒤바뀌어져요.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정상적인 사람이 불교를 닦는 것이지 비뚤어진 사람이 절대로 못해요.

 

칠십이 넘어도 안고쳐진다고 해요. 스님들 말 들어 보면. 전에 순천 선암사 노스님 한 분이 주간지를 보는 거에요. 주간지 보면 빨게 가지고 여자들 나오잖아요. 혼자 뒷산에서 보는 거에요. 젊은 스님들이 스님, 그 나이에도 그런 거 보세요?’ 라고 물어본 거에요. 그러자 느그들이야 젊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늙었으니까 봐야지그랬다는 거에요.

 

그게 호기심이에요. 나쁜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나이에 결혼생활하면 훤히 알아요. 훤히 알아서 남녀관계가 이런 것이구나 하며 무상을 느껴 도인이 저절로 되어가는데, 일평생 부처님 경따로 속에 일어나는 것 따로 그래 비인격자거든요. 껍데기만 스님이여. 이상이상 하다 했는데 절에 이런 사람들이 살아요.”

 

(H스님, 2015년 9월 6일자 법문)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나이가 문제 되지 않는 듯 하다. 칠십이 된 노스님도 여자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한 것 같다. 그것도 매우 저질적이라 한다. 세상에서도 하찮게 여기는 저질적 여자들과 놀아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나이 먹도록 감각적 욕망 하나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머리만 깍았을 뿐 행위하는 것은 세속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이유

 

각산스님이 종종 찾아서 가르침에 대하여 논한다는 H스님의 법문을 여러 편 들어 보았다. 그러나 받아 적을 것이 없다. 그것은 스님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 신변이야기식으로 법문하기 때문이다. 다만 법에 대하여 말할 때는 불성이나 자성을 말한다.

 

스님에 따르면 내 안에 부처가 될 성품이 있는데 이것을 아는 것이 정견이고, 바른 길이라 하였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받아 적을 것이 없는 것이다. 마치 유일신 종교에서 모든 것을 신의 탓이라 말하는 것 같다.

 

선종의 불성사상을 보면 유일신교와 크게 차이가 없다. 유일신교에서도 내안의 신을 찾아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H스님은 불교나 기독교나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럴 거라면 굳이 불교를 믿지 않아도 될 것이다. 힘들게 산길 올라 갈 것이 아니라 동네 교회에 가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타종교에서는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아를 말한다. 바로 이 무아사상이 타종교와 차별화 되고 불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사상이다. 이런 무아사상은 연기법을 바탕으로 한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의하여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불사의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동네친구 부르듯이 석가모니가

 

전 세계 어느 종교나 어느 사상에서도 열반을 말하지 않는다. 또 연기법도, 사성제도, 팔정도도, 오온도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에만 무아사상이 있고 열반이 있고 연기법, 사성제, 팔정도, 오온 등의 근본 가르침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을 정등각자 등 열 가지 칭호로 부른다. 그런데  H스님은 부처님에 대하여 동네친구 부르듯이 석가모니가라 한다.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최상의 호칭을 사용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제자들이나불자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세존이시여라고 말한다. 여기서 세존은 빠알리어로 바가와(bhagava)’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님이라는 뜻이다. 어느 누구도 석가모니라거나 고따마라 부르지 않는다. 외도들이나 고따마라 하여 성씨를 부른다. 그런데 선종의 선사들은 부처님 부르기를 마치 친구 부르듯이 석가모니가라 한다. 부처님과 동급이란 말인가?

 

부처님의 일생부터 공부해야

 

한국불교 선종의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들을 것이 없다. 부처님 부르기를 친구 부르듯이 하는가 하면 불성타령이다. 그러다 보니 원맨쇼 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법문이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팔만사천 법문을 말한다. 이런 좋은 법문소재를 내 버려 두고 불성타령만 할 것인가?

 

아마 불성이 스님들을 혼란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아 보인다. 스님들 대부분이 출가하여 혼란을 겪는다고 한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창녀촌에 가기도 하는 것이라 본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한국불교 스님들이 방황하지 않으려면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부터 공부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법문할 때는 자신의 신변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서 하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와 기독교가 둘이 아니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
Anuttaro dhammavara
adesayī
Idampi budd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 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34)

 

 

 

2015-11-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