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이 치성하면 겁화(劫火)가, 살충제 계란 파동을 보고
우려가 현실로
계란 프라이를 하려 하는데 노른자가 맥없이 터집니다. 몹시 찜찜 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계란을 접할 때 늘 불안합니다. 과연 위생적인가 안전한가 혹시 약품에 오염되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입니다. 우려가 마침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연일 살충제 계란이 전파를 타고 있습니다.
인체에 치명중인 살충제 계란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개나 고양이 등에 기생하는 진드기를 없애는 ‘피프로닐’이라는 살충제가 계란에서 검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량으로 사육되는 산란 닭에 진드기를 없애기 위해 뿌려 준다고 하는데 계란으로 유입된 것입니다. 외국에서의 일인 줄 알았으나 이제까지 먹던 것에서 발견 되었다 하니 우리 몸이 얼마나 많이 오염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살충제계란 뉴스는 공포심을 유발합니다. 전면 출하중단에 전면 판매중단 조치 한 것입니다. 이전에도 살충제 계란이 판매 되었을 겁니다. 다만 모르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줄 모르고 사람들은 계란프라이를 해먹고, 계란을 삶아 먹고, 계란으로 만든 각종 먹거리를 먹어 왔습니다. 빵에도 계란이 들어가고 김밥에도 계란이 들어갑니다.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들
먹거리가 오염되면 인체도 오염됩니다. 인체가 오염되면 암과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하고 맙니다. 이런 이유로 살충제 계란 파동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종종 발생하는 조류독감바이러스와 구제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스나 메르스와 같은 독감이 유행할 때 마치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살충제계란, 조류독감, 구제역, 광우병, 사스, 메르스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들입니다. 모두 우리 몸을 오염 시키는 것들입니다. 몸이 오염되었을 때 집단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마치 역병이 도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보면 전쟁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오염된 음식물을 접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닭이나 돼지, 소 등 가축류는 공장식 축사에서 대량으로 사육됩니다. 사육과정을 보면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알고는 못 먹는다”일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맛있게 먹습니다. 만일 생산 과정을 TV로 낱낱이 보여 준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고기를 찾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성장위주의 사회이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오염된 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무심히 접하고 있는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역시 오염되었습니다. 자연속에서 사육한 것이 아니라 공장식 축사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먹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음식을 접하면 신체가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이름 모를 각종 질병에 걸립니다. 이대로 가면 집단으로 감염될지 모릅니다. 마치 조류독감에 감염된 닭을 살처분 하듯이, 감염된 지역을 금지구역으로 설정하여 죽게 할지 모릅니다.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욕망의 세계에서
먹거리가 오염되고 국토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수요를 들 수 있습니다. 좁은 국토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있다 보니 대량으로 먹거리를 공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탐욕입니다. 욕망으로 살아 가는 세상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TV에서는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방입니다.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욕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구분 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남녀가 구분 되어 있기 때문에 끊임 없이 짝을 이루려 합니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의 세계에서 인간은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 갑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그래서 끊임 없이 먹어야 하고, 끊임 없이 자손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개체수가 너무 많아 졌습니다. 이 많은 숫자를 먹여 살릴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공장에서 물건 찍듯이, 공장식 축사에서 고기가 대량 생산되게 되었습니다.
오욕과 오욕락
욕망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오욕(五慾)으로 살아 갑니다. 이때 오욕은 눈, 귀, 코, 혀, 몸으로 즐기는 삶을 말합니다. 먹거리가 대표적으로 오욕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대할 때 단지 혀로 맛 보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에 넘어 갈 때까지 오감이 총동원됩니다. 오감이 총동원 되는 것은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욕이 아닌 오욕락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이 충족되면 이번에는 보다 높은 욕망을 추구합니다. 재물욕, 명예욕, 권력욕 같은 것입니다. 이를 오욕락(五慾樂)으로 설명합니다. 세간적 욕망으로서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오욕과 오욕락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욕계를 살아 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또한 세상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삶의 바탕에는 욕망의 뿌리, 성냄의 뿌리, 어리석음의 뿌리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상이 오염되었을 때
욕계에서는 욕망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나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흐름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자들입니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누구나 욕망으로 살 때 욕망을 줄이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욕망으로 살아 갈 때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오염되면 신체 또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충제 계란이 출현한 것도 근원을 따지고 들어 가면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으로 살아 가는 욕계에서는 마음의 오염으로 인하여 신체도 오염되었고 그에 따라 자연도 오염되었습니다. 또한 사회도 오염되었습니다.
