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생각대로 안되네?” “어, 실제하고 다른데?” 왜 생각과 실제(實際)는 차이 날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어, 생각과는 다르네?”라는 말입니다. 실제하고는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안되었을 때 실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무엇이고 실제는 무엇일까요?
정신과전문의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
정신과전문의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를 유튜브에서 시청했습니다. 이삼년전 불교TV에서 방영되었던 것인데 유튜브에도 올려 놓은 것입니다.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1’을 감명깊게 본 바 있는데 이른바 시즌2라 볼 수 있는 ‘마음테라피2’ 역시 건질 것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생각’에 대한 것을 세 편 보았습니다. 이번에 유튜브로 다시 볼 때는 노트를 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동시에 보았는데 글을 쓰기 위해 메모해 둔 것입니다.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생각과 실제가 차이 나는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차이가 적게 나면 ‘신경증’이고 많이 나면 ‘정신병’이라는 것입니다. 생각과 실제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데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야”라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많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각은 착하고 건전한 것보다 대부분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과거로 가 있다면 후회하는 것들이 많고, 마음이 미래에 가 있다면 걱정하는 것들 것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떠 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 사는 사람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쓸데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현실처럼 받아 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까?”라며 물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후회와 회환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일어난 것처럼 자책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지난 일입니다. 이럴 때 “그때의 상황과 조건이 지금 여기에서 상황과 조건이 같습니까?”라며 물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자주 하게 되면 길이 난다고 합니다. 의처증이 있는 자가 아내를 의심할 때 처음에는 단순한 생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그 생각에 골똘하게 되었을 때, 콩알만한 의심도 생각이 거듭될수록 구름처럼 커집니다. 마치 작은 오솔길이 고속도로처럼 넓어 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고립 되어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실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실제와 차이가 크면
생각과 실제는 다른 것입니다. 실제(實際: Real)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있는 사실이나 현실 그대로의 또는 나타나거나 당하는 그대로의 상태나 형편”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실제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실제에 따라 돌아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과 실제가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실제와 차이가 크면 클수록 정신건강이 나쁘다고 합니다. 너무 차이가 난다면 과대망상증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누군가 나를 미행하는 것 같다’라든가, 또는 ‘누군가 나를 도청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열등감으로 인하여 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를 안다는 것은 세상돌아 가는 이치를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았을 때 “어, 생각대로 안되네.”라든가, “실제하고 차이가 나네.”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실제를 보지 못할까요?
사람들이 실제를 보지 못하는 이유
전현수 박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실제를 보지 못하는 데는 세 가지 장막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첫 번째는 개인적 장막이고, 두 번째는 문화적 장막, 그리고 세 번째는 인간존재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라 했습니다.
개인적 장막이란 마치 색깔이 있는 안경을 낀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 보았을 때 정확하게 볼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한이 맺힌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살아온 과거가 장막처럼 작용하여 사물을 왜곡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달라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문화가 서로 다른 것임에도 자신의 문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볼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 되는 것이 인간존재의 한계에 대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가진 인간은 몸과 마음이 가진 한계로 인하여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맑으면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겠지만 치매 등으로 뇌상태가 나빠졌을 때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부분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대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고 나의 자아는 이것이다”라고 여깁니다. 여기서 이것에 오온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느낌, 지각, 의도, 정신 등이 나의 것이고 나의 자아라고 여겼을 때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자들은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틀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이 장막으로 작용하여 실제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세 가지 장막은 걷어 버려야 합니다. 한이나 열등감 같은 개인적 장막, 서로 다른 가치관의 차이에 따른 문화적 장막, 그리고 오온에 집착된 구조적 장막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생각에 틀에 갇혀 지내는 자는 실제와는 멀어져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심지어 거꾸로 보기도 합니다.
열두 가지 전도(顚倒)가 있는데
자아에 집착된 자에게 있어서 인식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실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전도의 경(A4.49)’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4.49)라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본래 모든 현상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한 것으로, 즐거운 곳으로, 자아가 있는 것으로, 깨끗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하여 실제를 보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된 인식이라 했습습니다.
부처님은 네 가지 전도에 대하여 각각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 로 설명했습니다. 무상, 고, 무아, 부정에 세 가지 전도를 곱하면 모두 12가지 전도가 됩니다. 그 중에 ‘견해의 전도’를 예로 든다면 “어떤 사람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보고,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각의 전도이고, 그것으로 인해 공포가 생겨나면 그것은 마음의 전도이고, 이 귀신을 제거하기 위해 퇴마의식을 거행한다면 그것은 견해의 전도이다.”(Lba.II.208)라 했습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볼 줄 알면
사람들은 생각에 빠져 살아 갑니다. 하루라도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없습니다. 번뇌 다한 아라한도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생각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는 것입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을 항상 현재에 집중하고 있으면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음을 현재에 둔다는 것은 집중의 힘이 강함을 말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관찰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면 실제와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는 실제를 볼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일 것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깟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존재[有] 또는 비존재[無]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구속되어 있지만, 그는 접근, 집착, 그리고 마음의 독단, 주착, 경형에 접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는 독단을 취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한역에서는 ‘가전연경(迦旃延經)’이라 하여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유무중도의 가르침에 대한 것으로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한 대표적인 경입니다.
경에서는 “있는 그대로(yathābhūta)”관찰하라고 있습니다. 실제를 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를 보려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원주의는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논파되고, 반대로 허무주의는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라는 양극단은 없다고 했습니다.
단멸론(斷滅論)은 최악의 견해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일 것입니다. 영원주의라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득세하고 있는 유일신 종교가 될 것입니다. 허무주의라면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단멸론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불교인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단멸론(斷滅論)을 신봉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물질문명이 발달한 과학의 시대에 기승을 부립니다. 마치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중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을 보는 듯합니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은 단멸론적 허무주의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덕 있는 삶도 부정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천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S24.5)라는 정형문으로 나타납니다.
유물론은 오로지 지금 여기 현세만 있을 뿐 내생은 없다고 합니다. 업과 윤회를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공덕을 지을 필요도 없고 도덕적인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수행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천성이 착한 자는 단멸론적 사상을 가졌더라도 착하고 건전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착하고 건전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악하고 불건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아지따 께싸깜발린과 같은 외도 스승의 사상이 널리 퍼졌을 때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짐승과 같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단멸론은 최악의 견해입니다.
중도(中道)는 연기법이다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현상을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멈추어 관찰하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찰은 다름 아닌 ‘생성’과 ‘소멸’입니다. 조건에 따라 생성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연기법입니다. 그래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라는 양극단을 떠 중도를 설한다고 했습니다. 그 중도는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라며 이어지는 구절이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기 때문입니다.
실제에 근접한 사람들
이 세상을 살아 가는 데는 다섯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주먹의 힘, 돈의 힘, 권력의 힘, 가문의 힘, 지혜의 힘입니다. 그런데 주먹, 돈, 권력, 가문이라는 네 가지 힘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힘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지혜의 힘입니다. 그런 지혜는 다름 아닌 실제를 아는 힘입니다.
실제에 근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업적을 낸 사람들입니다. 생각과 실제와의 간격을 좁힌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 생각대로 안되네?”라든가, “어, 실제하고 다른데?”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만이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를 알면 강력한 힘이 생겨납니다. 이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알았을 때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실제와의 간격을 최대한 좁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스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현재에 두는 것입니다.
마음을 현재에 두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늘 깨어 있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마음을 현재에 집중하면 생각은 사라지고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올바로 알아차리고(sati: 正念) 분명하게 아는 것(sampajāna: 正知)을 말합니다. 실제를 아는 것입니다.
2017-11-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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