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라는 몽둥이로 분노를,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을 때
보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법우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사무실에 들르겠다고 합니다. 종종 찾아 와서 점심을 함께 하는 법우님은 13년 지기 입니다. 요즘은 생활설계사라 하는데 예전에는 보험설계사라 했습니다. 자동차보험에 대한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해마다 이맘 때쯤입니다.
자동차보험금을 납부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동차가 있는 한 자동차보험을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험료가 예년 보다 더 높게 나왔습니다. 거의 40% 가량 인상된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난 2월 접촉사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억울한 접촉사고였습니다.
순간적 부주의가 사고로 이어집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서 옆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큰 사고는 아닙니다. 문짝 부위가 약간 들어간 정도입니다. 낡은 차로서 먼지를 닦아 내면 그다지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라면 “됐습니다. 그냥 가시죠?”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편은 보험처리 했습니다. 작은 긁힘 아주 작은 들어감 정도로 문짝 두 개를 교체한 것입니다. 그 결과 보험료가 크게 오르게 되었습니다.
보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는데 상대편이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해서 매우 황당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험을 십년 부었는데 거의 20만원에 육박했습니다. 하나 들어 두면 좋다고 하여 십이삼만원대부터 시작 했습니다. 슬금슬금 매년 자동인상되더니 20만원 가까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암에 걸려야만 탈 수 있는 보험이었습니다. 암에 걸리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살면 그때 까지 매달 20만원 가까이 부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해약했습니다. 한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십년 동안 약 천오백만원에 해당되는 금액을 보험사에 바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업생(業生)이라
국가에서 시행하는 건강보험과 자동차보험 외에 다른 보험을 들지 않습니다. 보험에 드는 것 보다 차라리 정기적금 드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봅니다. 암에 걸려야만 탈 수 있는 보험, 사람이 죽어야만 탈 수 있는 것이 보험입니다.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나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보험을 들어 둡니다. 그래서일까 영화 ‘트루먼쇼(The Truman Show, 1988)’을 보면 보험설계사인 주인공이 고객과의 대화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을 강조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고장사이고 죽음장사라 볼 수 있습니다.
언제 사고가 날지 언제 병에 걸릴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업생(業生)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지은 행위가 조건을 만나 익으면 과보로 나타는 것입니다. 이런 때를 대비 하여 매달 일정액을 보험금으로 납부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험은 큰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이나 큰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사업장 등에서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생명을 담보로 일반인에게 까지 확장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나이 든 노인들을 상대로 요즘 케이블채널에서는 수 많은 보험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을 때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억울한 것은 신체적으로 상해를 입었을 때 일 것입니다. 요즘 여중생 폭행장면이 인터넷에 공개 되어 분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나이 어린 여중생들이 집단으로 친구를 폭행하는 장면입니다. 군대에서도 폭행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집단괴롭힘으로 인하여 자살사는 사례도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억울한 것은 죽음입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죽임을 당했다면 그것 보다 더 억울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살해 당한 것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술 취한 자의 차에 동승했는데 사고가 나서 한꺼번에 죽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 했을 때 수 백 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삶은 억울하고 분함의 연속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마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라며 분노하기도 합니다. 불운하다고도 볼 수 있고 재수가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총알을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운이 필연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필연으로 생각한다면 숙명론이 되고 우연으로 생각한다면 무인론이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신의 뜻이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해야 할 것도 없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는
부처님은 숙명론도 무인론도 존우론도 모두 부정했습니다. 모두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연기법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에 따르면 숙명론은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느낌은 모두 전생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도 전생탓이고, 괴로운 느낌도 전생탓입니다. 물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도 전생탓입니다. 일거수일투족 어느 것 하나 전생탓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숙명론에 빠지면 억울한 보험금도 전생탓이고, 억울한 사고도 전생탓이고, 억울한 죽음도 전생탓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전생의 행위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것이다.” (A3.61)라 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본능대로 사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필요가 없어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억울한 것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면 모두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것도 우연이고 살해 당하는 것도 우연이라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해야 할 것도 없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어서 오계를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서 정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수행도 없고 청정한 삶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어느 목사는 자신을 유혹하는 여인에게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 했습니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신을 말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신의 뜻이라 한다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절대자의 관점으로 돌렸을 때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A3.61)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렸을 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수행도 정진도 있을 수 없어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세 가지 이교도에 대하여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분석한 결과 “무작설로 드러난다” (A3.61)라고 했습니다. 숙명론, 무인론, 존우론은 모두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위배된 것으로 수행과 정진이 있을 수 없어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어서 무작설(akiriya)이라 합니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은 자신을 ‘작론자(kiriyavadin)’라 했습니다. 이는 여섯 가지 세계, 여섯 가지 접촉영역, 열 여덟 가지 정신적 사유, 네 가지 진리로 설명됩니다. 작론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진 연기법입니다. 연기의 가르침은 언제 어디에서나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 받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왜 점 보는가?
