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먹는다마는 , 세세생생 윤회하려거든 네 가지 식사를
오늘도 먹는다마는
오늘도 한끼 밥을 먹습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찾아 먹습니다. 그렇게 밥을 먹은 지 수 십 년 되었습니다. 앞으로 늙어 죽을 때 까지 밥숫가락 놓지 않을 겁니다.
먹어야 삽니다. 그렇다고 밥만 먹고 살 순 없습니다. 무능력한 남편을 둔 여인은 “야, 이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 했습니다. 매 끼니 마다 진수성찬을 차려 주지만 남자역할 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말이라 합니다.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네 가지 식사를 이야기합니다. 밥먹는 식사, 접촉의 식사, 의도의 식사, 분별의 식사를 말합니다. 이를 빠알리어로 ‘Cattāro āhārā’라 하는데 네 가지 자양분을 말합니다. 전재성님은 거칠거나 미세한 자양분(Kabaliṅkāro āhāro oḷāriko), 접촉의 자양분(sukhumo phasso āhāro), 의도의 자양분(manosañcetanā āhāro), 의식의 자양분(viññāṇaṃ āhāro)이라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네 가지 음식이라 하여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 감각접촉, 의도, 알음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야,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
네 가지 자양분 또는 네 가지 음식은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됩니다.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네 가지 음식도 하루라도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네 가지 음식을 먹음으로 인하여 삶을 유지할 수 있고 또한 세세생생 윤회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윤회하기를 원하는 자는 네 가지 식사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어느 여인이 남편에게 “야,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 했을 때 이 말은 네 가지 음식중에서 접촉의 자양분(sukhumo phasso āhāro)에 해당될 것입니다. 접촉이라는 음식을 먹어야만 삶이 유지 됨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접촉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꿰뚫음의 경’에서 부처님은 “접촉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이다.”(A6.63) 라 했습니다. 빠알리어 팟사(phassa)는 일반적으로 감각접촉을 의미합니다. 오감이 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감각접촉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다양성인가? 수행승들이여, 형상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다르고, 소리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다르고, 냄새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다르고, 맛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다르고, 감촉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다르고, 형상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다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다양성이다.”(A6.63)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오욕을 말합니다. 오욕에 따라 오욕락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반드시 과보를 가져 옵니다. 이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을 욕망하면서 그때그때 일치하는 공덕을 수반하거나 악덕을 수반하는 자신을 만들어낸다. (yaṃ kho bhikkhave kāmayamāno tajjaṃ tajjaṃ attabhāvaṃ abhinibbatteti puññabhāgiyaṃ vā apuññabhāgiyaṃ vā)” (A6.63) 라 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만들어낸다(attabhāvaṃ abhinibbatteti)’ 라는 말은 “공덕을 수반한다는 것은 천상의 감각적 쾌락을 서원하여 선행을 해서 천상계의 몸을 얻는 것을 말하고, 악덕을 수반한다는 것은 악행을 행해서 악취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Mrp.III.407) 라고 주석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도의 식사야말로
접촉의 식사를 하면 재생의 원인이 됩니다. 접촉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도의 식사야말로 가까운 원인이 됩니다. 부처님은 의도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위를 한다.(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A6.63) 라 했습니다.
의도(Cetanā)가 행위(kamma)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일반적으로 업(業)이라 합니다. 초불연에서는 “의도가 업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업은 반드시 과보를 수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Katamo ca bhikkhave kammānaṃ vipāko: tividhāhaṃ bhikkhave kammānaṃ vipākaṃ vadāmi: diṭṭhevā dhamme, u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Ayaṃ vuccati bhikkhave kammānaṃ vipāko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행위의 결과인가?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유형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나는 말한다. 현세에서 받거나 다음 생에 받거나 훨씬 먼 후생에 받는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행위의 결과이다.” (A6.63)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행위를 했다 하여 다 즉각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차를 두고 받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입니다. 조건이 성숙했을 때 과보를 받습니다. 다른 말로 인연이 되면 받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현세에서 받거나 다음 생에 받거나 훨씬 먼 후생에 받는다. (diṭṭhevā dhamme, upajje vā, apare vā pariyāye)”라고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금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다음 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내생의 과보에 대하여
이전에 지은 행위가 조건을 만났을 때 현생에 과보를 받을 수 있고, 현생을 지나쳐서 내생이나 내생 이후 언젠가 과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내생의 과보에 대하여 부처님은 육도로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은 육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행위의 다양성인가? 수행승들이여, 지옥의 경험을 받는 행위, 축생의 경험을 받는 행위, 아귀의 경험을 받는 행위, 인간의 경험을 받는 행위, 신들의 세계의 경험을 받는 행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행위의 다양성이다.”(A6.63)
