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부서지는 소리에, 수행의 대전환점 무너짐의 지혜
수정불가 유튜브동영상
요즘은 유튜브시대입니다. 동영상으로 음성과 함께 보여 주는 유튜브법문도 대유행입니다. 누구나 카메라를 설치하여 촬영하여 올리면 인터넷바다를 떠 돌아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유튜브 동영상의 단점은 ‘수정불가’라는 사실입니다. 올리기 전에 편집 과정을 거치긴 하겠지만 한번 올려진 동영상에 오류가 발생했을 때, 오류가 발생된 채로 유통됩니다.
언어적으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 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도 구업으로 분류됩니다. 글은 문자로 표현 되는데, 문자 역시 언어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동영상도 구업에 해당됩니다. 몸짓이나 표정, 말 등은 모두 언어적 행위에 속합니다. 그런데 한번 뱉은 말은 주어 담기 힘듭니다. 유튜브 동영상이 오류가 있는 채로 유통되고 있다면 큰 구업 짓는 것이 됩니다.
동영상보다 글이 좋은 이유
유튜브에 매번 동영상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상의 시대에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남미녀처럼 호감 있는 얼굴은 아닙니다. 목소리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얼굴도 비호감형이고 목소리도 사투리라면 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올리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면 오류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오류인채로 수 백, 수 천 개의 동영상이 인터넷 바다를 떠 돌아 다니면서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유튜브동영상은 오류가 있어도 수정불가입니다. 폐기하기 전에는 오류인채로 유통됩니다. 말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이럴 경우 글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오류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습니다. 무엇 보다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영상과 글쓰기, 두 개의 전달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튜브시대라 하지만 혐오스런 인상과 사투리 가득한 목소리를 접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유튜브 동영상이 훌륭하다고 해도 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써 놓은 글은 얼굴과 목소리와 무관합니다. 글은 논리이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납니다. 오래 기억해 두고 싶으면 가져 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유튜브 동영상을 많이 남겨도 글만 못합니다.
빗방울 부서지는 소리에
종종 좋은 글을 접합니다.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언제나 기억해 놓고 싶은 글입니다. 원담스님의 수행일기에 실려 있는 글도 그런 것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안거 중에 작성된 ‘무너짐의 지혜(bhanga nana)’에 대한 글이 인상에 남아 옮겨 봅니다.
2017년7월8일(토)비, 흐림
아침 창을 열고 정진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처마에 낙숫물 주렴이 드리운다. 마당에서 놀던 새가 마루로 날아올라 비를 피한다. 담장 밖의 키 큰 나무는 비를 맞아 호흡이 깊어지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후우 후우 숨을 내뿜는다. 멀리 안대眼對臺에 있는 점점 산들이 안개구름 속에 아롱거리며 羽化우화하려는 듯, 백룡이 기어가는 듯하고. 白虎백호 嶝등의 一字峰일자봉은 어깨가 든든하여 驟雨취우에도 의연하다.
빗방울 부서지는 소리가 선방에 가득 울린다. 聽雨청우sati에 몰입한 스님들에게 무너짐의 지혜(bhanga nana)가 일어난다. 보는 즉시 부서지니 이제 일어남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라짐의 국면만 뚜렷해진다. 모든 것이 경험되자마자 사라진다. 발을 디디면 발이 사라지고,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사라진다. 모든 것은 보이자마자 붕괴한다. 아, 무너지는구나. 잡아둘 것이 도대체 없어져 아쉬운가, 두려운가, 무서운가? 이것은 법이 보여진 것이니 담대 하라, 수행자여.
초전법륜을 듣고 제일 처음 깨달았던 꼰단냐 존자가 외쳤지 않느냐?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는 것’ ‘Yam kin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n’. 이것을 명확히 아는 삼빠자나(sampajana, 확실한 앎)가 일어나면 대상이 무너지고, 대상의 무너짐을 보는 인식이 명료하게 자각된다. “아 무너지는 구나” 하는 사띠가 보이고, 다시 “이것도 무너졌구나.” 하는 그 사띠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붕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법에 대한 이해가 확립한다.
