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문화는 외장하드와 같은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0. 15. 16:23

 

문화는 외장하드와 같은 것

 

 

동물의 삶은 비참하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은 측은하다고 볼 수 있다야생에서 스스로 먹이를 구하며 생존하는 삶은 비참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기 때문이다.

 

종종 동물의 왕국을 본다. 요즘에는 케이블채널에서 자연다큐를 많이 방영하기 때문에 이곳저곳 채널에서 동물이 살아 가는 방식을 볼 수 있다. 동물이 사는 모습을 보면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본능적 욕구에 있어서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때 되면 먹고 졸리면 자는 등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동물과 동급이다.

 

동물의 삶이 측은하고 비참한 것이라면 인간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단지 생존하기 위하여 살고, 번식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라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어능력이다.

 

언어능력이 있다는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동물이 생존하기 위하여 온 몸으로 감지하지만 인간은 언어로 가능하다. 동물은 온 몸으로 정보를 알아 피하지만 인간은 언어나 문자로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동물은 감각으로 정보를 인식하지만 인간은 외적 정보로 인식한다. 언어 능력이 있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몸 밖에서 정보를 얻는다. 이러한 정보를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몸 밖에 외장하드가 있는 것과 같다.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렸을 때


컴퓨터에 외장하드가 있다. 가면 갈수록 용량이 늘어나서 컴퓨터 하드에 있는 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외장하드를 사용한다. 유에스비(USB)도 외하드라고 볼 수 있다. 외장하드를 사용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 가장 큰 이점은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 하드가 깨졌을 때 데이터를 복구하기 힘들다. 또 컴퓨터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걸렸을 때 모두 파괴된다. 랜섬바이러스 같은 것이다.

 

얼마 전에 랜섬 바이러스로 인하여 작업한 파일이 모두 못쓰게 되었다. 그것도 수년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웹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상실감은 덜 했다. 매일 쓴 글을 일단 컴퓨터 하드에 저장해 놓는다. 그리고 곧바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린다. 오늘날 웹은 일종의 외장하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고스란히 쓴 글이 살아 남았다.

 

랜섬바이러스에 걸리면 추억도 날아간다. 두 번째로 랜섬바이러스에 걸렸을 때 사진이 파괴되었다. 그것도 거의 십년 모아 놓은 것이다. 그중에는 가족사진도 있다. 다행이라면 글과 함께 웹에 올라간 사진은 살아 남았다. 또 수백기가에 달하는 외장하드에 보관 되어 있던 것은 살아 남았다.

 

외장하드 같은 책

 

요즘 사람들은 옛날과 달리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넘나들며 살아 간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이제 일상화 되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로 인하여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마치 암에 걸린 것처럼 재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한 보관수단을 찾는다. 그것은 씨디, 유에스비(USB), 외장하드 등 기록물 저장장치이다. 안전한 웹도 일종의 외장하드라고 볼 수 있다.

 

외장하드의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 책도 일종의 외장하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책을 쓰는 것일까? 그것은 생존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인류의 온갖 정보가 들어가 있는 책은 근본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 삶의 과정에서 겪은 처절한 고통을 책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법학, 경제학, 경영학, 각종 기술서적, 처세학, 심지어 종교경전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일이다. 감각적 능력에만 의존하는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온몸을 생존하기 위한 정보소스로 활용하는 동물과 달리 몸 밖에 살아 남기 위한 정보체계를 구축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책이다. 경전도 해당된다. 일종의 외장하드와 같다.

 

번뇌가 있는 인간은

 

인간만이 사유할 수 있다.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문자로 된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이는 다름 아닌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생존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결국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살고자 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또한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오로지 생존과 번식만이 있는 듯 보이는 동물의 세계는 괴로움이나 고통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태어남이 고통이고, 또한 병들고 늙어 죽는 것도 고통이긴 하지만 인간처럼 번뇌가 많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간만이 번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고대인도에서는 개처럼 소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물은 번뇌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번뇌가 있는 인간은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사유했다. 만약 개처럼 소처럼 감각적으로만 산다면 왜 사는지에 대하여 사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능에 의존하는 1차욕구를 넘어 자유의지를 실현하려는 2차욕구를 가지고 있다.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삶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이고 또한 영원히 죽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네 가지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일지 모른다. 그 문제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이 세계는 불안정하여 사라진다.”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세계는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라는 것이다. 셋째는 세계는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라는 것이다. 넷째는 이 세계는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네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키워드를 보면 불안정, 피난처 없음, 나의 것이 없음, 불만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본능적이고 감각적 욕망에 의존하는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늙어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세상 사는 사람들 방식으로 살아 갈 수 없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생, , , 사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살아 갈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 이 세계가 불안정하고 피난처가 없다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서 해법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에 실려 있는 출가이유를 보고서 출가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

 

부처님 가르침에 삶에 대한 해법이 있다. 누구나 고민하는 생, , , 사에 대한 답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사의 진리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불사가 되면 불생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한마디로 말하면 불사(不死: amata)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이다. 그때 브라흐마 사함빠띠는 불사의 문을 열어젖히소서!”(M26.34)라고 청원했다. 여기서 불사의 문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열반의 문인 고귀한 길을 말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들에게 불사의 문이 열렸다.”(M26.38)라고 말씀했다.

 

불사는 열반과 동의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사의 문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떤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불사(不死), 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불사란 어떠한 것이고 불사에 이르는 길은 어떠한 것입니까?”(S45.7)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불사라고 한다.”(S45.7)라고 말씀했다.

 

, , 치의 소멸이 불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불사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리고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이야말로 불사에 이르는 길이다.”(S45.7)라고 말씀했다. 불사에 이르는 길이 팔정도를 닦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팔정도를 닦으면 영원히 죽지 않음을 말한다.

