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떳떳한 삶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2. 10. 13:35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떳떳한 삶을

 

 

민나 도로보데스

 

교단에 서는 자를 교사 또는 교수라 합니다.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거나 학위를 받은 자들입니다. 선생 또는 스승이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르치는 대가로 월급을 받습니다. 교사나 교수들은 교육공무원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고용보장이 보장되고 신분이 보장되고, 무엇보다 퇴직후에는 연금이 보장됩니다. 부부교사라면 모든 것이 두 배이기 때문에 자산가가 부럽지 않을 정도라 합니다.

 

한번 교육공무원이 되면 고용보장, 신분보장, 연금보장이라는 삼중축복의 혜택을 받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친 대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과외로 생기는 것들, 이른바 촌지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일까 교육공무원이 된지 사오년 정도만 지나면 눈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처음 임용 받았을 때의 사명감은 온데간데 없고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방학이 되면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 교사들의 달라진 모습에 대하여 교육학자는 시원찮은 삶이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스승 스승()자가 붙은 직업이 있습니다. 대부분 어렵게 살아 가는 이 시대에 가장 큰 혜택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한번 든 사람이 되면 평생 동안 안락한 삶이 보장 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국민들이 떠 받치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두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혜택받기 때문입니다.

 

적게 내고 많이 타가는 것이 공무원연금입니다. 국민연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혜택입니다. 아이엠에프(IMF) 시절 나라가 부도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연금은 꼬박꼬박 지불 되었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늙어 죽을 때까지, 그것도 유산으로 상속되는 연금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 끼지 못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속된 말로 민나 도로보 데스(みんな泥棒です: 모두 도둑놈들이야!)”라 할 것입니다. 과연 이와 같은 파격적 혜택은 정당한 것인지,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떳떳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교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문구

 

내가 하는 일에 비하여 과도하게 가져 간다면 도둑놈소리 들을 것입니다. 견적을 낼 때도 도둑놈 소리 듣지 않도록 마진을 잘 조정해야 합니다.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는 자를 밥도둑이라 합니다. 수행자가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밥값 내 놓아라라 합니다. 교육공무원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교사들은 가르친 것을 대가로 받습니다. 때로 촌지를 받는 등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축복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교육공무원에 대하여 어느 교육학자는 교사가 염두에 둘 수 있을 만한 붓다의 가르침을 떠 올려 보기로 하자.”라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소개 했습니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향유하지 않으리.

바라문이여, 그것은 올바로 보는 님에게 옳지 않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깨달은 님들은 물리치네.

바라문이여, 원리가 있다면, 그것이 진솔한 삶이네.”(S7.8)

 

 

핵심내용은 나는 시를 읊은 대가를 향유하지 않는다입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는 모든 자에 해당될 것입니다. 특히 교육현장에 있는 교사들이 이 문구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라 했습니다.

 

만뜨라를 외운 대가로

 

상윳따니까야 악끼까의 경(S7.8)’에 따르면, 부처님이 제사를 지내는 바라문 집으로 탁발을 나갔습니다. 바라문은 까까머리를 한 수행자가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는 것에 대하여 무시하는 듯 했습니다. 바라문 수행자가 왔다면 먹을 것 등을 주었을 것입니다. 머리를 깍은 수행자는 천민 출신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제관으로서 바라문은 보고서도 본체만체 한 것입니다.

 

바라문은 세 가지 명지를 갖추고 훌륭한 가문에 속하며 많은 것을 배운 지혜와 지혜와 실천을 두루 갖춘 님이 나의 유미죽을 즐겨야 하리.” (S7.8)라며 무시했습니다. 태생적 우월감을 가진 바라문은 같은 바라문이 아니면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많은 격언을 암송하더라도

안에는 쓰레기로 더럽혀지고

위선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가문이 좋다고 성직자가 될 수 없네.

 

전생의 생존을 알고

천상과 지옥을 보는 성자는

태어남의 소멸을 성취하고

곧바른 앎을 완성했네.

 

이 세 가지의 명지로

세 가지 학문을 아는 바라문이 되니

지혜와 실천을 두루 갖춘 이가

나의 유미죽을 즐겨야 하리.”(S7.8)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제관으로서 제사용 만뜨라를 외었습니다. 만뜨라를 외운 대가로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재를 지내고 대가를 받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경전이나 만뜨라를 외우고 제사를 지내 준 대가를 향유하는 것에 대하여 쓰레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이라 했습니다.

 

이중적으로 사는 자들

 

부처님 당시 바라문 들은 사성계급의 최상층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 베다, 즉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를 공부했습니다. 이 세 가지 베다를 삼명(Tīhi vijjāhi)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곧바른 앎(abhiññā)’을 말씀했습니다. ,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인 ‘숙명통’, 천상과 지옥을 보며 중생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인 ‘천안통’, 그리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인 ‘누진통’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하여 삼명(tevijja)이라 합니다.

 

바라문에 말하는 삼명(tīhi vijjāhi)과 부처님이 말한 삼명(tevijja)은 다른 것입니다. 바라문들은 경전을 독송하고 주문을 외는 것으로 대가를 향유하지만, 곧바른 앎으로 청정한 삶을 사는 빅쿠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탁발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띠붓따까에서 나는 성직자에 관한 한, 단지 중얼거리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이교도가 아니라, 단지 법다운 증득으로 세 가지 명지의 소유자가 된다고 정의한다.”(It.98)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교만한 바라문을 시로써 교화했습니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은 태생적으로 우월했고 태생적 자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바라문은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 크게 깨달아 유미죽을 공양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치 만뜨라를 읊은 대가로 유미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나는 시를 읊은 대가를 향유 하지 않는다.’라 했습니다.

