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으려거든, 번영의 수레바퀴를 굴려라
흔히 하는 말 중에 “그 사람은 복이 있다”라거나, “그 사람 복이지”라는 말을 합니다. 또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나 부자나 성공한 사람에 대하여 “타고난 복이지”라 합니다. 또 “제 복 찾아 먹는다”라고도 합니다.
복(福)이란 사전적 의미로서 “생활에서 누리게 되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이라 합니다. 행운과 행복이 키워드입니다.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는 안락함과 편안함, 즐거움도 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복에 대한 두 번째 사전적 정의는“어떤 대상으로 하여 만족과 기쁨이 많음을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무리 없이 흘러 갈 때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야”라 합니다.
수(壽)와 복(福)에 대하여
누구나 복을 바랍니다. 나에게 행운이 찾아 오는 것도 복이고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복입니다. 여기에 하나도 추가한다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수십년 전 기대수명이 지금 보다 더 짦았던 시절 회갑잔치에 ‘수복(壽福)’이라는 커다란 한자글씨를 볼 수 있었습니다.
수명과 행복은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 힘들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기대수명대로 사는 자도 많지만 사고사(事故死) 등으로 불운하게 죽은 자들도 많습니다. 제명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분의 일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오래 사는 것이 복입니다. 더구나 부유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하여 복이라 합니다. 예전 회갑잔치 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수(壽)와 복(福)입니다.
오래 사는 것도 복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라 했습니다. 여기서 네 번째 구절이 “아유 반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입니다. 다름 아닌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라고 바라는 축원입니다. 이런 축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공양을 받은 수행자나 성직자는 선한 마음으로 “오래 사시오. 장수를 누리시오.(ciraṃ jīva, dighamāyuṃ pālehī)” (A5.58)라며 축원을 해 주는 것입니다.
번영의 수레바퀴(sampatti cakkā)
오래 사는 것도 복이고, 더구나 오래 살며 행복하게 잘 사는 것도 복입니다. 그렇다면 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행복하게 잘 사는데, 또 어떤 사람은 지지리도 복이 없어서 불행하고 빈곤하게 살아 갑니다. 왜 사람마다 빈부귀천 등 차별이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수레바퀴의 경(A4.31)’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cattārimāni bhikkhave cakkāni yehi samannāgatānaṃ devamanussānaṃ catucakkaṃ vattati, yehi samannāgatā devamanussā nacirasseva mahantattaṃ vepullattaṃ pāpuṇanti bhogesu.
Katamāni cattāri? Patirūpadesavāso, sappurisupassayo, attasammāpaṇidhi, pubbe ca katapuññatā.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수레바퀴가 있는데, 그것을 갖춘 신들과 인간들이 그 네 가지 수레바퀴를 굴리고, 신들과 인간들이 그것들을 굴리면, 오래지 않아 크고 많은 재물을 얻게 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알맞은 지역에 사는 것, 참사람과 사귀는 것, 자신의 바른 서원, 예전에 지은 공덕이다.”(A4.31)
네 가지 수레바퀴(cattāri cakkā)가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나무(dāru)의 수레바퀴, 보배(ratana)의 수레바퀴, 위의(iriyāpatha)의 수레바퀴, 번영(sampatti) 의 수레바퀴입니다. 여기서는 번영의 수레바퀴를 말합니다.
신들과 인간만이 네 가지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번영의 수레바퀴를 굴립니다. 그런데 번영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자들은 네 가지 재물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1)알맞은 지역에 사는 것(Patirūpadesavāso), 2)참사람과 사귀는 것(sappurisupassayo), 3)자신의 바른 서원(attasammāpaṇidhi), 4)예전에 지은 공덕(pubbe ca katapuññatā)라 했습니다. 여기서 네 번째 예전에 지은 공덕에 주목합니다.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
예전에 지은 공덕은 이전의 공덕행(puñña)을 말합니다. 이전이라고 했을 때 전생일 수도 있습니다. 공덕이 되는 행위를 했을 때 그 과보로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법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행운과 행복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행운과 행복, 번영은 받을 만 해서 받은 것입니다. 이전에 씨를 뿌려 놓은 것을 거두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덕 또는 공덕행이라 번역되는 ‘뿐냐(puñña)’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선행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꾸살라(kusala)이고 또 하나는 뿐냐(puñña)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아꾸살라(akusala)와 빠빠(papa)입니다. 꾸살라는 일반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행위라 번역되고, 아꾸살라는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라 번역됩니다.
꾸살라와 뿐냐는 선행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뜻이 다릅니다. 꾸살라는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wholesome, skillful)을 의미하며 탐진치를 줄여 나가는 행위입니다. 궁극적으로 해탈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출세간적 선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뿐냐는 공덕행(meritorious deeds)을 의미하는데 모종의 장기적 기대의 뜻이 있습니다. 즉,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일종의 바램으로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뿐냐는 세간적 선행으로서 윤회하는 삶 속에서 행해집니다.