사회가 오염된 것은 사상이 오염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에 따른 것입니다. 법구경에서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Dhp.1)라 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오염되었을 때, 즉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찼을 때 반드시 고통이 따를 것이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상이 오염되었을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면
욕망의 세계에서는 욕망을 충족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종교도 욕망의 삶을 부추깁니다. 무엇보다 잘못된 견해, 즉 사견입니다. 그 중에서도 단멸론적 견해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고 ‘죽으면 끝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이런 견해를 가지면 한탕주의가 됩니다. 먹거리가 오염되어도 오로지 돈만 벌면 됩니다.
단멸론적 견해는 최악입니다.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진자라면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지만 허무주의에 입각한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들이 사회에 만연 했을 때 도덕적으로 금하는 어떤 일도 서슴 없이 저지를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에 대하여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산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24.49)라 묘사 했습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했습니다.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름을 말합니다. 그러나 물질 위주의 사회에서는 단멸론적 견해가 성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물론은 물질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유물론적 견해가 탄력을 받습니다. 내세와 윤회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오로지 살아 있는 지금 여기에서 삶이 중요합니다. 죽음 이후 삶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금 여기에서 즐기는 삶, 더 좋은 말로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욕과 오욕락에 바탕을 둔 행복을 말합니다.
오계를 어겨도 죄가 아니다?
초기경전에는 외도사상이 도처에 소개 되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견해의 모음(S24)’에 따르면 어느 외도사상이든지 “물질이 있을 때 물질에 집착하고 물질에 탐착하면”이라고 시작됩니다. 이는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외도사상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천오백년 전 부처님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사상입니다. 그런 것 중에 도덕부정론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업을 지음의 경(S24.50)’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이 있을 때 물질에 집잡하고 물질에 탐착하면, 이와 같이 ‘업을 짓거나 업을 짓게 만들어도, 도륙하거나 도륙하게 만들어도, 학대하거나 학대하게 만들어도, 슬픔을 주거나 슬픔을 주게 만들어도, 억압하거나 억압하도록 해도, 협박하거나 협박하도록 해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남의 집에 침입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강도질하고, 노상에서 강도질하고, 타인의 아내를 농락하고, 거짓말을 해도 악을 짖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땅의 생명체들을 면도날 테로 만든 수레바퀴로 조각내어 부수고, 한 덩어리로 만든다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악은 없으며,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다. 비록 갠지스 강의 남쪽에 가서 살해하거나 살해 하게 만들고, 도륙하거나 도륙하게 만들고,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 나는 악은 없고,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다. 비록 갠지스 강의 북쪽 언덕에 가서 보시하거나 보시하도록 해도, 제사하거나 제사하도록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공덕이 없고, 공덕의 과보도 없습니다. 베풀고, 수양하고, 자제하고, 진실을 말해도, 생겨나는 공덕이 없으며, 공덕의 과보도 없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SS24.50)
오계를 어겨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오계를 어겨도 어떤 과보도 받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이를 도덕부정론이라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물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오온을 물질로 보았을 때 ‘몸이 파괴 되어 죽으면 정신도 죽게 되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도덕적으로 금하는 일도 서슴없이 자행할 것입니다.
