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조차 하찮게 여기는 비참한 노령의 그대
가족들조차 하찮게
최근 뉴스에서 노인학대에 대한 것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노인학대는 가족간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자식 등이 학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학대에 대하여 노인은 말 못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어느 노인은 인터뷰에서 “어떻게 자식을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문합니다.
나이가 들면 서러워집니다. 더구나 가족들에게 늙었다고 학대를 받으면 죽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자기의 가족들조차 하찮게 여김으로”(Vism.16.45)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족들조차 하찮게 여긴다는 것은 가족들에게 학대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노령을 극복한 쏘나 장로니
초기경전을 보면 늙읆과 병듦,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 했는데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출간된 테리가타(長老尼偈)에 따르면 쏘나 장로니의 오련게송을 보면 노령을 극복했습니다. 먼저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는 빠두뭇따라 부처님 당시에 항싸바띠 시에서 태어나 성년이 되어 어느 날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들으며 스승께서 한 수행녀를 ‘열심히 노력하는 님 가운데 제일’의 자리에 세우는 것을 보고 덕성을 닦아 자신도 그와 같은사람이 되고자 살아 있는 한 공덕을 쌓다가 거기서 죽어서 십만 겁 동안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하다가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싸밧티 시의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 성년이 되자 시집을 가서 열명의 자식을 얻어 ‘바후뿌띠까-많은 자식을 낳은 여인-라고 알려졌다.
그녀는 남편이 출가했고, 나이가 들었을 때, 아들과 딸들을 집에 두고,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분배한 후에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았는데, 그 아들과 딸들은 그녀를 며칠 동안만 봉양한 뒤에 멸시했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멸시받으며 집에서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수행녀들을 찾아가서 출가를 요청했다. 그녀를 수행녀들은 출가시켰다. 그녀는 구족계를 받고 ‘나는 나이가 들어 출가했으니,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수행녀들을 위하여 의무를 행하면서 ‘밤새도록 수행자의 삶을 닦아야지.’라고 생각하여 그녀는 낮은 건물의 기둥을 손으로 잡고 발걸음을 옮기며 수행자의 삶을 닦았고, 걸으면서도, 어두운 곳에서는 머리를 나무나 다른 것에 부딪칠까보아 나무에 손을 대며 걸으면서 수행자의 삶을 닦았다. 그래서 그녀의 용맹정진이 알려지게 되었다.
스승께서는 그녀의 궁극적인 앎이 성숙한 것을 알고 향실에 앉아서 광명을 비추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자신을 나투어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의 시를 읊었다. 그녀는 그 시의 가르침이 끝나자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Ap.569-572 참조) 그러자 세존께서는 수행녀들을 차례대로 특별한 자리에 세우면서 그녀를 ‘열심히 노력하는 님 가운데 제일’의 자리에 세웠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실천을 관찰하고 감흥어린 싯구로써 아래의 다섯 편의 시(Thig.102-106)를 읊었다.”(Thig.A.93, 쏘나 장로니 인연담)
테라가타는 2017년 2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박사의 번역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빠알리원문과 담마빨라 주석을 번역하여 출간된 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일입니다. 이에 편집인 중의 한사람으로 교정작업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인연담을 보니 ‘형실에 앉아서’라 되어 있습니다. 형실이 아니라 ‘향실’이 맞습니다. 교정에 참가한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쏘나 장로니의 인연담을 보면 노인문제가 오늘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을 열 명이나 둔 다복한 여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 모든 재산을 자식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잘못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버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와 같이 “자기의 가족들조차 하찮게 여김으로”(Vism.16.45)라는 구절을 연상케 합니다.
자식들에게 버림받았으나
쏘나 장로니는 노령의 나이에 출가했습니다. 출가해서 “수행녀들을 위하여 의무를 행하면서”라고 한 구절을 보아서 법랍이 낮아 새내기 수행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쏘나 장로니는 법구경 게송 115번을 읽고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법구경 115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테리가타 인연담과 내용이 똑같습니다.
쏘나 장로니는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수행녀로 살았습니다. 테리가타에는 쏘나 장로니의 오련시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쏘나]
“이러한 집적의 몸으로
열 명의 자식을 낳았으니,
그 후 허약하고 늙어서
나는 수행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존재의 다발과 감각의 영역과
인식의 세계에 대하여
그 가르침을 듣고
머리를 깍고 나는 출가했다.
그러한 내가 정학녀였을 때에
하늘눈이 청정해졌고,
예전에 내가 살았던
전생의 삶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마음을 통일하고 잘 정립하여
인상을 여읨을 닦고
나는 즉시의 해탈을 얻었으니,
집착 없이 적멸에 들었다.
실로 다섯 존재의 다발들은
완전히 알려졌고 뿌리째 뽑혔다.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Thig.102-106)
102번 게송을 보면, 집적된 몸으로 열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는 오온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몸을 물질로 보아 신체로서 열 명의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쏘나 장로니는 노령의 나이에 출가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비구니 교단에 들어가면 정학녀(sikkhamāna)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연담에 “수행녀들을 위하여 의무를 행하면서”라 한 것입니다.
매우 난해한 번역
104번 게송을 보면, “나는 즉시의 해탈을 얻었으니”라 했습니다. 이는 팔해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최상의 길과 더불어 즉시 생겨나는 해탈을 뜻합니다. 천안통이 생겨나서 전생의 삶에 대하여 알게 된 것 등이 큰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106번 게송을 보면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 (Dhī tavatthu jare jamme)”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매우 난해한 번역이라 했습니다. 기존 번역을 보면 리스 데이비스 여사는 ‘확고한 토대의 위의 승리자로서 부동자이니’라 했고, 마스나가 레이호는 ‘나는 견고한 몸에서 생겨난 자, 욕념이 없는 자이니’라 되어 있습니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나는 안정된 기반위에 생겨난 자로소 동요가 없으니”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번역은 ‘견고한 바탕이나 안정된 토대’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담마빨라의 읽기와 해석을 택해서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라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재성박사가 6세기 위대한 주석가 담마빨라의 견해를 이용하여 번역한 것은 경전적 근거를 한 것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늙음의 경(S48.41)’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입니다.
[세존]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려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
백 세를 살더라도 결국
죽음을 궁극적인 것으로 할 뿐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S48.41)
늙음과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는 시각능력, 청각능력 등 다섯 감각능력이 쇠퇴한 것에 따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러하다. 젊더라도 늙게 마련이고 건강하더라도 병들게 마련이고 오래 살더라도 죽게 마련이다.” (S48.41)라고 말씀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유산은?
쏘나 장로니는 노령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오온이 완전히 뿌리째 뽑혔음을 노래했습니다. 몸이 늙어감에 따라 오래 동안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 몸을 꾸짓고 그 몸을 초월한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쏘나 장로니 게송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년이 되었을 때 자식들에게 재산을 모두 다 물려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주어도 조금만 주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모든 재산을 기부하고 유산을 하나도 물려 주지 말자고 합니다. 못된 자식들이 유산을 탐하여 “우리 부모는 언제 죽을까?”라며 부모 죽을 날만 기다리는 기막힌 현실을 개탄한 것입니다.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 주기 보다 지혜를 물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곱살 가량의 라훌라가 “수행자여, 저에게 유산을 주십시오”라며 왕비가 시킨대로 졸졸 따라다니면서 요청했으나 사리뿟따를 시켜 출가시켜 버렸습니다. 부처님이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에게 준 유산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 이상 큰 유산은 없을 것입니다.
2018-06-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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