초기경전에서 공덕행을 뜻하는 뿐냐는 악행을 뜻하는 빠빠와 함께 댓구를 이루며 사용됩니다. 법구경에서 “공덕있는 일에 게으르면, 마음은 악한 것을 즐긴다. (Dandhaṃ hi karoto puññaṃ pāpasmiṃ ramatī mano)”(Dhp.116)라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착하고 건전한 일을 늦추는 자는 미끄러운 길을 밝는 것처럼, ‘보시해야 할까? 행해야 할까? 열매를 거둘까?’라고 생각하며, 착하고 건전한 행을 늦추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인색하고 탐욕적인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접근합니다. 마음이 실천에서 멀어질 때 마음은 결정적으로 악을 행한다는 것이 주석의 가르침입니다.
예전에 지은 공덕(pubbe puññakato)
뿐냐는 공덕행의 실천입니다. 보시를 하면 선과보를 받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공덕행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공덕행을 실천하면 다음과 같은 과보를 받는다고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Patirūpe vase dese
ariyacittakaro siyā,
Sammāpaṇidhisampanno
pubbe puññakato naro,
Dhaññaṃ dhanaṃ yaso kitti
sukhaṃ cetādhivattatīti
“알맞은 지역에 살고,
고귀한 님과 사귀며,
바른 서원을 세우고,
예전에 지은 공덕을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곡식과 재물과
명예와 행복이 넘쳐난다.”(A4.31)
예전에 공덕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재물과 명예와 행복이 넘쳐 난다고 했습니다. 네 가지 수레바퀴 중에서 ‘번영의 수레바퀴(sampatti cakkā)’를 굴린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큰명예를 얻는 것도, 큰권력을 얻는 것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전에 많이 베푸는 삶에 대한 과보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전에 지은 공덕(pubbe puññakato)’이라 했습니다.
돈을 벌려 거든, 부자가 되려거든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으려거든 역시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다름 아닌 공덕행입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는 공덕행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정치헌금 같은 것입니다. 정치헌금을 내고 이권이나 자리를 탐한다면 악행(papā)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윤회하는 삶속에서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에 따라 보시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은 공덕행(puñña)에 해당됩니다.
출가자도 차별하는 공덕행
공덕행중에 대표적인 것이 보시입니다. 그런데 보시에 따라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쑤마나의 경(A5.31)’에 따르면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로서 보시한 자는 보시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능가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수명, 인간의 용모, 인간의 행복, 인간의 권세” (A5.31)라 했습니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며, 더구나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전에 또는 전생에 베풀며 산 것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런데 전생의 공덕행은 출가한 자도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출가자의 차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쑤마나여, 출가한 자로서 그 보시하는 자는 다른 보시하지 않는 자를 다섯 가지 점에서 능가합니다. 즉, 구걸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지만, 구걸만으로도 많은 의복을 향수합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지만, 구걸만으로도 많은 음식을 향수합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지만, 구걸만으로도 많은 와좌구를 향수합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지만, 구걸만으로도 많은 필수약을 향수합니다.”(A5.31)
탁발에 의존하는 출가자에게도 보시공덕의 차별이 있음을 말합니다. 전생에 보시공덕을 지은 자는 출가해서 탁발을 해도 남보다 더 많은 음식과 의복과 와좌구, 필수품을 향유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었을 때는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해탈과 해탈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A5.31)라 합니다.
부자가 되려거든
한 때 TV광고 중에 “부~자 되세요. 꼬옥~이요”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만 하는 사회 분위기에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한 행위를 해야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복은 다름 아닌 공덕행입니다.
이전에 얼마나 베푸는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베푸는 삶을 살았을 때 도움을 받은 자들이 갚을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나 명예나 권력을 얻는 것도 이전에 베푸는 삶에 대한 과보입니다. 경에서는 번영의 수레바퀴를 굴렸다고 해서 “예전에 지은 공덕이다.”(A4.31)라 했습니다. 또 “예전에 지은 공덕을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곡식과 재물과 명예와 행복이 넘쳐난다.”(A4.31)라 했습니다.
공덕행은 인간을 차별합니다. 이전에 베품의 삶을 산 자는 수명, 용모, 행복, 명성, 권세에 있어서 베풀지 않은 삶을 산 자를 능가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출가자마저 탁발에 있어서 차별한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거든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용모를 얻으려거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명예와 권세를 얻은 자는 이전 생에 많이 베푼 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부자로 살고, 아름다운 용모와 명예와 권세를 바라거든 베푸는 삶, 공덕행을 지어야 함을 말합니다.
2017-08-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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