 

시를 읊은 대가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교육학자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이중적 삶이라 했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남에게 가르치는 그대로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면 이중적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만뜨라를 읊은 대가로 이익을 취하는 자들 역시 이중적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향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육자나 수행자가 가르쳐 준 것을 대가로 받았을 때 이중적 삶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깨달은 님들은 물리치네.”(S7.8)라 한 것입니다.

 

넌지시 암시하는 말로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쓴 것을 인터넷에 올려 공유합니다. 이런 행위는 대가나 이득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껏 보시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종종 감사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어떤 이는 글 읽은 대가로 선물을 보내 주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마치 글 쓴 것이 암시를 주는 것 같아 몹시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대가 없이 주는 것에 대해서는 수용합니다.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책입니다. 다음으로 마시는 차()입니다. 이 밖에도 음반등 크고 작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책에 대한 이야기, 차에 대한 이야기를 썼을 때 보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암시한 것 같습니다.

 

빅쿠가 탁발 나갔을 때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암시를 줍니다. 우회적으로 넌지시 말하는 것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필수품을 보시해야 겠다는 인식이 생기도록 하는 몸과 말의 어떤 동작이다.”(Vism.I.77)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어떤 종류의 먹을 것을 얻었습니까?”라 합니다. 일종의 신호입니다. 말을 빙빙돌려 말하는 것입니다. 빅쿠가 이렇게 말했을 때 눈치 빠른 신도는 가진 것을 주고 말 것입니다.

 

암시를 주면 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보시 받을 만한 사람이 있을 때 신심있는 선남자는 복덕을 쌓습니다”(Vism.1.68)라며 암시를 준다고 했습니다. 마치 구걸하는 자가 적선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걸인이 복을 지으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을 받았는데

 

아직까지 글을 써서 대가를 요구해 본적이 없습니다. 하루 일과 중에 거의 반을 글쓰기로 보내지만 돈을 바라고 쓰지 않습니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을 공유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최근에는 멀리 사는 어느 법우님이 건강식품을 보내 왔습니다. 산에서 채취한 것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법우님은 영지버섯과 오가피 등 약재 몇 가지를 택배로 보내 주었습니다. 이전에는 도토리부침가루를 보내 주었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준 것입니다. 만일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라면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행위는 불선(不善)한 것이라 합니다. 정치헌금이 대표적입니다. 정치인에게 헌금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특히 액수가 크면 클수록 바라는 것도 많게 됩니다. 헌금을 함으로 인하여 모종의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에 대하여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것이라 합니다. 주고 나서는 깨끗이 잊어 버려야 합니다.

 

시주(施主)에게 고개를

 

대가를 바라고 주는 모든 행위는 사실상 뇌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학부모가 해당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행위도 일종의 뇌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정권을 가진 자에게 선물하는 것도 뇌물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청정도론에서도 자애수행 최종 단계는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조어되지 않은 사람을 조어하고 보시는 모든 이로움을 성취시킨다. 보시와 상냥한 말씨를 통해서 [시주자는] 편안해지고 [시물을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Vism.9.39)라 했습니다. 누구든지 시주(施主)에게 고개 숙이지 않을 자 없습니다. 선물을 주는 행위 그 자체는 아름다운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전달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합니다. 무주상이란 티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짜장면 한그릇 샀을 때 무언가 대가를 바란다면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선물을 주었을 때 목적성을 띠었다면 불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주는 행위는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돈이 생겼는데

 

몇 일 전 한법우님이 찾아 왔습니다. 글로서 인연 있는 법우님입니다. 니까야강독모임도 함께 한 적이 있고 도이법사 위빠사나 강좌라든가, 테라와다법회 모임에서도 뵌 적이 있습니다. 법우님과 차를 마시고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법우님은 떠날 때 봉투를 하나 주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했습니다. 법우님은 늦게 나마 조의금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임에도 방문한 기회를 이용하여 전달한 것입니다.

 

이른바 공돈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공돈이 생길 때는 책을 샀습니다. 맛있는 것을 사먹는다든가 생활비에 보태 쓰는 것 보다 훨씬 더 갚진 일입니다. 그 동안 사고 싶었던 책을 과감하게 사는 것입니다. 글로서 인연 맺었다면 글로서 갚는 것입니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책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떳떳한 삶을

 

과도한 이익을 취하면 도둑놈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적정한 선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자에 대하여 밥도독이라 하고 수행자가 게으르면 밥값 내놓아라라 합니다. 하는 일에 비하여 과도한 혜택을 받는 자들 역시 도둑놈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정의롭게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정당하게 벌어서 베풀며 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팔뚝의 힘과 이마의 땀으로 이룬 재물은 정당한 것입니다. 불법과 탈법을 일삼아 투기로 재산을 형성했다면 부정한 것입니다. 불로소득으로 살아 간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아도 여법하게, 정의롭게 산다면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나 떳떳한 것입니다.

 

남 앞에 서 있는 자는 남에게도 떳떳해야 하고 자신에게도 떳떳해야 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남을 가르치는 그대로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Dhp.159)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르치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덕목이라 합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시를 읊어서 대가를 향유하지 않습니다. 정의롭게 사는 자들은 절대로 사라지지도 않고 파괴되지 않는 불멸의 재물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 계행, 양심, 수치심, 배움, 보시, 지혜라는 일곱 가지 재물입니다.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네,

 

여인이나 남자에게

이러한 재물이 있다면,

그는 빈궁하지 않은 자이고

그 생활은 곤궁하지 않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믿음과 계행,

청정한 신뢰와 진리에 대한 봄,

부처님 가르침에 새김을 확립한다네.(A7.6)

 


 

2017-12-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