허무주의적 견해는 정신마저 물질로 봅니다. 정신은 물질에서 생겨난 것으로 물질이 사라지면 정신도 또한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는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어떤 과보도 받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사상의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 해외로 달아 나거나, 물건을 받고 대금 결재를 하지 않는 것도 도덕부정론에 해당될 것입니다. 불량식품을 만들어 파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탕주의나 황금만능주의 모두 유물론적 단멸론, 허무주의, 도덕부정론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행위에 대한 과보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사상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부처님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면 갈수록 사회가 혼탁해지는 것은 유물론적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라 보여집니다. 과학이 발달되면 될수록 유물론적 사조가 유행합니다.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사조 또한 과학적 유물론적 사조의 영향일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에 따르면 무작설(無作說)로 설명됩니다. 대표적으로 숙작인설, 존우화작설, 무인론을 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갖가지 사상이 있습니다. 어느 사상이든지 무작설입니다. 무작설(akiriya)이란 인간의 도덕적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 숙작인설(pubbekatahetūvāda)입니다.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 존우화작설(issaranimmāṇahetuvāda)입니다. “그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 무인론(ahetuavāda)입니다. 이 세상의 사상은 크게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새로 조사된 종교인구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불교의 두 배에 달하는 지배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 기독교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존우화작설입니다. 우리나라 종교인구를 보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약55% 가량 됩니다. 종교를 가지 않았을 경우 숙작인설과 무인론이기 쉽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자이기 쉽습니다.
업보를 믿는 자(kamavāda)
부처님당시나 지금이나 사조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숙작인설, 존우화작설, 무인론이라는 세 가지 사상의 사조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유지 되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무작설에 대하여 부처님은 스스로‘작론자(kiriya-vādīn)’라 했습니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교도들에게 “벗들이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괴로움을 경험할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습니다.” (S12.24)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업보를 믿는 자(kamavāda)’라 했습니다. 모든 행위, 즉 업은 좋건 나쁘건 그것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현세에 영향을 끼치거나 내세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현세의 결과는 과거 행위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숙작인설과 같이 모든 것을 전생의 원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예로 든다면 숙작인설에 따르면 모든 것이 전생의 원인으로 보아 ‘내탓입니다’라 하지만, 업보를 믿는 자는 연유가 있어서 생겨나는 것이라 하여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납니다.” (S12.24) 라 합니다.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적 사유방식입니다.
왜 막칼리 고쌀라가 최악인가?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을 설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업과 업보를 설했습니다. 전자가 출세간적 가르침이라면, 후자는 세간적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체계적이고 분석적입니다. 이처럼 분별해서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Vibhajjavādo)’라 했습니다. 이는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ṇava)”(M99)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작론자’이기도 합니다.
작론자로서 부처님은 무작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머리털로 만든옷으로 비유했습니다. 머리털로 옷을 만들었을 때 덥고, 추하고, 냄새가 나고 거친 감촉을 가지고 있습니다. 숙작인론, 존우화작론, 무인론과 같은 무작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펼친 자 중에서도 막칼리 고쌀라를 최악으로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A3.135)라 했습니다. 이렇게 비판한 것은 무인무연론에 따른 것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에 대하여 최악의 견해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그것을 부정한다.” (A3.135)
과거에 출현 하였던 부처님들도 업과 업의 과보를 설했습니다. 이는 과거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미래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할 것이고” (A3.135)라 했습니다. 당연히 현세의 부처님도 업과 업의 과보를 설합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출현해도 업과 업의 과보를 설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최악의 사견을 설하는 막칼리 고쌀라 같은 자는 현세는 물론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세에도 있을 것이라 시실입니다. 이런 예언은 들어 맞았습니다. 부처님 당시 막칼리고쌀라의 무인무연론, 즉 도덕부정론이 지금도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물에 걸렸을 때