지난주 일요일 오후 조계사 인근 우정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한국불교 적폐청산을 위해 명진스님이 단식하고 있었던 현장입니다. 조계사 일주문 바로 못 미쳐 인도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들여다 보았습니다. 인도에는 자리가 깔려져 있습니다. 점보는 사람 자리입니다. 중년의 점보는 여인은 어느 젊은 아가씨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남자문제인 것 같습니다. 점보는 여인은 아가씨에게 남자가 떠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시원시원스럽게 마음에 쏙 들도록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단 한번도 점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의외로 점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도 점을 본다고 합니다. 점을 볼 것 같지 않은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도 점을 본다고 하니 국민들 대부분 점을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점을 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접근하기 쉽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절이나 교회, 성당에 가면 스님들이나 목사, 신부를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사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스님이나 성직자를 친견하는 것은 돈 있는 사람 몫인 것 같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법당에 가서 삼배하고 보시함에 돈을 넣고 나오는 것이 고작입니다.
점을 보면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해 준다고 합니다. 또한 잘 경청해 준다고 합니다. 잘 들어 주고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론까지 잘 내줍니다. 그것이 부적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점집은 누구든지 부담 없이 찾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사주관상 내지는 인생상담까지 해 줍니다. 성직자들이 해 주지 못하는 것을 길거리 점보는 사람들이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점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뿌리 깊은 샤머니즘 영향 탓이라 봅니다. 전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마음 바탕에는 샤머니즘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설령 고등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점을 본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불운한 것이 어떤 연유로 생겨난 것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당시나 지금이나 숙명론, 무인론, 존우론 이 세 가지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점을 본다는 것은 운명론 내지 숙명론에 대한 것이고, 절대자를 믿는 것은 존우론, 그리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것은 무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도 이 세 가지에 크게 의존하는 이유라 봅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에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불운한 것도 따져서 들어 가 보면 원인이 조건을 만나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불운한 사고를 당한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숙명적인 것도 아니고 절대자의 뜻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고는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점집을 찾고 신을 찾아 기도합니다.
팔정도에서 정사유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동시에 분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 ‘억울하다’와 ‘분하다’는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한 것은 다름 아닌 ‘성냄’이라는 것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삼독 중의 하나입니다. 성냄이라는 분노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부처님의 주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했을 때 성냄을 여의는 것이 자비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의 가르침은 팔정도에서 정사유로 실현 될 수 있습니다.
돈을 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거액입니다. 자신의 전재산을 다 바쳐 그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만 일이 잘못 되어 달아나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믿었던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척이라 합니다. 그러나 거액의 돈을 떼인 분노로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라 합니다. 화장실에 앉아 있어도 떼인 것을 생각하면 분노로 어찌 할 바 모른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불교교양대학에 들어 왔다고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문득문득 떠 오른 분한 마음에 지배당합니다. 그럴 때 마다 그 사람에 대한 증오는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특히 조용하고 고요한 곳에 있을 때 더욱 더 떠 올라 분노의 마음으로 괴로워합니다. 우다나에 따르면 메기야 존자가 그랬습니다.
메기야존자는 아름다운 망고숲에서 홀로 수행했습니다. 대중을 떠나 나홀로 수행하면 수행이 더 잘 될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데 홀로 앉아 있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또 올랐나 봅니다. 이에 메기야 존자는 “나는 믿음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는데, 이와 같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에 사로잡혀 있다니, 오! 놀라운 일이다. 오!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Ud.34, A9.3) 라 했습니다.
나홀로 수행 했을 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갓 입문한 초심자가 토굴에서 나홀로 수행하면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중들과 떨어져 먼 곳에서 그것도 아름다운 숲에서 수행했을 때 장애가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수행은 홀로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법문들을 때는 대중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 수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메기야는 대중을 떠나 먼 곳에서 나홀로 단독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기치 않는 장애가 생겼는데 그것은 팔정도 정사유에서 말하는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에 대한 것입니다.
