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승가를 승가답게, 불교를 불교답게

담마다사 이병욱 2017. 5. 22. 15:50

 

승가를 승가답게, 불교를 불교답게

 

 

 

요즘 TV를 보면 연일 놀라운 뉴스로 가득합니다. 새정부가 들어 서고 난 다음 인사에 대한 뉴스를 보면 깜짝놀라게 합니다. 인사만사(人事萬事)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제도가 훌륭해도 적재적소에 인재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작년 10 29 1차 촛불이 일어난 이래 8개월만에 보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음에도

 

어느 것이든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삼법인(三法印)이 진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ā aniccā)”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은 진리중의 진리입니다. 전임 대통령이 지금 독방에서 하루종일 벽만 바라 보고 있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진리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광속으로 변하는 세상에서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득권을 고수하는 자들입니다. 불법과 탈법과 편법으로 취득한 기득권이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라는 무리들입니다.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반승반속의 무리들입니다.

 

개혁의 무풍지대가 있는데

 

막힌 것은 뚫고 굽은 것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 새정부에서는 그동안 쌓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하여 인적쇄신과 더불어 제도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무풍지대가 있습니다. 마치 뿌리가 썩은 보리수처럼 썩을 대로 썩은 한국불교입니다.

 

 

 

 

 

 

한국불교는 뿌리가 썩은 보리수와 같습니다. 뿌리가 썩으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뿌리가 썩은 보리수에 아무리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도 결국 시들어 죽고 말 것입니다. 이미 조짐은 보이고 있습니다.

 

불자수가 3백만명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타종교로 개조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설문조사할 때 불교인이면서도 불교인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불교를 종교로 갖는 불교인일까?’라는 의문을 가진 경계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요? 경제적 요인도 있을 것입니다.

 

이전 보다 삶이 팍팍하다 보니 그날의 기분에 따라 불자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편으로 은처와 도박의혹을 받고 있는 총무원장에서부터 승려들의 각종 범계행위에 넌더리가 난 불자들이 나는 불교인이 아니오라고 대답했을 수도 있습니다.

 

뜻있는 스님들과 불자들이 불교개혁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침묵하고 있습니다. 불이익 받을까봐 두려워서 일 것입니다. 종단과 관련하여 쥐꼬리만한 이익이라도 있다면 입을 다물 것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스님들이나 빚진 것이 없는 재가불자들이 그것은 가르침이 아닙니다.”라고 외칩니다. 현재 한국불교는 개혁의 무풍지대입니다.

 

비법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가르침 아닌 것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비법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점점 정법이 설자리가 없어져 갑니다. 설령 정법이 있어도 변질 되어 종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마하깟싸빠존자는 어떤 늙은 비구가 잔소리 하는 늙은이가 사라졌다.’라 말하는 것을 듣고서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마하깟싸빠존자는 비법이 득세하기 전에 가르침을 외우자! 비법이 득세하기 전에 계율을 외우자!’라며 결집을 주도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비법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담마 아닌 것이, 가르침 아닌 것이 득세하고 있는 것은 가르침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반승반속의 무리들이 종권을 장악하고 각종 이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 깍은 처사와 다름 없습니다. 그들은 승려가 아닙니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백여 개 가량의 소위 돈되는 사찰이 있다고 합니다. 조상으로 물려준 문화재가 있어서,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토지가 있어서 사찰입장료수입과 국고보조금으로 유지되는 사찰입니다. 백여개의 사찰은 머리깍은 처사, 반승반속의 무리들에 의하여 장악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도들의 보시가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불자수가 감소하든 말든, 불교가 망하든 말든 그들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돈입니다. 비법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제발로 걸어서 산문을 나가도록

 

불자들의 정체성이 점점 상실해져 가고 있습니다. 불자수 3백만이 줄었는데 10년 후에는 또 얼마나 줄어들지 알 수 없습니다. 반승반속들은 신도들의 보시가 없어도 입장료 수입과 국고보조금으로 유지할 것입니디. 돈이 되는 백개 가량을 소유하고 있으면 굳이 포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 문화재보호 명목으로 국가로부터 막대한 국고보조금은 눈먼 돈이나 다름 없습니다.