부처님은 분명히 육도를 말씀했습니다. 회의론자가 “부처님은 육도를 말씀 하지 않고 오로지 현세에서 고와 고소멸에 대해서만 말씀 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고 무식을 폭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즉각적으로 과보를 받기도 하지만 시차를 두기도 합니다. 시차를 두고 과보 받는 것에 대하여 ‘업이 익는다’라 하여 깜마위빠까(kammavipka)라 합니다. 이를 한자어로 ‘업이숙(業異熟)’이라 합니다. 업이 달리 익음을 말합니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업이 익어 과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은 행위에 따라 지옥에도 태어나고 축생으로 태어나는 등 육도를 윤회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업이숙의 존재입니다. 과거에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지금 이자리에 있습니다. 이 생이 지나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지금 여기서 삶을 살고 있지만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무르 익었을 때 반드시 과보로 나타납니다. 과거에 선업을 지었다면 선업의 대한 과보가 기대됩니다. 반대로 악행을 저질렀다면 악행에 대한 과보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개유무시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
모든 행위는 모두 의도(cetanā)에 따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라 했을 때 의도와 행위(kamma)는 동의어입니다.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는 탐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앙굿따라니까야 ‘조건의 경’에서 탐진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상처가 없고 부패가 없고 바람과 열기에 해를 받지 않고 단단하고 견실하게 보존된 씨앗이 좋은 밭의 잘 경작된 토지에 파종되고 또한 하늘이 적절히 비를 내리면, 수행승들이여, 그 씨앗은 반드시 발아하고 줄기는 성장하여 증대하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탐욕에서 출현하고, 탐욕에서 기원하고, 탐욕에서 연원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있는데 그러한 행위는 현세에서나 다음 생에서나 더 먼 미래에서나 언제나 그 해당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곳에서 그 행위가 성숙하며, 그 행위가 성숙한 곳에서 행위의 과보가 거두어지게 되며,..”(A3.34)
부처님은 씨앗을 탐, 진, 치로 비유했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게 된 것은 탐, 진. 치가 먼 원인입니다. 가까운 원인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천수경 참회게를 보면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瞋癡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지난세월 제가지은 모든악업은 옛적부터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었사오니 제가이제 모든죄업 참회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신구의 삼업이 가까운 원인이고 탐진치가 먼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악업의 뿌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 진, 치를 씨앗에 비유했습니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비를 만나 싹이 나듯이, 탐진치에 따른 의도적인 행위가 익으면 육도윤회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행위가 성숙한 곳에서 행위의 과보가 거두어지게 된다.”(A3.34)라 했습니다.
의식의 자양분(viññāṇaṃ āhāro)
네 가지 식사 중에서 마지막 번째가 의식의 자양분(viññāṇaṃ āhāro)입니다. 의식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윈냐나(viññāṇa)를 번역한 것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알음알이로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viññāṇa가 ‘vi+ñāṇa’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vi) 안다(ñāṇa)’라는 뜻으로 ‘분별식’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알음알이로 번역한 듯 합니다. 그러나 네 가지 식사에서는 재생연결식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의 조건이고, 그것이 생겨날 때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S12.11)
여기서 의식의 자양분은 재생연결식을 뜻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은 그 동일한 의식과 생성되는 명색(名色)을 말합니다. 이 명색이 생겨나서 존재하면, 여섯 가지 감역이 있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조건의 경’에 따르면,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A3.76)라 했습니다. 의식을 종자라 합니다. 재생연결식이 종자입니다. 재생연결식은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일어납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재생하게 됩니다. 욕계의 존재라면 감각적 쾌락의 결과를낳는 업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하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A3.76) 라 합니다. 하층의 세계는 욕계를 말합니다. 색계는 중층의 세계이고, 무색계는 상층의 세계라 합니다. 의식이 확립된다는 것은 존재지속심, 즉 바왕가찌따를 말합니다. 존재지속심은 한존재의 일생의 마음으로서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과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모두 하나인 마음을 말합니다. 한번 개로 태어나면 개로서 일생일 살아야 하고,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 까지 사람의 형상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도중에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수다원 이상 성자가 되면 도중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종성(種姓: gotrabhū)이라 합니다. 중생의 계보에서 성자의 계보로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세세생생 윤회하려거든
사람들은 매일매일 식사합니다. 한끼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세 끼 먹습니다. 나이가 들어 꼬부랑 노인이 되어도 끼니는 거르지 않습니다.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생존하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만일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단식을 하여 곡기를 끊지 않는 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음식은 먹는 음식뿐만 아니라 접촉의 음식도 있고 의도의 음식도 있고 의식의 음식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음식은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세생생 윤회하기를 바라거든 네 가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적 삶입니다. 연기가 유전했을 때 윤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윤회하는 삶을 그치려거든 연기가 회전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연기의 유전문으로 살지만, 성자는 연기의 환멸문으로 살아갑니다. 욕망대로 살아간다면 연기가 회전되어 세세생생윤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 제자는 욕망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다양성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결과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소멸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A6.63)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사유의 탐욕이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네.
사람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사유의 탐욕이라,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데,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네.”(A6.63)
2017-09-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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