대중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
메기야는 세 가지 사유로 인하여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조용한 곳에 홀로 앉아 있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유가 생겨났고, 과거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분노에 대한 사유가 일어났고, 억울하고 분함으로 인한 증오심으로 인한 폭력에 대한 사유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나홀로 떨어져 앉아 있을 때 수행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음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에 의한 해탈이 성숙되지 않은 메기야에게 다섯 가지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선한 벗을 사귀는 것, 학습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 소욕지족 등 열반에 도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정진하는 것, 생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모두 대중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초심자가 대중과 떨어져 있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에 지배 받기 쉬움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섯 가지 원리는 대중생활로 완성됩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원리를 대중들과 함께 닦고 난 다음 네 가지를 더 닦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네 가지야말로 나홀로 수행해도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네 가지 원리는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을 말합니다. 이 네 가지를 불교 사대수행이라 합니다. 처음부터 부정관 등 사대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생활을 통하여 선한 벗을 사귀고 학습계율을 지키는 등 다섯 가지 원리를 닦은 다음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 사대(四大)수행이 있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사대수행은 부정관(asubha bhāvetabba), 자애관(mettā bhāvetabba), 호흡관(ānāpānassati bhāvetabba), 무상관(aniccasaññā bhāvetabba) 입니다. 여기서 자애관은 팔정도의 정사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팔정도에서 정사유는 “수행승들이여, 1)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 2)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3)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S45.8) 라 했습니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분함으로 인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증오심이 일어납니다. 그 증오심이 강렬하면 죽이고 싶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분노를 여윈 사유(avyāpādasaṃkappo)와 폭력을 여읜 사유(avihiṃsāsaṅkappo)를 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분노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A9.3) 라고 했습니다.
분노가 치고 들어 올 때
문득문득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돈 떼 먹고 달아난 자 생각을 하면 죽이도록 밉습니다. 나를 버리고 떠난 자를 생각하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억울하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분심이 일어나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잠자리에 들거나 화장실에 앉아 있어도 문득문득 떠 오릅니다. 이럴 때 ‘분노가 치고 들어 온다’라고 표현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조용한 곳에 있을 때 더욱 더 치고 들어옵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분노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A9.3)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할까요?
자애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자애의 경(Sn1.8)’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자애의 경에서 가장 핵심은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stn147) 라는 문구일 것입니다. 또 하나 더 든다면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stn149) 가 될 것입니다. 분노의 마음을 자애의 마음으로 치환하면 정사유가 됩니다.
분노의 마음을 자애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애관 하나만 닦는 것이 아니라 탐욕의 제거를 위해 부정관을 닦아야 하고, 사유의 제거를 위해 호흡관찰을 해야 하고, ‘내가 있다’는 자만을 제거하기 위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아야 합니다. 수행을 함으로써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를 여의는 것입니다.
벼 수확하는 사람의 비유
분노에 매인 사유를 제거하기 위해 자애를 닦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우다나 주석을 보면 분노를 버리기 하여 ‘벼 수확하는 사람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UdA.236에 따르면, 분노를 버리기 위해서도 부처님은 벼를 수확하는 사람의 비유를 들고 있다. 낫을 들고 논에서 한쪽 끝에서부터 벼를 베고 있는데, 황소가 외양간을 부수고 나와 논으로 들어왔다. 그는 낫을 놓고 몽둥이를 들고 길을 따라서 황소를 몰아서 외양간에 가두어 제자리에 두고 다시 낫을 들고 벼를 벤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논이고, 수행자는 수확하는 자이고, 지혜는 낫이고, 수확하는 시기는 통찰하는 때이고, 몽둥이는 자애의 명상주제를 뜻한다. 외양간은 수호이고, 울타리를 부수고 황소가 나오는 것은 갑자기 성찰없이 방일하여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낫을 놓고 몽둥이를 들고 길을 따라서 황소를 몰아서 외양간에 가두어 제자리에 가두어 제자리에 두고 다시 낫을 들고 벼를 베는 것은 자애의 명상주제를 통해서 분노를 제압하고 다시 통찰수행한다는 뜻이다.”(UdA.236, 전재성님역)
분노에 대한 자애명상에 따르면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에 대하여 황소가 외양간 문을 부수고 밭으로 난입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것이 갑자기 치고 들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 분노를 다스리는 것에 대하여 황소를 외양간으로 다시 가두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자애라는 몽둥이로 분노를
지혜로운 자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분노의 사유와 폭력에 대한 사유가 일어나더라도 마치 몽둥이로 황소를 제자리로 돌려 보내듯이, 자애라는 몽둥이로 분노를 다스립니다. 팔정도 정사유는 억울함과 분노, 폭력, 욕망에 대한 사유를 여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비에 해당됩니다.
팔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의 영역이라 하여 혜온이라 합니다. 이를 둘로나누면 지혜와 자비가 됩니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지혜라 하고, 팔정도에서 정사유는 자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자비라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합니다.
“저열한 사유, 미세한 사유가
따라오며 정신을 혼란시킨다.
이러한 정신에 나타나는 사유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은 이리저리 달린다.
정신에 나타나는 사유들을 지각하고
정신과 새김을 갖추어
정신을 수호하는 깨달은 님은
정신을 따라오며 그것을 표류시키는
그 사유들을 남김없이 여읜다.”(Ud.34)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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