 

반승반속의 무리들이 종단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활개치지 못하게 하려면 돈줄을 차단해야 합니다. 등산로를 막아 놓고 입장료를 받는 행위는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문화재 보수와 보호, 유지 명목으로 타내는 막대한 국고보조금을 투명관리 해야 합니다. 귀중한 세금이 반승반속들의 호주머니에 들어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문화재를 관리하든지, 국고보조금이 투명하게 집행될 수 있도록 위원회를 만들어 관리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행처럼 내버려 둔다면 국가와 공무원들의 직무유기라 볼 수 있습니다.

 

반승반속의 무리들이 산중에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돈 때문입니다. 돈 줄을 차단하면 그들이 산중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탐욕과 분노 등 번뇌로 가득 찬 그들이 이득이 없다면 제발로 걸어서 산문을 나가게 될 것입니다.

 

사기꾼, 협잡꾼, 위증자, 파렴치한

 

반승반속의 무리들은 사실상 속인들이나 다름 없습니다. 스님이면 스님의 행위를 해야 하나, 스님처럼 보이지만 속인처럼 이득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면 속인일 뿐입니다. 그래서일까 몰래 처자식을 숨겨 두고, 도박판을 벌이고, 밤샘술판을 벌립니다행위가 그 사람의 현재위치를 결정합니다.

 

부처님당시에도 출가자 같지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테라가타에 따르면 재산과 자식 그리고 아내를 버리고 출가하고도 한 움큼의 탁발음식 때문에 그들은 해서는 안될일을 추구한다.”(Thag.934)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야겠다는 마음까지 버리고 출가한 자들이 사소한 이익 때문에 가르침과 계율을 져버리는 현상에 대하여 개탄한 것입니다. 테라가타에서 빠라싸리야존자가 읊은 게송을 보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ekatikā vañcanikā,

kūasakkhī apāukā;

Bahūhi parikappehi,

āmisa paribhuñjare.

 

사기꾼들, 협잡꾼들,

위증자들, 파렴치한들이니,

그들은 많은 수단을 동원하여

물질적 이익을 취한다.”(Thag.940)

 

Lesakappe pariyāye,

parikappenudhāvitā;

Jīvikatthā upāyena,

sakaḍḍhanti bahu dhana.

 

온갖 핑계를 도모하여

수완과 술책으로 내달리며,

그들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다.”(Thag.941)

 

 

참으로 놀라운 게송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어느 부처님의 제자가 타락한 승가를 목도하면서 후세에 남긴 게송입니다. 오로지 이익만을 탐하는 승려들에 대하여 사기꾼, 협잡꾼, 위증자, 파렴치한이라 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재산증식에만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과 똑같아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직업이 승려인 자들은 포교나 한국불교의 미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 눈에는 오로지 돈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도 그들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다.”라 했습니다.

 

승려를 생계수단으로

 

한국불교의 승려들을 보면 오로지 돈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대다수 승려들은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수행정진하며 포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종권을 장악하고 있는 반승반속의 무리들은 재산불리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온갖 불법과 탈법을 동원하여 형성된 재산으로 선거때가 되면 표를 매수하고, 당선되고 나서부터는 매관매직을 합니다. 놀랍게도 테라가타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Upaṭṭhāpenti parisa,

kammato no ca dhammato;

Dhamma paresa desenti,

lābhato no ca atthato.

