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먼저 본사람이 먼저 치우기 눈빛으로 소통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20. 11:34

 

 

먼저 본사람이 먼저 치우기 눈빛으로 소통하기

 

 

 

 

 

백날 경전공부 한다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수행만 있을까? 앉아서 명상을 해야 만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일까? 물론 좌선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의 때를 벗겨 내는데 있어서 최상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다. 그럼에도 오로지 화두를 잡고 참선하는 것만이 최고이다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양한 가르침을 놓치기 쉽다.

 

어떤 이들은 수행을 하라고 말한다. 당연히 수행을 해야 한다. 하루에 단 오분이라도 눈을 감고 호흡을 관찰하면 마치 흙탕물이 정화 되듯이 차분해진다. 더구나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관찰 할 수 있어서 법을 알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참선론자들이 항상 하는 말은 백날 경전공부 해 보았자참선 한번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참선을 하기 쉽지 않다. 천만불자라고 하였을 때 천만명을 지도할 스승이 없다. 오로지 극 소수의 출가수행자 또는 재가수행자만이 스승의 지도에 따라 업장소멸에 가장 빠른 길이라는 참선을 하게 된다. 대다수는 먹고 살기에 바빠서 참선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경전 접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때 먼저 접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에 대하여 말로써 또는 글로써 공유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한 줄이라도 접하면 부처님 가르침 세계로 인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경전이야말로 현실을 사는 불자들에게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

 

율장대품에 이런 말이 있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라는 말이다. 이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적절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비록 율장이 출가한 빅쿠들에 대한 계행의 가르침이라 하지만 재가불자들도 접하면 적지 않게 도움이 되는 것이 많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가 그렇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이는 율장대품 꼬삼비의 다발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아누룻다 존자가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누룻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

 

 마을에서 탁발하여 맨 나중에 돌아오는 자는 남은 음식이 있으면, 그가 원한다면 먹고,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풀이 없는 곳에 던지거나 벌레 없는 물에 가라앉게 합니다.

 

 그는 자리를 치우고 음료수 단지나 세정수 단지나 배설물통이 텅 빈 것을 보는 자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치웁니다. 만약 그것이 너무 무거우면, 손짓으로 두 번 불러 손을 맞잡고 치웁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그것 때문에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율장대품, 10장 꼬삼비다발, Pālileyyakagamanakathā, Vin.I.352)

 

 

이 구절을 보면 승가공동체에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같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수행자들이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불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을 서로 미루었을 때이다.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을 때 누군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줍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친다면 공동체는 엉망이 될 것이다.

 

아누룻다는 먼저 본 사람이 줍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라며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탁발한 음식을 올려 놓을 자리를 누군가 펴야 하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자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편다는 것이다. 더구나 남은 음식을 버릴 쓰레기통도 옆에 준비해 놓는다고 하였다.

 

탁발에서 맨 나중에 도착한 자가 있다. 그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남은 음식쓰레기를 치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풀이 없는 곳에 던지거나 벌레 없는 물에 가라앉게 합니다.”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탁발에서 가장 먼저 돌아 온 자는 자리를 펴고 음식먹을 준비를 해 놓고, 가장 늦게 도착한 자는 펴 놓은 자리를 걷고 치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하는 것이다.

 

치우는 사람 따로 있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함께 살아 보면 단점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이는 여행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여행지에서 함께 방을 사용할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불을 갠다든가 음식을 만든다든가 청소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평소에 사람 좋기로 소문난 친구가 있다. 그런데 함께 방을 사용하여 보니 게으름만 피우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럴 때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어 오름을 알 수 있다. 평소 못 보았던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방에 쓰레기가 널려 있는데도 아무도 치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몇 일만지나면 엉망이 될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 곳에나 옷을 던져 놓는다든가, 일어나고 난 다음 이불도 개지 않는다면 집안이 어떻게 될까? 옷을 치우고 이불을 개고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집에 하인을 두고 산다면 아무렇게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이라면 누구든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 식이다. 옷가지가 널려 있을 때 이를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는 것이다. 바닥에 휴지나 비닐부스러기가 있을 때 이를 먼저 보는 사람이 치우는 것이다.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우면 다툼이 일어날 수 없다. 공동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 또는 청년들의 삶을 보면 엉망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치우지 않는 것에서 드러난다. 방을 보면 개지 않은 이불,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 이곳 저곳에 있는 책, 그리고 먹다 남은 음식부스러기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가관이 펼쳐 진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엄마가 다 치우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들은 모든 것을 아내가 해 주기를 바란다. 집에 오면 양말이나 옷을 아무 곳에나 던져 놓는다.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청소를 하고 때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도와 주어야 하나 남자라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일 벌리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게 된다. 이는 불화의 요인이 된다. 참다 참다 못해 말이 오가고 고성이 되고 급기야 큰 싸움으로 번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우기를 해야 한다.

