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의지할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너무 공부를 안하는 것 같습니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교리는 물론
오온, 십이처, 십팔계와 같은 근본가르침도 모릅니다.
교리에 대하여 무지하다 보니
사견(邪見)에 쉽게 휩쓸립니다.
업과 업의 과보,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삿된 견해에 동조하기 일쑤입니다.
불자가 되는 것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시작됩니다.
특히 가르침과 관련하여 삼귀의 할 때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法歸依)”라 합니다.
가르침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 불자들에게
가르침을 부정하는 글이나 말이나 법문이 난무합니다.
초기경전은 후대에 편집된 것이고 가르침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같은 것이어서 방편이라 합니다.
방편은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법화경 ‘화택유(火宅喩)’를 들 수 있습니다.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구출하긴 하였지만
결국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 화택유와 같은 방편은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에 따라 ‘차제설법’과 ‘대기설법’을 했습니다.
어떤 부처님의 가르침도 진리 그 자체입니다.
가르침은 달 그 자체이지 손가락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르침 부정은 삼보에 대한 부정이고
스스로 불교인이 아님을 천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는 “붓다나 자신의 스승이 한 말일지라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론 논리라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수행승들이여, 관찰하는 수행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래가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식별하기 위해 여래를 잘 관찰해야 한다.”(M47)
이 구절은‘붓다의 말이라도 해도 믿어서는 안된다.’
라는 말의 근거가 되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부처님의 말이라 하여
믿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관찰’은 스승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이 맞는지 관찰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이라고 하여 다 믿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행위와 견주어 보면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위 문장을 엉뚱하게도
‘붓다의 말이라도 해도 믿어서는 안된다.’라는
말로 둔갑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삼보를 비난하는 구업짓습니다.
“부처님의 말이라고 하여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
테라와다 삼장법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또 하나의 근거로서
깔라마의 경의 일부 문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A3.65)
경에서 그 어디에도 ‘부처님의 말이라고 하여
믿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부정됩니다.
삼귀의에서 법귀의도 의미가 없습니다.
경에서 ‘성전의 권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이 말을 초기경전으로 오인하여 사용합니다.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가르침도 믿지 말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결국 부처님의 말이라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한번도 자신이 말한 것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말이라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라한다면,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어 ‘실(實)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실컷 장광설을 늘어 놓은 자가 말미에
‘나는 한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지할 것은 자신과 가르침뿐입니다.
자귀의(自歸依)하고 법귀의(法歸依) 해야 삼귀의가 성립합니다.
가르침 외에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인터넷 공간에는 수 많은 견해가 난무합니다.
머리깍고 가사입은 스님들 마저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합니다.
빠알리 삼장을 접하지 않은 자들은
방편설, 손가락설, 편집설 등으로 가르침을 훼손합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라고.
가르침을 훼손하는 자들의 말에 솔깃한다면
삼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외도(外道)가 되어 버립니다.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
요즘은 스승이 없는 시대입니다.
천만 불자가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스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승이 없는 시대에는 가르침이 스승입니다.
그것도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업과 윤회에 대한 가르침은 논파할 수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만산 스승이 없을 때는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 가르침이 스승입니다.
2018-03-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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