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것일까?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세상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한다. 나이 든 노인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장기가 망가지고 병이 끊이지 않는 노인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일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고 늙음도 고통이고 병드는 것도 고통이고 죽는 것도 고통이라고 했는데 딱 들어 맞는 말이다.
이 세상에 재미가 없으면
재미가 없으면 세상 살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재미 있는 것을 찾는다. 부자는 부자나름대로 재미가 있고, 가난한 자 역시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그러나 예산의 한계가 없는 부자들이 추구하는 재미와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있는 가난한 자의 재미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같다.
재미가 없으면 찾아서라도 한다. 그래서 무료하거나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한다. 어쩌면 무료, 권태, 무기력이 가장 두려운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끊임 없이 재미를 찾아 헤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 과거생에도 그렇게 살았고 미래생에도 그렇게 살 것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세생생 윤회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하여“여기저기에 환희(tatra tatrābhinandinī)”하는 존재라고 했다.
환희는 재미와 같은 말이다. 여기저기에 환희한다는 말은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재미를 찾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갈애는 결국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집성제에 대하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라고 정의했다. 그런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유튜브채널 ‘5분 뚝딱 철학’에서
갈애에 묶여 있는 한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오온에 속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오온을 악마(mara)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몸, 느낌, 지각, 정신을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도 욕망을 나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자신의 것으로 본다면 본능적인 삶이 되기 쉽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물적인 삶이다. 허기지면 밥을 먹어야 하고 욕망이 일어나면 해결해야 하고 화가 나면 발산해야 한다. 감정에 충실하는 삶이 된다. 과연 이런 사람에게 자유의지는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행위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도 밥먹으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술이나 담배가 해로운 것을 알아 끊으려 했을 때 잘 끊어지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단번에 끊어 버려야 할 것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자유의지와 관련되 영상을 보았다. 구독에 인색하지만 주저없이 구독한 채널은 ‘5분 뚝딱 철학’이다. 실제로 보면 5분 이상이다. 약 15분에서 20분 가량된다. 마치 쓰레기더미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 하다. 이번에 주의깊게 본 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다.
두 명의 골초가 있는데
요즘 철학의 재미에 푹 빠졌다. 비록 유튜브에서 요약해 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것과 같다. 온갖 쓰레기가 난무하는 유튜브에서 보석같은 채널에서 본 것이다. 채널을 진행하는 김필영선생은 파워포인트 자료를 활용하여 요점정리를 해 준다. 김필영 선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금연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여기 두 명의 골초가 있다. 골초 민수는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끊지 못한다. 반면 골초 영희는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 끊어 버렸다. 이를 1차적 욕구와 2차적 욕구로 설명했다.
담배가 해로운 줄 알면서도 계속 피는 것은 1차적 욕구에 따른 것이다. 1차적 욕구에서는 담배를 피고싶다는 욕구와 끊고 싶다는 상반된 욕구가 공존한다. 담배를 피고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담배를 피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끊기를 바란다. 이는 ‘욕구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그래서 2차적 욕구라고 한다.
민수는 담배가 해로운 줄 알면서도 여전히 담배를 핀다.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1차적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영희는 습관을 끊어 버렸다. 2차적 욕구가 실현 된 것이다. 여기서 민수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민수는 담배피는 행위를 하고 있을 뿐 금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영희는 담배를 끊고 싶다는 2차적 욕구에 대한 행위를 했다. 영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차적 욕구와 2차적 욕구
동물들은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잔다. 오로지 인간만이 1차적 욕구에 대한 2차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만 행위에 따라 자유의지가 없음과 있음으로 판별된다. 1차적 욕구에서 멈추어 있다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고, 2차적 욕구를 실현한다면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오른손을 들지 왼손을 들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이런 행위가 자유의지에 해당되는 것일까? 행위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위의 자유와 자유의지는 다른 것이다. 김필영선생은 이를 ‘프렝크퍼트’가 말한 것으로 설명했다.
골초 민수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행위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담배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다. 민수가 담배를 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담배의 유혹에 또다시 굴복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민수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현하지 못한 꼴이 된 것이다. 민수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행위의 자유가 자유의지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본능적 욕구로 살아 가는 자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과 같다. 행위의 자유가 자유의지의 필요조건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왜 그럴까? 1차적 욕구는 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이 보기 때문이다. 일종의 결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차적 욕구는 다르다.
2차적 욕구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1차적 욕구가 2차적 욕구를 집어 삼켰을 때 자유의지는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2차적 욕구에 따라서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도 있고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계는 결정론적이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양립가능이론에 대한 프랭크퍼트의 설명이라고 한다.