무너짐, 붕괴, 소멸을 빠알리어로 ‘방가(bhanga)’라 한다. 무너짐을 보는 지혜가 얻어지면 이제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것이다. 뒤를 돌아다보니 방금 밟고 온 다리는 이미 가라앉아 이제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오직 앞으로 가야할 길만 남았다. 가자, 해탈과 열반의 길로, 사랑하는 님들이 가셨던 길 따라.
(원담스님, 수행일기 2017년 하안거-7, 2017-07-17)
빗방울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통찰한 글이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현상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지는데 너무 길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빗소리처럼 짧게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때 무너짐이 잘 관찰 될 것입니다.
물거품을 명상주제로
지금 나의 모습은 십년전, 이십년전 모습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변화하는 모습을 보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비내리는 소리, 특히 빗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져 포말과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면 마치 사라짐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법구경 170번 게송에서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Dhp.170)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때 오백 명의 수행승들이 부처님께 명상주제를 받아 숲속에 들어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특별한 것을 얻지 못하고 ‘각자에게 알맞은 명상주제를 얻자.’라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돌아오는 도중에 아지랑이를 명상주제로 삼아 수행하면서 왔다.
그들이 승원에 들어서는 순간 폭우가 내렸다. 그들은 여기 저기 입구에 서서 급류의 힘으로 솟아올랐다가 부서지는 물거품을 보면서 ‘우리의 몸이 생겨나고 부서지는 것이 물거품과 같다.’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부처님께서는 향실에 앉아서 수행승들에게 모습을 나투어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라고 가르쳤다. 가르침이 끝나자 그 수행승들은 선 채로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70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
수행승들이 아지랑이를 명상주제로 삼아 수행하고 있었는데 폭우를 만났다고 합니다. 급류가 바위를 만나 물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지곤 할 때 통찰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몸도 물거품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무너짐만 있는 것처럼
부처님은 물거품과 관련하여 법문한 바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포말비유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즈 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포말의 실체일 수 있는가?” (S22:95)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견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매순간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비유로 들어 설명했는데 그것이 금강경 마지막 게송 ‘여몽환포영’으로 시작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부처님은 포말의 경에서 오온에 대하여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라고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 아지랑이를 명상주제로 삼은 것은 산냐, 즉 상온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승들은 도중에 폭우를 만나서 명상주제가 포말로 바뀌었습니다. 포말은 육체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견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 순간 무너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폭포에서 물이 떨어진 것처럼 무너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빗방울이 땅바닥을 때릴 때 포말을 일으키며 사라질 때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오로지 무너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
원담스님이 언급한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 다섯 번째에 해당됩니다. 칠정정에서는 여섯 번째 청정인 도지견청정(patipadā-ñāṇadassa visuddhi)에 해당됩니다. 오로지 무너짐만 관찰되는 지혜에 대하여 청정도론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대상을 깊이 숙고하여 무너짐을 관찰하는 통찰지가 위빳사나의 지혜인가? 물질을 대상으로 가졌기 때문에 마음은 생겼다가 소멸한다. 그 대상을 깊이 숙고한 다음 그 마음이 무너짐을 관찰한다. 관찰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이라고 관찰한다. 행복이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관찰한다. 자아가 아니라 무아라고 관찰한다.”(Vism.21.11)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는 매우 높은 단계의 지혜입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 5번 째 지혜인데,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생멸의 지혜에 이어 무너짐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가장 먼저 물질을 먼저 숙고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청정도론 14장 무더기(溫)에 따르면 “물질의 무상함의 특징은 완전히 무너짐이다. 그것의 역할은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무너짐과 사라짐으로 나타난다. 그것의 가까운 원인은 무너지고 있는 물질이다.”(Vism.14.69)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수행의 대전환점
수행승이 아지랑이를 관찰하다 급류가 바위에 부딪쳐 포말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을 때 이는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포말의 경 게송에서도 “물질은 포말과 같고”(S22.95)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너짐의 지혜는 계속 무너짐만 관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청정도론 해제에서 대림스님은 ‘수행의 대전환점’이라 표현했습니다.
