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멘토에서 힐링멘토로
힐링캠프 정혜사. 지난주 토요일 남양주에 있는 정혜사에 갔었습니다. 라마 글렌의 관정법회가 있던 날입니다. 정혜사를 소개하는 간판에 ‘힐링캠프’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행복캠프가 아니라 힐링캠프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말하는 시대에 왜 힐링캠프라 한 것일까요?
극과 극의 행복 스펙트럼
어떤 이는 헤어질 때 “행복하세요”라 합니다. 어느 스님은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면 답은 하지 않고 그 대신 “행복하세요. 나무아미타불”이라 합니다. 모든 댓글에 일률적으로 적용합니다. 사람들이 ‘행복, 행복’하는데 대체 그런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습니다. 마치 극좌에서부터 극우까지 이념 스펙트럼처럼, 감각적 욕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행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오욕락이기 쉽습니다. 한마디로 즐기는 삶입니다.
종로3가 환승역에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서울시 노인종합복지관협회에서 붙여 놓은 포스터 중에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즐거운 것이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수카(sukha)입니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영어로는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라 설명되어 있고, 한자어로는 ‘楽, 安楽, 幸福’으로 되어 있습니다.
즐거움과 관련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이 있습니다.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다’라는 뜻으로 대승기신론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고득락이야말로 불교가 지향하는 것을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자어 락(樂)자는 즐기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물론 행복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열반락’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알리어 수카나 한자어 락(樂)자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수카가 열반락이 되려면 자아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자아개념이 있는 상태에서 행복을 말한다면 즐기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예를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diṭṭhadhammanibbāna)
‘하느님의 그믈의 경’이라고 번역되는 브라흐마잘라경에는 62가지 사견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diṭṭhadhammanibbāna)이 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D1)라는 견해를 말합니다.
현법열반론에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아(自我)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아, 나는 행복하다.’라고 느꼈다면 현법열반론이 됩니다. 또 이성과 함께 있을 때 ‘아, 나는 행복해’라 한다면 이것도 현법열반론이 됩니다. 술을 마시고 얼큰히 취기가 돌았을 때 느끼는 행복감, 또는 약물을 하고 난 다음 황홀감 등도 역시 현법열반론입니다.
현법열반론을 뜻하는 빠알리어 ‘diṭṭhadhammanibbān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현세열반’이라 번역했고, 각묵스님은 ‘지금 여기에서 열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자어로는 ‘현법열반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이 오욕락을 열반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가 현법열반론이라는 것입니다.
현법열반론은 철저하게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입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짜열반, 유사열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정삼매도 현법열반론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각적 즐거움과는 비교 되지 않는 즐거움이 선정삼매라 합니다. 감각적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 즉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고 맙니다. 즐거움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 괴로운 것입니다. 또한 즐거운 시간이 지나면 더 괴롭습니다. 술을 마신 자가 술이 깨었을 때 고통스로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선정삼매에 들면 희열, 행복, 평온을 느끼기 때문에 오욕으로 느끼는 즐거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접촉 하는 것 등의 거친행복과 선정삼매의 미세하고 잔잔한 행복과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선정삼매의 행복을 맛본 자는 ‘바로 이것이 열반이다.’라 할 것입니다.
현법열반론은 자아에 기반한 열반론으로 사견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선정삼매의 즐거움도 자아에 기반한 것이라면 사견입니다. 누군가 선정삼매에 들어 ‘내가 우주와 합일 했다’라고 말한다면 사견이기 쉽습니다. 이와 같은 현법열반론에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기는 것 하나, 그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 나는 희열과 행복의 초선정 하나, 사유와 숙고를 뛰어 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의 2선정 하나, 희열이 사라진 뒤 행복만 남는 3선정 하나, 행복마저 사라져 지극히 평온한 4선정 하나, 이렇게 모두 다섯 가지 현법열반론이 있습니다.
자아에 집착되어 있는 한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아마 지금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릅니다. 지금 괴로운 자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적 행복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이 아니라 행복감일 뿐입니다.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일 뿐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적 행복에 목숨을 거는 듯합니다.
가짜열반이자 유사열반인 현법열반론은 선정삼매에서 오는 희열, 행복, 평온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를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고 나의 자아는 이것이다”라고 여기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에 느낌을 대입한다면 “느낌은 나의 것이고, 느낌은 나이고, 느낌은 나의 자아이고 나의 자아는 느낌이다”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아에 기반한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 합니다. 지금 행복한 자는 “행복은 나의 것이고, 행복은 나이고, 행복은 나의 자아이고 나의 자아는 행복이다”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에 기반한 행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소유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때뿐입니다.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얻었을 때 행복해 하지만 그때뿐입니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갈애가 일어납니다.