 

누구든지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워야 한다. 그런데 자신 혼자 힘으로 안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도움을 청해야 한다. 어떻게 청하는가? 이는 아무룻다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아누룻다는 부처님에게 만약 그것이 너무 무거우면, 손짓으로 두 번 불러 손을 맞잡고 치웁니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단지 손짓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말로서 도와줘라든가 와 보세요라는 말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말을 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석영중 교수의 인문학강좌에서

 

한 때 유행가 가사 중에 눈으로 말해요라는 말이 있었다. 눈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부처님 제자들은 눈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아눗룻다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서로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지내기를 바란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랑스런 눈빛으로 (piyacakkhūhi)라는 말이 있다. 바로 눈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도 다 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눈빛만 보아도 어떤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는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석영중 교수의 인문학 강좌가 있다. ‘톨스토이 불륜을 말하다에서 안나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을 소개 하고 있다. 소설에는 두 커플이 있다. 한편은 불륜관계이고 또 한편은 평범한 관계이다. 이 연애스토리는 성장하지 않는 커플성장하는 커플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레빈과 키티는 성장하는 커플이다. 순수한 관계를 말한다. 반면 불륜관계를 포함한 나머지 커플들은 성장하지 않는 커플들이다. 성장하는 커플의 특징은 무엇일까?

 

사랑이 증오로 바뀔 때

 

소설에서 안나와 브론스키 커풀은 불륜관계이다. 유부녀 안나가 연하의 청년장교 브론스키를 유혹하여 함께 살게 되지만 이는 욕구충족에 따른 것이다. 이런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안나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끊임 없이 관심을 보인다. 그런 관심은 집착이 된다. 그런데 집착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 자꾸 쫓아 다니면 상대는 더 멀리 도망가는 것과 같다.

 

집착은 소유로 이어진다. 상대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집착하면 할수록, 소유하려 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더욱 더 멀어진다. 이렇게 소유하지 못하였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그것은 다름 아닌 증오이다. 사랑이 증오로 바뀐 것이다. 소설에서 안나는 절망 끝에 죽음으로 일생을 마친다. 이런 불륜관계에 따른 사랑은 성장하지 않는 커플의 대표적 예라 볼 수 있다.

 

응시는 중요한 소통방식

 

소설에서 레빈과 키티 커플이다. 이 커플은 성장하는 커플의 대표적 예이다. 이 커플은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커플이다. 한눈에 반하여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사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성장해 간다. 이는 한눈에 반하여 열정적 사랑을 나눈 불륜의 안나와 브론스키와 대조 된다.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은 처음 만난 불륜의 사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멈추어 버린 사랑, 성장이 멈추어 버린 사랑이다. 반면 성장하는 커플 레빈과 키티의 처음 사랑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날이 감에 따라 성장하였다. 이는 소통에 따른 것이다. 공감하고 기쁨이 있는 가정으로 만들어 간 것이다.


석영중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성장하지 않는 커플과 성장하는 커플의 차이는 대화에서도 발견된다고 하였다.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은 대화를 많이 한다. 소설속에서는 끊임 없이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석영중 교수는 끊임 없이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기도 합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말이 많을수록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통방식은 어떤 것일까?

 

톨스토이 작품속에서 진정한 대화, 진정한 소통 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일까? 가급적 말을 자제하는 사람들이다. 말을 거의 안하는 사람들이다. 듣거나 보는 것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또 상대방을 응시한다. 그래서 톨스토이 문학에서 응시는 중요한 소통방식이라 하였다. 마치 눈으로 말해요라는 가사를 떠 올리게 한다. 또 부처님이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Vin.I.351) 라는 구절을 떠 올리게 한다.