무너짐의 지혜가 수행의 대전환점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대림스님은 청정도론 해제에서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가 위빳사나 지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제 드디어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조합되어 ‘나’니 ‘내 것’이니 자아니 영혼이니 하면서 굳게 뭉쳐있던 무더기들이 해체되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무너짐의 지혜가 생겨났을 때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무너짐을 말합니다.
무너짐에 대한 지혜를 가장 이해 하기 쉽게 알려면 빗방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이는 청정도론에서 “마치 눈을 가진 자가 억수 같이 비가 내릴 때 호수가나 강둑에 서서 물표면에 커다란 수포덩어리가 계속해서 생겼다가 곧바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Vism.21.27)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담스님은 안거중에 “빗방울 부서지는 소리가 선방에 가득 울린다. 聽雨청우sati에 몰입한 스님들에게 무너짐의 지혜(bhanga nana)가 일어난다.”라 했습니다.
빗방울이 땅바닥을 때리면서 포말을 일으키며 사라질 때 오로지 사라짐만 관찰됩니다. 무너짐의 지혜와 빗방울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
무너짐의 지혜는 물질의 관찰로부터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물질의 무너짐만 관찰하다가 차츰 마음의 무너짐을 관찰하게 되었을 때, 즉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 됨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전현수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물질을 가지고 해요. 물질을 대상으로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구나’라고 무상이라는 것을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요. 이것이 충분히 보아지면 그 다음은 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또 봐요. 그러면 또 아는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져요. 그러면 또다시 그 의식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아는, 정신이 무상하다고 아는 마음을 또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중에는 사라짐만 계속 지켜 보게 되요.”
(전현수박사, 사마타-위빠사나 강연에서)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듣고 녹취한 것입니다.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무너짐의 지혜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물질부터 시작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의 무너짐만을 관찰했을 때 정신의 무너짐도 자연스럽게 관찰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Dhp.170)라 하여 물거품을 봄으로서 물질의 무너짐을 관찰하고, 아지랑이를 봄으로써 지각(산냐)의 무너짐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법구경 170번 게송은 청정도론 무너짐의 지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근거의 게송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원담스님은 무너짐의 지혜를 설명하면서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것이다”라 했습니다. 이는 청정도론 해제에서 대림스님이 “남방 스님들도 이 무너짐의 지혜를 수행의 대전환점으로 강조하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무너짐의 지혜가 왜 수행의 대전환점인가? 그것은 무너짐의 지혜로 인하여 나라는 개념이 해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 자신 없으면 차라리 글로
하나의 잘 만든 콘텐츠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하나의 잘 설해진 법문 역시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 건질 것이 없습니다. 특히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설령 내용이 좋더라도 설하는 자의 마스크가 비호감형이고 더구나 목소리까지 좋지 않다면 보고 듣는 것에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려거든 매우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영상으로 기록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스크에도 신경 써야 하고 목소리도 가다 듬어야 합니다. 될수 있으면 호감형이 좋습니다. 목소리도 표준말을 사용하여 구관조처럼 부드럽고 상냥하고 달콤하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동영상 제작에 임해야 할 것이라 봅니다. 동영상에 자신 없으면 차라리 글로 남기는 것이 더 나을 듯 합니다.
영상 보다 글입니다. 같은 인터넷 바다를 떠 다녀도 글이 더 생명력 있습니다. 누구나 퍼 갈 수 있고 누구나 가져 갈 수 있습니다. 또 글은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쉽게 내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잘 쓰여진 글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습니다. 특히 수행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영상 보다 글입니다.
“무너짐을 보는 지혜가 얻어지면
이제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것이다.
뒤를 돌아다보니 방금 밟고 온 다리는
이미 가라앉아 이제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오직 앞으로 가야할 길만 남았다.
가자, 해탈과 열반의 길로,
사랑하는 님들이 가셨던 길 따라.”
2017-07-24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먼 자, 귀먹은 자, 바보, 허약한 자처럼 (0) | 2017.08.05 |
---|---|
불선법(不善法)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0) | 2017.08.01 |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쭐라 빤따까에게 자상한 부처님 (0) | 2017.07.21 |
잠들기 전에도 사띠와 삼빠자나 (0) | 2017.07.20 |
폭류에 머무는 삶과 폭류에 휘말라는 삶 (0) | 2017.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