소형차를 가진 자는 중형차를 가지고 싶어하고, 중형차를 갖게 되면 대형차를 목표로 합니다. 작은 평수 아파트에서 사는 자는 큰 평수가 꿈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달성되고 나면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맛보지만 이후에는 덤덤해집니다. 또 다시 큰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은 것이 갈애입니다. 자아에 집착되어 있는 한 하늘에서 황금비가 쏟아 져도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이제 행복을 잘 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행복전도사의 죽음
행복전도사라 불리는 방송인이 자살한 바 있습니다. 방송에서 행복론을 열심히 말했지만 중병으로 인하여 남편과 함께 자살했습니다. 행복전도사가 자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속적인 행복론으로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요즘에는 힐링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론의 시대가 가고 힐링의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행복이라는 말 대신 힐링이라는 말이 폭 넓게 사용됩니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대유행입니다. 불교계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계신문에서는 힐링멘트로 하여 혜민스님, 정목스님, 법륜스님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혜민스님의 경우 ‘국민힐링멘토’라 부르기도 합니다. 방송에 출연한 것이 결정적 계기라 봅니다. 콘서트를 해도 힐링콘서트라 합니다. 절을 소개 할 때도 힐링캠프라 합니다. 행복의 시대에서 힐링의 시대로 바뀐 것입니다.
시대에 따라 행복관도 바뀝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던 시대에서는 행복이 최고의 키워드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행복이 충족되어서일까 더 이상 행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행복을 추구하지만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행복전도사가 자살한 사건도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힐링시대 다음은 무엇?
지금은 힐링전성시대입니다. 불과 몇 년 만에 놀라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생겨 난 것입니다. 행복의 시대에서는 행복멘토가 있었습니다. 행복전도사들이 행복에 대하여 강연을 하고 책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방송 등에서는 행복을 말하는 자들을 보기 힘듭니다. 그 대신 힐링멘토가 대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불교계에서는 혜민스님이 대표적입니다.
힐링멘토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 듯합니다. 몸과 마음이 지친 현대인들에게 힐링멘토의 다독거림은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힐링멘토는 이미 수천년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바로 힐링멘토입니다. 부처님이 지금 계시지 않지만 남겨 놓은 가르침을 접하면 훌륭한 힐링이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행복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유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말하는 시대를 지나 지금은 힐링시대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어떤 시대가 될까요? 어떤 이는 ‘콜링(Caling)’시대가 될 것이라 합니다. 콜링이라는 말은 소명 또는 영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힐링과 콜링을 합하여 ‘힐앤콜’이라 합니다. 콜링시대는 다름 아닌 종교의 시대를 말합니다. 다시 종교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찾는 시대가 될 것이라 합니다.
선정은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
사람들이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행복으로 만족하지 않자 이제 힐링을 이야기합니다. 좀 더 지나면 콜링을 이야기할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 진정한 힐링은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앗타까 시의 경(A11.16)’에 놀라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장자여, 여기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첫 번째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그는 그것에 입각해서 번뇌의 부숨을 성취합니다. 만약 번뇌의 부숨을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법에 대한 갈구와 법에 대한 환희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부수고 화생하여 거기서 열반에 들어 저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장자여, 세상에 존경받는 님,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이러한 하나의 원리를 올바로 선언했습니다. 수행승이 그 가운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면, 아직 해탈되지 못한 마음이 해탈되고, 아직 부서지지 않는 번뇌가 부서지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멍에로부터 안온이 성취됩니다.”(A11.16)
이 법문은 아난다존자가 베살리 앗타카 시의 장자에게 한 말입니다. 장자가 아난다에게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이 어떠한 것인데 위 없는 멍에로부터 안온을 성취할 수 있읍니까?’라고 물어 본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기서 ‘멍에로부터 안온’은 빠알리어로 ‘요가케마(yogakkhema)’라 합니다. 영어로는 ‘release from the attachments’라 하여 집착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하여 열반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아난다는 장자에게 네 가지 선정을 설명합니다. 초선에서부터 4선정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이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정이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이 경에서만 볼 수 있는 놀라운 말입니다. 선정에 들어 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 선정삼매에 따른 희열, 행복, 평온을 맛 본 것이라 합니다.
열한 개의 불사(不死)의 문
선정에 들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다음으로 사유와 숙고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은 의도된 것이고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전개 되는 선정 역시 만들어지고 의도 된 것입니다. 사무량심에 따른 선정도 마찬가지이고 무색계 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에 따르면 모두 11개의 선정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색계 네 가지 선정, 네 가지 무량한 마음(사무량심), 세 가지 무색계 선정입니다. 다만 무색계 선정에서 비상비비상처정은 빠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11가지 선정은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 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되고 마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11가지 선정이 의도된 것임을 알았을 때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경에서는 11개의 ‘불사의 문’으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가르침을 듣고 “존자여,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집에 열한 개의 문이 있는 집에 사는데, 그 집에 불이 붙었을 때 열한 개의 문 하나하나를 통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듯이, 존자여, 이와 같이 저는 열한 개의 불사의 문 가운데 하나하나의 불사의 문을 통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A11.16)라며 환희 합니다.
어떻게 힐링할 것인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라 합니다. 또 “행복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즐김과 행복은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즐거움과 행복이라는 말은 늘 함께 합니다. 고통의 반대말이 즐거움이고, 즐거운 것은 행복이라고 공식처럼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합니다.
살다 보면 반드시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이익과 불이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 세상 사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행복, 오로지 명예, 오로지 칭찬, 오로지 이익만 추구했을 때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갈애와 집착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갈애와 집착 때문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된 자가 아무리 행복을 추구해도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욕락을 즐기고 선정삼매를 즐겨 보지만 그때뿐입니다. 갈애와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행복이라는 말 대신 이제 ‘힐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힐링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갈 때 불탐, 부진, 불치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방법은 현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선정마저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라 했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 즐거움이나 행복에 대해서도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 이시대 힐링멘토가 해야 할 말 아닐까요?
20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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