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눈먼 자, 귀먹은 자, 바보, 허약한 자처럼

담마다사 이병욱 2017. 8. 5. 11:47

 

눈먼 자, 귀먹은 자, 바보, 허약한 자처럼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세상에 통용되는 대부분의 말들은 초기경전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불교 대부분 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이 있습니다. 공사상과 보살사상을 설명한 경전으로서 난해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 실려 있는 대부분 문구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강경에는 뗏목의 비유 등 각종 비유가 있습니다. 대부분 비유가 초기경전에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승불교가 초기불교를 계승했다든가, 대승불교가 초기불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문구를 활용하여 대승불교만이 갖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만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방대한 빠알리니까야에 모두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집살이 애환

 

전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다양한 비유나 우화 등도 니까야에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벙어리 벙어리 3귀머거리 3, 장님 3년으로 석삼년을 살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시집살이 애환을 표현할 때 늘 하는 말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시집살이는 고됐습니다. 대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는 농촌에서 시집온 며느리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아이들 양육은 물론 농사 등 온갖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시집살이였을 것입니다.

 

남의 집에 시집가서 오로지 남편 하나에 의지하여 사는 며느리에게 있어서 시어머니는 불편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보고서도 못 본 척 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못 들은 척, 무언가를 봐도 못 본 척, 어떤 말을 뱉고 싶어도 말 못하는 척 하는 것을 3척이라 하는데 3척동자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3척동자이야기는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유통되어 오고 말이라 합니다.

 

세 마리 원숭이 이야기

 

일본에 세 마리 원숭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조궁 삼불원(三不)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닛코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소인 동조궁 정문에는 세 마리의 원숭이가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가리는 조각상이 있는데 삼원()의 기원이라 합니다.

 

 

 

 

 

 

 

 

일본 동조궁 세 마리 원숭이 조각상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ざる、わざる、かざ라 되어 있습니다.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幼少期にはない、わない、かないがいい」というえであり、じて「自分不都合なことはない、わない、かないがいい 」というえにもなる。”(三不猿)라 되어 있습니다. 유소년기에는 나쁜 일을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은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는 것이 좋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방식이라 합니다.

 

일본 동조궁의 세 마리 원숭이이야기는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세 마리원숭이이야기의 이집트나 앙코르왓트 부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일본에 까지 전해 져 온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한국에는 벙어리 3귀머거리 3, 장님 3이라 하여 시집살이 애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에는 유소년 교육용으로 세 마리 원숭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는 이야기는 중국 논어에도 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논어에 勿視勿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라는 말이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동아시아에서 오리지널 버전은 중국 논어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는 이야기는 유럽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Audi, vide, tace, si vis vivere in pace”

 

유럽에도 세 마리 원숭이 버전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Audi, vide, tace, si vis vivere in pace”라 합니다. 이는 듣지말아라, 보지말아라, 입다물어라.만약 평화로운 생활을 바란다면라는 뜻이라 합니다. 다소 고압적이고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불륜과 관계가 있습니다. 불륜을 폭로 하려 하는 자에게 만약 평화로운 생활을 바란다면듣지말아라, 보지말아라, 입다물어라.”라고 협박하듯이 말했다고 합니다.

 

세 마리 원숭이 이야기는 나라 마다 사용예가 각각 다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눈과 귀와 입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 것에 대하여 못 본척하고, 들은 것에 대하여 못 들은 척하고,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3척 동자라 하여 시집살이 애환에 대한 것은 인고에 대한 것이고, 일본에서 세 마리 원숭이 이야기는 아이들 교육에 대한 것이고, 중국에서 예에 대한 것은 일종의 처세에 대한 것이고, 유럽에서 불륜에 대한 것은 은폐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테라가타에서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이야기는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경전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Sabba suati sotena

sabba passati cakkhunā,
Na ca di
ṭṭha suta dhīro

sabba saddhātu arahati.