 

모임을 자주 갖지만

일을 위한 것이지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남들에게 가르침을 설하지만,

이득을 위한 것이지 의취를 위한 것이 아니다.”(Thag.942)

 

 

반승반속의 무리들은 권승들입니다. 권력을 가진 승려들은 가르침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마치 닭들이 모이를 해쳐 먹듯이, 그들은 그들끼리 암묵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온갖 이권을 독식하고 있습니다. 출가했어도 생계유지를 목적으로 하다면 더 이상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있습니다.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행동이 다른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듯합니다. 

 

머리를 깍았다고 하여

 

이판승들은 사판승들의 위세에 쩔쩔매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양심있는 이판승들은 주변으로 밀려나 설자리가 없습니다. 잠 잘곳 하나 없어서 여관이나 찜질방을 전전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직업이 승려인 자들은 마치 사찰을 소유물처럼 여겨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전형입니다. 테라가타에서 빠라싸리야 존자는 이렇게 게송을 읊었습니다.

 

 

Saghalābhassa bhaṇḍanti,

saghato paribāhirā;

Paralābhopajīvantā,

ahirīkā na lajjare.

 

승단으로부터 밖에 살지만,

승단 내의 이익과 관련하여 싸우고,

그들은 타인의 소득으로 살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창피함도 모른다.” (Thag.943)

 

Nānuyuttā tathā eke,

muṇḍā saghāipārutā;

Sambhāvanayevicchanti,

lābhasakkāramucchitā.

 

그렇지 않으면, 어떤 자들은

머리를 깍고 가사를 걸쳤으나,

이득과 명예에 빠져

공경 받는 것만을 원한다.”(Thag.944)

 

 

승가는 자자와 포살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득을 탐하는 자들은 승가 바깥에 살기 때문에 자자와 포살이 없습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을 승려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의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어쩌면 짐승 같은 삶입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약육강식의 무리들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에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오늘날 범계승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고 합나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기둥이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사판승이 보여 주는 행태가 전형적인 약육강식에 따른 승자독식체제입니다.

 

머리가 희다고 하여 다 장로라 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깍았다고 다 스님이라 볼 수 없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승려들을 스님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무지한 신자들은 머리깍았다고 해서, 승복을 입었다고 해서 스님으로 공경합니다. 신도들이 무지하면 무지할수록 범계승들의 권위는 자꾸만 높아져 갑니다.

 

승가를 승가답게, 불교를 불교답게

 

초기경전을 접하면 놀랍고 경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현실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이 가르침대로 살아야 함에도 가르침대로 살지 않을 때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머리깍고 스님으로 살고 있지만 전혀 스님답지 않은 자들을 보았을 때 비판합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삼보를 비방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불교의 쇠퇴를 가져 오는 출가자들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오늘날 현실과 딱 들어맞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수승한 것을 알기에 불교를 종교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불자라고 말하고 다니기가 창피할 정도입니다. 스님들이 처자식을 두고, 스님들이 도박을 하고, 스님들이 음주를 하고, 스님들이 폭력을 일삼는 등 한국불교에는 범계행위가 일상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의 최고행정책임자는 은처의혹, 도박의혹 등 8대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은처승, 도박승, 폭력승 등 범법자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서로 약점을 가진 범법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지금 이대로 영원히 지속되기 바라고 있습니다.

 

경전에 “비난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S6.10)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역언론들은 범계행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비판언론에 대하여 해종이라 하여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난 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는 부역질을 하고 있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들은 반승반승의 행태를 보이는 무리들에 대하여 잘못 된 것을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일찍이 부처님 제자 고닷따는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 (Thag.670)라며 여법하게 살 것을 말했습니다.

 

이게 승가냐? 이게 불교냐? 지금까지 침묵하던 불자들이 일어섰습니다. 총무원장직선제를 위하여, 한국불교 적폐청산을 위하여, 5 27일 토요일 오후 2시 광화문에서 조계사까지 삼보일배 행진합니다.

 

 

“이게 승가냐?

승가를 승가답게!

이게 불교냐?

불교를 불교답게!

 

 

 

2017-05-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