다니엘 데닛의 기계적 결정론
또 하나의 자유의지론이 있다. 김필영선생은 최종적으로 ‘다니엘 데닛’이 말한것을 설명했다. 다니엘 데닛은 철학자이자 뇌과학자이자 인지과학자라고 했다. 다니엘 데닛의 이론을 보면 우리 인간은 로보트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있기 때문에 생체로보트라고 볼 수 있다.
다니엘 데닛의 결정론은은 철저하게 기계론적 결정론과 인과적 결정론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론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과는 다르다. 과거의 원인이 되어서 미래사건이 그 결과로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일종의 숙명론이나 운명론과는 다른 것이다.
다니엘 데닛이 생각하는 결정론의 핵심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다니엘 데닛은 “세계가 결정론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기계적 결정론에 따른 것이다.
다니엘 데닛은 인간은 단지 기계일 뿐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인간을 진화론적으로 본다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문화를 들고 있다.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정보를 뇌나 몸에 저장하지만,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몸 밖에 저장한다고 했다. 그것을 문화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어느 수학자가 한 말이 기억난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유전자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디엔에이(DNA)라는 생체유전자가 있고 밈(Meme)이라는 문화유전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니엘 데닛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수학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윤회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간난아기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했다.
김필영 선생에 따르면 문화는 일종의 외장하드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생존에 대한 정보를 몸으로 한정한다면 동물적 삶과 다름 없지만, 정보를 몸 밖에 저장했을 때 동물과 확연하게 차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만 산다면 오로지 자신의 몸안의 정보만을 이용하여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외장하드가 있다고 했다. 문화라고 하는 외장하드를 말한다. 어마어마한 정보가 축적 되어 있는데 잘 활용하면 미래를 예측하고 나쁜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측된 결과를 피해 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했다. 그래서 다니엘 데닛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기계”라고 했다.
왜 인간을 생체로보트라 하는가?
유튜브채널 ‘5분 뚝딱 철학’에서 김필영선생의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인간은 2차적 욕구에 따라서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도 있고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 다니엘 데닛의 기계론적 결정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체로보트와 다름 없다.
인간은 어쩌면 생체로보트일지 모른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등 욕망대로 산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의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행위를 의지라고 볼 수 없다. 진정한 의지는 본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본능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자유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능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음을 말한다. 알코올중독자는 1차적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알코올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에 술이 가는 것은 업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탐욕이나 성냄 등 온갖 불선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업력이 너무 강해서 뚫지 못하고 주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유행위는 있어도 자유의지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탐욕으로 분노로 미혹으로 사는 일반사람들은 사실상 생체로보트나 다름 없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감각적 즐거움만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재미를 찾아 끊임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무료함과 권태, 심심함을 견디지 못한다.
빈부귀천이나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재미를 추구한다. 더 이상 재미를 찾지 못했을 때 죽은 목숨과도 같다.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단지 숨만 쉬는 좀비와 같은 신세가 된다.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동물과도 다름없다. 재미만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면 생체로보트와 다름 없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졌을 때
생체로보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각적으로 재미 보려는 것에서 떠나야 한다. 다니엘 데닛이 말한 것처럼 문화라는 어마어마한 용량을 가진 외장하드를 이용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류가 축적한 보물이 가득하다. 그런 보물중의 하나가 부처님 가르침이다.
1차적 욕구로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는 자유의지는 없다. 단지 살아 있는 로보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 딸라뿟따 장로는 “남자들이나 여자들의 어떠한 행복이든 그대의 욕망이나 기호를 좇아서 누린다면, 마음이여, 그들은 무지한 자들, 악마의 사로잡힌 자들, 존재에 환희하는 자들, 그대의 노예들이다.”(Thag.1151)라고 했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악마(mara)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번뇌가 일어나는데, 번뇌 역시 악마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 눈과 귀 등으로 전개 되는 세상에 대하여 악마의 영역이라고 했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한 우리는 악마들이다. 눈과 귀 등 감각능력으로 전개 되는 세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악마의 영역에서 살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생체로보트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욕망을 극복 했을 때 더 이상 생체로보트가 아니다. 오온에 대하여 로보트로 보고, 꼭둑각시로 보고, 환영으로 본다면 더 이상 프로그램된 생체로보트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졌을 때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선법을 실천하라고 했고 늘 깨어 있으라고 했나 보다.
“이 환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이 재난은 타인이 만든 것도 아니니
원인을 연유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 버리네.
마치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져
흙의 자양분을 연유로 하고
습기를 조건으로 하여,
그 두 가지로 성장하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과
인식의 세계 또는 이 감각영역들은
원인을 연유하여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 버리네.”(S5.9)
2019-10-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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