 

불사(不死)의 기쁨을 노래한 테라가타

 

테라가타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된 제자들의 게송이 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불사에 대한 것도 다수 있다. 테라가타 서문에서는 송출자의 게송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보면 행위의 궁극을 성찰하는 님들이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불사(不死)의 경지를 통찰하고 촉지하여 그 의취를 선언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불사와 관련된 게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두려움을 아는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스승께서는 불사(不死)에 밝으시니,

두려움이 남아 있지 않은 곳으로

그 길을 따라서 수행승들은 나아간다.”(Thag.21, 니그로다)

 

지복을 구하는 자는 바로 이것을 행하여

지복을 얻고, 칭송을 얻고, 명성을 획득하니,

불사(不死)를 성취하기 위한

곧고 바른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이다.”(Thag.35, 싸만냐까니)

 

위대한 님으로부터 광대한 맛의 진리,

일체지자, 최승지자에 의해 설해진 진리를 들었으니,

나는 불사(不死)의 성취를 위한 길에 들어섰다.

그 님은 멍에로부터의 안온의 길에 아주 밝다.”(Thag.69, 찬나)

 

당신께서는 나에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곧바로 불사(不死)로 뛰어드는 길을!

갠지스 강의 흐름이 바다로 향하는 것을 알 듯,

실로 저는 지혜로써 알게 될 것입니다.”(Thag.168, 발리야)

 

참사람들을 섬기고

가르침을 반복해서 들으니,

듣고 나서 불사(不死)에 뛰어드는,

지름길로 들어섰다.”(Thag.179, 깐하딘나)

 

이치에 맞지 않는 청정을 찾아

숲속에서 화신(火神)을 섬겼다.

최상의 청정을 알지 못하고,

불사(不死)를 위한 고행을 닦았다.”(Thag.219, 앙가니까 바라드자와)

 

번뇌는 부서졌고 다시 태어남은 없다.

공양 받을 만한 거룩한 님으로

세 가지 명지를 갖추었으니,

불사(不死)를 보는 거룩한 님이다.”(Thag.296, 라훌라)

 

가르침들과 관련해서

불사(不死)를 간구하는 저를 도와서

친교사께서 원했던 대로,

제가 해야 할 것을 이루었습니다.”(Thag.330, 쑤마나)

 

공경받을 수 있는 거룩한 님으로

세 가지 명지를 갖추고 불사(不死)를 본다.

악마 나무찌의 마군을 물리치고

일체의 번뇌를 여의고 나는 지낸다.”(Thag.336, 밧다)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동물의 삶은 측은하다. 곤충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생존하기 위하여 먹어야 하고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피해야 한다. 그 와중에서 번식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몸으로 정보를 파악한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몸의 색깔을 주변환경에 맞게 바꾼다. 어떤 벌레는 나뭇가지 모양처럼 생겼다. 생존을 위하여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자신의 몸의 정보에 의지하여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동물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여 먹이가 되는 것으부터 피하고자 한다. 인간도 역시 시각, 청각, 후각 등 감각기관으로부터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언어능력이 있어서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다. 그 결과 몸 바깥에서 생존할 수 있는 정보를 가져 올 수 있다. 마치 몸 바깥에 외장하드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몸 바깥 외장하드는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같은 것이다. 문화 같은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에 저장 되어 있는 정보 역시 외장하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정보는 오픈되어 있고 또한 공유할 수 있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치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쓰레기와 같은 정보, 해로운 정보도 가득하기 때문이다.

 

외장하드도 외장하드 나름이다. 나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외장하드를 들라면 경전일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이야말로 나의 안전을 지켜 주는 외장하드와 같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광속으로 변한다고 해도 한번 발견된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불사의 문으로 들어 가게 해 준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불사의 문이라 볼 수 있다. 세계는 불안정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불사의 문으로 들어 가면 안전하다. 마치 소용돌이 치는 바다에서 안전한 섬으로 가는 것과 같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마치 동물이 살아 남기 위하여 몸으로 정보를 취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지각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전승된 가르침을 자신의 ()’으로 삼을 수 있다. 불사의 문으로 들어가면 안전하게 된다.

 

불사의 문은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다. 테라가타에서는 불사에 대하여 노래했다. 아라한이 된 장로들의 게송을 들어 보면 안전지대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런 불사는 어떤 경지일까?

 

불사가 되려면 나를 버려야 할 것이다. 자아관념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불사의 경지에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생멸을 관찰하여 그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았을 때 불사의 문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무아로 보았을 때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죽음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집착이 있다면 그 집착으로 인하여 윤회하게 될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오온의 죽음과 함께 진짜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죽음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아의 성자 아라한에게는 죽음이라는 말이 설정되지 않는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무아(無我)이다 보니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것이 된다.

 

가르침을 따르면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으로 불사의 문으로 들어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외장하드와도 같다.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 사람은 가도 문화는 전승되듯이, 마찬가지로 수행승이 열반에 들어도 가르침은 전승된다.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오늘날까지 쉼 없이 전승되어 온 것은 가르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문화가 외장하드와 같듯이, 가르침(Dhamma) 역시 외장하드와도 같다.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외장하드와도 같다.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

 

가르침과 가르침이 아닌 것은 양자가

동일한 과보를 갖지 않는다.

가르침이 아닌 것은 지옥으로 이끌게 하고

가르침은 하늘나라를 얻게 한다.”(Thag.304)

 

그러므로 바른 길로 잘 가신 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가르침에 의욕을 일으켜야 하니,

행복한 님, 최상의 님의 가르침에 입각한 제자들은

최상의 위없는 귀의처로 확고하게 향한다.”(Thag.305)

 


2109-10-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