 

 귀로 모든 것을 듣고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Thag.500)

 

 

Cakkhumāssa yathā andho

sotavā badhiro yathā,
Paññav
āssa yathā mūgo

balavā dubbaloriva,
Atha tthe samuppanne

sayetha matasāyika'nti.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데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하기 때문이다.” (Thag.501)

 

 

이 두 개의 게송은 마하 깟짜야나가 읊은 것입니다. 테라가타 팔련시집에 있는 것 중에서 마하 깟짜야나가 여덟 개의 시를 읊었는데 마지막 두 개의 게송입니다.

 

두 개의 게송을 보면 3척동자이야기, 세 마리 원숭이 이야기, 세 가지 예에 대한 이야기, 세 가지 협박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그것은 보는 것, 듣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말하는 것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라 하여 지혜와 힘이 추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주를 보면 이 게송은 매우 심오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우 난해 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역자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작(改作)한 것에 대하여

 

테라가타 500번 게송을 보면 마하 깟짜야나는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에 따르면 이 문장은 원래 “sabba ujjhatum arahati”로서 모든 것을 거절해서는 안된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ujjhati ‘leaves; forsakes’의 뜻으로 거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원문대로 번역하면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거절해서는 안된다.”가 되어 애매모호하고 난해한 번역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절하는 것이라는 뜻의 빠알리어 ‘saddhātu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꾸어 번역하면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Na ca diṭṭha suta dhīro sabba saddhātu arahati)”가 되어 의미가 분명하게 통합니다.

 

이처럼 개작한 것에 대하여 노먼의 번역을 참고 했다고 합니다. 노먼(EV.201)거절하는 것(ujjhatum)’ 대신에 믿는 것(saddhātu)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해야만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로 되어 의미가 통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빠알리 원문을 개작한 것에 대하여 역자는 과감하게 빠알리원전의 이본을 만들어 번역한 것이다.”(1957번 각주) 라 했습니다.

 

왜 눈과 귀인가?

 

하루 일상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오감 중에 코와 혀와 몸이 있기는 하지만 음식을 먹거나 신체적 접촉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 눈과 귀에 의존합니다. 그 중에서도 눈의 비중이 가장 높습니다. 그래서일까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 천지입니다. 눈만 뜨면 TV를 켜고 인터넷을 봅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들여다 보는 것이 대세인 듯합니다.

 

어디를 가나 보입니다. 그리고 들립니다. 보고 싶지 않다고 하여 보지 않을 수 없고 듣고 싶지 않다고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 순간 보고 듣지만 모두 다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렬한 대상을 인식합니다. 이는 아비담마 인식과정 17단계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대상에는 쉽게 눈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수 없이 경고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재난입니다. 부처님은 유혹적이고 매혹적인 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면 감각적 욕망에 이끌려 결국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S35.136)라 했습니다.

 

테라가타에서는 귀로 모든 것을 듣고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Thag.500)라 했습니다. 테라가타에서는 귀와 눈만 언급되어 있으나 사실상 안, , , , , 의가 모두 언급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능력 중에서 눈과 귀의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에 대표로 귀와 눈이 언급된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 즉 현자는 본 것이나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섯 감각능력으로 받아 들인 대상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삶에 장애가 되고 재난이 됨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형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라 했습니다. 현자들은 세상사람들과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 갈 때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마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과 같습니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자

 

회귀본능이 있는 연어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더구나 댐과 같은 장애물이 있을 때는 힘껏 솟구쳐 오릅니다. 모두 흐름에 따라 유영하지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는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러마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면 알을 낳고 죽음을 맞이 합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것입니다. 수행자도 연어처럼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자입니다. 

