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답바가 명색이라고? 퓨어담마에 대하여
중유(中有)는 있을까? 중간존재라는 뜻의 중유를 부처님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49재나 천도재를 지내도 아무 소용없음을 말합니다. 다만 죽어서 아귀가 된 조상에 대해서는 제사를 지내도 좋다고 했습니다. 인간과 감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중유로 오해받기 쉬운 경이 있는데
중유개념과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합니다. 상윳따니까야 ‘짐의 경(S22.22)’에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꾼이라고 하는가? 사람을 짐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름, 이와 같은 성씨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짐꾼이라 한다.”(S22.22)라 했습니다. 여기서 여기서 짐꾼을 중유(antarabhava)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짐꾼은 빠알리어 바라하라(bhārahāra)를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burden-bearer; load-carrier’라 합니다. 초불연에서는 ‘짐을 나르는 사람’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러한 짐꾼에 대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짐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며
세상의 짐꾼은 사람이니
짐을 짊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며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안락이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
다른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
갈애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욕심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S22.22)
주석에서 전재성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짐꾼은 어떤 사람이고, 짐은 그의 살아 있는 정신-신체적인 복합체이고, 그것을 취하고 내려 놓는 것은 갈애의 작용과 소멸에서 비롯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후대에서는 이 짐의 경의 짐꾼에 대하여 중유개념으로 보았습니다. 부파불교시대에 독자부(puggalavāda)가 대표적입니다.
짐꾼은 인습적인 명칭에 불과
독자부에서는 경에서 이 게송을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전재성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개인의 존재를 증명으로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중간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보면 “그들이 변화를 통해 유지되다가 다시 태어나고 열반에 들기도 하는 것은 사람(puggala: 補特伽羅)이라고 주장한다.”라 했습니다. 여기서 뿍갈라는 사람은 사람인데 특별한 사람입니다. 무언가 고정불변의 영혼체 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고정불변의 영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행무상에도 어긋나고 조건발생이라는 연기의 법칙에도 어긋납니다. 만일 중간 세계가 있어서 이 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하는 중간존재(中有)가 있다면 삼계를 설하신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경을 근거로 들어 윤회를 설명하려는 이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고 최근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경에서 짐꾼으로 표현된 사람은 단지 명칭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해 주는 중유적 개념이 아니라 오온을 ‘나’라고 인습적으로 표현하듯이 오온을 지칭하는 명칭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니까야에서 오로지 이 하나의 경에서만 나오는 짐꾼이라는 말에 집착해서 윤회의 주체로 설명코져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한참 어긋나는 것입니다.
간답바를 말하는 퓨어담마(Puredhamma)
최근 한국테라와다불교 서울선원인 담마와나 개원식에 참석했습니다. 서울선원의 논사라 볼 수 있는 H법우님은 퓨어담마(Puredhamma)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퓨어담마사이트(https://puredhamma.net/new-revised-posts/parinibbana-of-waharaka-thero/ )보고서 현재 테라와다불교교단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테라와다 부동의 준거라 일컫는 청정도론도 오류가 많아서 가르침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청정도론 저자 붓다고사에 대하여 예류자도 되지 못한다고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H법우님이 청정도론을 부정하고 붓다고사를 비난하는 것은 퓨어담마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으로 봅니다. 퓨어담마를 설명하는 스리랑카 와하라까(Waharaka)장로에 따르면 마치 중유와 유사한 개념인 간답바(gandhabba) 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장로에 따르면 간답바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유와도 다른 것이라 합니다. 이간답바는 화생하지 않는 것으로 인간계와 축생계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합니다. 암수가 교미를 하여 입태 했을 때 들어가는 영혼체와 유사한 것으로 봅니다. 이와 같은 영혼체는 일생동안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영혼체에 대하여 마노마야까야(Manomaya Kaya)라 하는데 이는 인간계와 축생계를 일컫는 하계라는 뜻의 빠라로와(paralowa)에서‘정신으로 만들어진 몸’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짐의 경에서 짐꾼, 바라하라(bhārahāra)를 연상케 합니다.
정신의 몸(nāmakāya: 名身)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 마노마야까야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나옵니다. 디가니까야 ‘인연의 큰 경(D15)’에 따르면 명색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난다여, 어떠한 형태에 의해서 특징에 의해서 인상에 의해서 표시에 의해서 명[정신]의 몸(정신적인 몸)이 시설되는데, 그러한 형태나 특징이나 인상이나 표시가 없이도 색[물질]의 몸(물질적인 몸)에 명칭과의 접촉이 시설될 수 있는가?” (D15)라며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아난다는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정신의 몸(nāmakāya)이 시설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경에서 정신의 몸을 오해하면 독자부처럼 중유개념인 푹갈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의 몸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정신의 몸(nāmakāya: 名身)은 정신의 다발 곧, 느낌-지각-형성-의식을 뜻한다.”(Smv.1023)라 했습니다. 정신의 몸은 다름 아닌 오온 중에서 물질을 제외한 수, 상, 행, 식을 일컫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답바가 명색이라고?
십이연기에서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정신의 몸’과 ‘물질의 몸’ 두 가지 몸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신의 몸은 명색에서 명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름아닌 오온에서의 수, 상, 행, 식을 말합니다. 물질의 몸은 색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이 명색에 대하여 퓨어담마에서는 간답바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H법우님에 따르면 스리랑카 장로의 글을 인용하여 “Manomaya Kaya(간답바)는 Kammaja Kaya와 Cittaja Kaya와 Utuja Kaya로 이루어지는 Mental Body이며 이것이 바로 재생연결의 12연기에서 말하는 NamaRupa(명색)입니다.”라 했습니다. 간답바에 대하여 정신의 몸(Mental Body)이라 했는데 이 정신의 몸이 바로 명색이라 합니다. 그러나 모순입니다.
경에 따르면 정신의 정신적인 몸과 물질적인 몸은 오온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이를 합하여 전부 정신적 몸이라 한 것은 맞지 않습니다. 퓨어담마에서는 이 정신적인 몸이 인간계와 축생계에서 볼 수 있는 간답바라 합니다.
퓨어담마에 따르면 정신의 몸인 간답바가 없으면 윤회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경전에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해 주는 정신적인 몸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짐의 경’에서 짐꾼으로서 뿍갈라가 있고, ‘인연의 큰경’에서는 정신적인 몸과 육체적인 몸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스리랑카 와하라까 장로가 퓨어담마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중간적 존재로서 영체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명색을 잘못해석하여 가르침을 전혀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색에 대하여 우파니샤드 개념을 도입하여 이름-형태로 보는 것입니다. 명색을 이름형태로 보면 모든 것은 언어로 개념화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어적 개념만 타파하면 깨달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명색에 대하여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라고 명확하게 정의해 놓았습니다.
십악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되는 열 번째가 사견(邪見)을 갖는 것입니다. 사견은 빗나간 견해로서 현생뿐만 아니라 내생에도 고통과 불행을 가져 옵니다.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견을 따르는 자들도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도 불행과 고통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려면 경전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는 안목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수천년 전승되어온 주석을 참고하여 사견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2018-06-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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