부처님은 막칼리 고쌀라의 무인무연론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의 부정입니다. 막칼리 고쌀라 같은 자가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현시대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막칼리 고쌀라의 무인무연론에 따른 도덕부정론은 미래세에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Seyyathā'pi bhikkhave nadīmukhe khipaṃ oḍḍeyya bahunnaṃ macchānaṃ ahitāya dukkhāya anayāya vyasanāya. Evameva kho bhikkhave makkhalī moghapuriso manussakhipaṃ maññe loke uppanno bahunnaṃ sattānaṃ ahitāya dukkhāya anayāya vyasanāyā'ti.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강의 입구에 그물을 치면, 많은 물고기들이 불익을 당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재난을 당하고 괴멸을 당하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어리석은 자, 막칼리가 인간의 그물로 세상에 출현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익을 당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재난을 당하고 괴멸을 당한다.”(A3.135)
막칼리가 ‘인간의 그물(manussakhipaṃ)’ 을 친다고 했습니다. 무인무연론이라는 절대적 도덕부정론으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최악의 견해를 말합니다. 이런 그물에 걸려 들었을 때 사람들은 오랜 세월 불익고 고통을 겪을 것이라 했습니다. 막칼리의 말을 믿고 행위의 과보를 무시했을 때 현세뿐만 아니라 미래세도 재난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현세에서는 현자들로 비난 받아 괴로운 것이고, 미래세는 악행에 대한 과보로 악처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탐욕이 치성하면 겁화(劫火)가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마치 마치 오늘날 막행막식하는 세상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세상은 욕망을 충족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TV에서는 어느 채널이든지 먹방이고 각종 광고는 감각적 욕망을 부추기는 것들입니다.
욕망의 삶을 살았을 때 결국 파국을 맞이 할 것입니다. 그 전조가 조류독감, 구제역, 사스, 메르스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에 살충제 계란이 추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공포가 올지 모릅니다. 인류는 전쟁으로 망하기 보다 인간의 끊임 없는 탐욕으로 망할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인간의 탐욕이 치성하면 겁화(劫火)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불에 의해 세상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불에 의한 세상의 파괴는 앙굿따라니까야 ‘일곱 개의 태양의 경(A7.66)’에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청정도론 제13장 초월지에 따르면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했을 때 세상이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겁화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Bhūmito vuṭṭhitā yāva,
brahmalokā vidhāvati;
Acci accimato loke,
ḍayhamānamhi tejasā.
Koṭisatasahassekaṃ,
cakkavāḷaṃ vilīyati;
Kupitena yadā loko,
salilena vinassati.
Koṭisatasahassekaṃ,
cakkavāḷaṃ vikīrati;
Vāyodhātuppakopena,
yadā loko vinassati.
“The conflagration’s flame bursts up
Out of the ground and races higher
And higher, right to the Brahmá heaven,
When the world is burnt up by fire.
A whole world system measuring
One hundred thousand millions wide
Subsides, as with its furious waters
The flood dissolves the world beside.
One hundred thousand million leagues,
A whole world system’s broad extent
Is rent and scattered, when the world
Succumbs to the air element.” (Vism.11.102, 냐나몰리역)
“겁화가 세상을 태울 때 불꽃이
땅으로부터 솟아 범천을 태운다.
성난 물이 세상을 함몰할 때
백 천 구지나 되는 우주를 소멸시킨다.
성난 바람의 요소가 세상을 소멸할 때
백 천 구지나 되는 우주를 흩어버린다.” (Vism.11.102, 대림스님역)
인간의 탐욕은 끊임 없이 성장을 추구하는데 모든 자원이 바닥 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을 때 겁화가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전조가 각종 이름 모를 질병일 것입니다. 겁화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병겁(病劫)의 시대가 닥칠지 모릅니다.
욕망을 억제하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만이 해법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또 다른 말로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고와 고소멸에 대해서도 설했지만, 부처님은 세상사람들에게 업과 업보에 대해서도 설했습니다. 그런 부처님에 대하여 ‘업보를 믿는 자(kamavāda)’ ‘작론자(kiriya-vādīn)’라고 합니다.
2017-08-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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