 

부처님은 흐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 확립되어 있는 사람, 건너서 피안에 도달하여 땅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 이렇게 내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은 범부를 말하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은 수행자를 말하고, 확립되어 있는 사람은 불환자를 말하고, 건너서 피안에 도달하여 땅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말합니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는 수행자입니다. 견도한 자로서 수행도를 닦는 자라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수다원과 사다함입니다. 그러나 흐름을 거슬로 올라 가는 자는 모두 해당될 것이라 봅니다. 부처님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불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현한다면”(A4.5)라 했습니다. 수행자의 삶이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연상케 합니다. 흐름을 거슬러 사는 삶이 쉽지 않음을 말합니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삶을 사는 자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로서의 삶에 대한 것이 테라가타 두 게송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서 시집살이 이야기, 일본의 세 마리 원숭이 이야기, 중국에서 예에 대한 이야기, 유럽에서 은폐에 대한 이야기와 차원을 달리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장애이자 재난

 

테라가타 501번 게송에서는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Thag.501)라 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시집살이 3척동자 이야기 같습니다. 다만 말하는 것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눈 있는 자라도 포기해야 할 것이 보일 때에 눈먼 자가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해야 하고, 귀 있는 자라도 포기해야 할 것이 들릴 때에 귀먹은 자가 듣지 못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ThagA.II.210)

 

 

눈이 있어서 형상을 봅니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습니다. 코가 있어서 냄새를맡습니다. 혀가 있어서 맛을 봅니다. 몸이 있어서 감촉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대상을 다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강한 대상을 인식합니다.

 

인식 되었을 때 욕망이 개입되면 끄달려 가게 됩니다.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현자들은 눈이 있어도 봉사처럼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귀먹어리럼 듣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보아도 못 본 척하거나 들어도 못 듣는 척 하는 것과 다릅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장애이고 재난이라고 아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밝고 능숙하다는 것은

 

테라가타 501번 게송을 보면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많이 아는 자는 드러내려 하고, 힘 있는 자는 자신의 힘을 행사하려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럼에도 정반대로 감추고 사는 듯 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자는 말에 밝은 자이다. 말에 밝은 자라도 말해서는 안 될 것에 벙어리처럼 해야 하고, 힘센 자라도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서는 허약한 자, , 무능한 자처럼 되어야 한다.” (ThagA.II.210)

 

 

주석을 보면 말에 밝은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흔히 눈 밝은 자라 하는데 똑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밝다라는 말은 능숙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밝다라든가 능숙하다라는 말은 빠알리어 꾸살라(kusala)’에 해당됩니다. 꾸살라라는 말이 착하고 건전하다라고 일반적으로 번역되지만 더 넓은 의미로 밝다또는 능숙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마치 목공이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해당 전문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꾸살라라는 말은 밝다, 능숙하다, 착하다, 건전하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하는 일에 밝은 사람은 능숙하게 일처리합니다. 능숙하고 밝은 자는 실수 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건전한 삶을 사는 자는 하는 밝고 능숙한 자이기 때문에 불선업을 짓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밝고 능숙합니다. 눈 밝은 자, 귀 밝은 자입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지혜로운 자는 말에 밝은 자이다라 했습니다. 할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서 말하는 자입니다. 해로운 말을 하면 구업 짓기 때문에 그 과보를 받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업 짓는 말을 하지 않는 자가 말에 밝은 자입니다. 그래서 말을 해서는 안될 것에 대해서는 벙어리처럼 침묵한다고 했습니다.

 

옛날 시집살이는 무척 고되었을 것 같습니다. 시집살이 3년에 3척 하며 산다고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벙어리처럼 사는 것입니다. 할 말이 있어도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는 홧병의 원인이 됩니다. 지혜가 없는 며느리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처럼 입다물고 살았을 때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분노가 응어리져서 홧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는 눈도 밝고, 귀도 밝기 때문에 말하는 것에도 밝은 자입니다. 할 말은 하고 살지만 해서는 안될 말, 즉 구업 짓고 살지는 않습니다. 신업과 의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난해한 번역에 대하여

 

게송에서 가장 난해한 번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건데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하기 때문이다.”(Thag.501)라는 구절입니다. 특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의 침상(matasāyika)’ 입니다. 전재성님은 이 말과 관련하여 이 구절과 관련하여 시 전체는 아주 난해하다.”(1961번 각주) 라 하여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전재성님에 따르면 이 구절과 관련하여 담마빨라의 주석을 설명했습니다.