 

눈빛을 통해서

 

그렇다면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대화가 될 수 있을까? 안나카레니나에서 레빈과 키티가 소통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레빈은 키티와 결혼식을 앞두고 불안하였다.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 결혼이 잘 된 것인지 불안해 하기도 한다. 이는 키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식장에서 키티와 눈이 마주치면서 불안은 눈녹듯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레빈은 키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 눈빛을 통해 자기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감정은 어느 틈에 그에게로 옮아 갔다.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밝고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Who am I2 톨스토이 불륜을 말하다 2부(석영중))

 

 

결혼식장에서 레빈은 키티와 눈이 마주치면서 안심이 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 대화가 없어도 소통이 된 것이다. 굳이 나 사랑해?”라고 사랑을 확인하면 이에 대하여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단지 눈빛만으로 사랑을 확인 한 것이다.

 

레빈과 키티는 눈빛으로 소통하였다. 그래서 그 눈빛을 통해 자기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라 하였다. 이렇게 소통이 되었을 때 서로 밝고 즐거운 기분이 된 것이다. 이는 기쁨이다. 그런데 이런 기쁨은 둘 사에서만 그친 것은 아니다.

 

레빈과 키티의 기쁨은 식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옮아져 갔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키티의 얼굴에서 타오르고 있던 기쁨의 불꽃은 회당 안의 모든 사람들에 옮은 것 같았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소통하였을 때 두 사람에게만 머문 것이 아니다. 전체로 퍼져 나간 것이다. 마치 행복바이러스와도 같은 것이다. 기쁨으로 행복한 자가 나타났을 때 주변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같다. 한 행복한 커플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것이다.


석영중 교수의 인문학강좌에서 느낀 것은 소통하는 방식이다. 불륜관계에서 시작한 부부는 끊임 없이 대화를 한다. 그러나 이는 거짓된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대화가 필요 없음을 말한다.

 

레빈과 키티가 눈빛으로 말을 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누룻다와 수행승들에게 그대들은 서로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지내기를 바란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톨스토이 문학에서 불교를 발견한 것이다.

 

왜 광팬이 안티가 되는가?

 

공동체 생활에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다. 누군가를 부를 때 굳이 말로 하지 않는다. 손짓이나 눈빛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런 방식이 가장 수승하다. 또 말 보다 실천이다. 이는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우기와 같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것과 같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쉽상이다. 끊임 없이 말을 걸로 자기 나 사랑해?”라며 몇 번이고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랑은 집착이다. 집착은 소유로 발전한다. 그러다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증오하게 된다.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 보다 더 쉽다. 광팬이 안티가 되는 것과 같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을 때 안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소유하려는 데서 오는 집착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가 그것이다. 결국 거짓사랑은 파국을 맞는다. 거짓사랑은 성장이 없는 것이다.

 

성장하는 사랑은 소통과 공감에 따른다. 말이 많이 필요치 않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하고 눈빛이나 손짓 몸짓 등으로 소통해도 충분하다.

 

말로서 백번 자기 나 사랑해?”라고 확인 하는 것 보다 눈빛으로 확인 시켜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것이 평범한 부부 레빈과 키티의 소통방식이다. 처음 출발은 미미 하였지만 소통과 공감에 의하여 기쁨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행복바이러스가 전파 된 것이다. 이것이 성장이다.

 

가르침을 접하면 성장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성장하게 되어 있다. 특히 수행공동체에서 생활하면 그렇다. 그런 수행공동체는 말이 필요치 않다. 눈빛으로 손짓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다.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운다는 식으로 행위를 하면 불화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라 하였다.

 

서로 살아온 배경은 다르지만 수행공동체에서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대했을 때 마치 연인들이 함께 사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아예 말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할말은 하고 사는 것이다. 이는 아누룻다가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Vin.I.352)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잡담을 금하였다. 그러나 수행자를 초대하여 가르침을 듣고 토론하는 것은 장려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주제로 하여 밤샘 담마토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 수행공동체이다. 가르침을 접하면 성장하게 되어 있다.

 

 

2015-11-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