 

담마빨라에 따르면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생겨 났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웠더라도, 구 해야 할 일은 극복되어야지, 놓쳐버려져서는 안된다. 또는 그것이 행해질 수 없더라도 현명한 자라면, 부적당한 일을 행할 수 없다.” (ThagA.II.210)라 했습니다. 이런 주석에 대하여 노먼(EV.202)의 말을 인용하여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라 했습니다.

 

테라가타 주석을 한 6세기 주석가 담마빨라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한 것이 501번게송에서 죽음의 침상(matasāyika)’ 이라는 말이라 합니다. 노이만과 리스 데이비스 부인은 사유의 침상이라 번역했고, 마사나가 레이호는 사자가 누운 것처럼이라 번역했는데 모두 문맥과 맞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이 구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역자는 이 구절과 관련해서 이 시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수피즘을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3세기 수피 아부 야지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떠한 관점에서든 가난보다 나는 부는 보지 못했다. 나는 어떠한 관점에서든 무능보다 나는 유능은 보지 못했다. 나는 어떠한 관점에서든 완전한 침묵보다 강하게 빛나는 등불은 보지 못했다. 나는 어떠한 관점에서든 벙어리보다 나는 유창함은 보지 못했다.’ 여기서 가난, 무능, 침묵, 벙어리눈먼 자, 귀먹은 자, 바보, 허약한 자와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완전한 적멸을 상징하는 것이고, ‘죽음의 침상도 역설적인 것으로 역시 완전한 적멸을 뜻하는 것이다.

 

노이만(S.V.370)의 번역은 이 난해한 시를 잘 소화하여 원어와는 다르지만, 비교적 원의를 잘 이해하여 완전히 창작적인 윤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날카로운 눈으로 눈먼 것처럼 보이고, 날카로운 귀로 벙어리처럼 보이고, 날카로운 지혜로 무디게 보이고, 날카로운 의취로 멍청하게 보이니, 생각건데, 적멸이 옳으니, 사려깊게 휴식을 취하리.’(1961번 각주)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적멸이 키워드입니다. 다름 아닌 열반입니다. 테라가타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게송 역시 키워드는 적멸, 해탈, 열반에 대한 것입니다.

 

게송에서 죽음의 침상은 적멸 또는 열반에 대한 것입니다. 또 적멸 또는 열반을 연상케 하는 단어는 게송에서 언급된 눈먼 자, 귀먹은 자, 바보, 허약한 자입니다. 이 말은 수피 아부 야지드가 읊은 가난, 무능, 침묵, 벙어리와 대비된다고 했습니다.

 

수피가 말한 가난, 무능, 침묵, 벙어리는 다름 아닌 적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테라가타 501번 게송은 적멸과 열반에 대한 게송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Thag.501)라 했습니다.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테라가타 501번 게송을 보면 앞서 언급된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에서 시집살이 3년에 대한 애환이라 하여 벙어리 3귀머거리 3, 장님 3,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보고서도 못 본 척 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며 못들은 척하며 사는 것과 다릅니다. 또 일본 동조궁에 있다는 ざる、わざる、かざ와도 다르고, 논어에 있다는 勿視勿言라는 말과도 다른 것입니다. 유럽에서 알려져 있다는  Audi, vide, tace, si vis vivere in pace”라는 말과는 더욱 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들은 테라가타에서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의 노래입니다. 이는 세상사람들의 흐름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 갈 때 수행자들은 정반대로 욕망을 여의는 삶을 살아 갔습니다. 마치 연어처럼 흐름을 거슬러 사는 것입니다. 마침내 거센 흐름을 건너 저 언덕에 섰을 때 그가 거룩한 님, 아라한이라 했습니다. 테라가타 501번 게송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삶의 태도에 대한 노래입니다.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Thag.501)

 

 

3017-08-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