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믿을 것이라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0. 19. 10:50

믿을 것이라고는

 

 

몸이 아프면 괴롭다. 누가 대신 아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몸이 아프면 천만금을 가졌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몸이 아파 죽을 병에 걸렸을 때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가 있다. 그것은 그가 삶의 과정에서 지었던 업이다. 그것이 선업일 수도 있고 불선업일 수도 있다.

 

오래 살다 보면 선업보다 불선업을 더 많이 지을 수가 있다. 감각이 요구하는 대로 본능대로 살았을 때를 말한다. 오래오래 살면 불선업도 점점 커 갈 것이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이제 그대야말로 낙엽과도 같다.

염라왕의 사자들이 그대 가까이에 있고

그대는 떠남의 문턱에 서 있으나,

그대에게는 노잣돈조차도 없구나.”(Dhp.235)

 

 

죽음에 이른 자를 낙엽에 비유했다. 마치 일본에서 은퇴한 단카이세대를 젖은 낙엽에 비유하는 것과 유사하다. 낙엽이란 식물에서 분리되어 땅위에 구르는 것을 말한다. 죽음에 이른 자에게 죽음의 사신이 가까이 있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죽음을 말한다. 야마의 부하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죽음이 다가왔음을 말한다. 그런데 그에게 노잣돈이 없다고 했다. 먼 길을 떠나는 자는 쌀과 같은 식량이 풍부해야 한다. 저 세상으로 가는 자에게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와 같은 노잣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노잣돈이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선업을 짓지 않은 것이다.

 

믿을 것은 선업공덕밖에 없다. 선업공덕은 반드시 지계와 보시만을 말하지 않는다. 수행공덕도 해당된다.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을 쌓아 놓아야 든든한 노자돈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과 담마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섬으로” (S22.43)하는 자귀의와 가르침을 섬으로하는 법귀의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섬()이라고 했을까?

 

부처님이 말하는 섬(dīpa)은 안전한 곳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난파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다. 그 윤회의 바다는 어떤 곳일까? 경에 따르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섬은 열반을 상징하는 피난처, 귀의처, 동굴, 피안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자신과 가르침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고 했다.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고 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가르침을 의지하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삼귀의 할 때 법귀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자신이 수호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신도 수호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나약한 자신이 수호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을 업그레이드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넘어선 것이다. 인간을 넘어서 인간이상이 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 수호자가 된다라고 하는 것은 길(magga)과 경지(phala)에 들어 선 자를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선 자가 되면 일곱생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의 단계에 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생겨난다.(Vism.22.5)라고 했다. 여기서 ‘혈통전환의 앎’을 ‘고뜨라부냐나(gotrabhuñāa)’라고 한다.

 

혈통전환이라는 것은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한번 혈통이 바뀌면 다시는 범부로 돌아갈 수 없다. 최대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끝나서 고의 소멸이 실현되는 것이다. 자신의 수호자가 된다는 것은 성자가 되는 것임을 말한다. 게송 네 번째 구절에서 얻기 어려운 수호자는 아라한을 말한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수호할 수 있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무거운 업을 짓지 않는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아무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안심이다. 난파된 배에서도 구제될 수 있다.

 

배가 난파되었을 때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울부짓지만, 가르침에 귀의한 사람들은 조용히 명상하듯이 죽음을 맞는다. 그 결과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참사람과 함께의 경’(S1.31)에 인연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평소에 선업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노잣돈이 풍부한 것이다.

 

종종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은 연민하며 그저 지나칠 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신도 불보살도 일으켜 주지 않는다. 땅바닥에 쓰러진자는 그 땅바닥을 딛고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불교인들이 삼보에 귀의하며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는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의 안전을 어느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몸이 아파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안전한 저 언덕으로 건너가야 한다. 결국 자신이 혼자 건너는 것이다. 다른 것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과 가르침뿐이다.

 

 

그대는 자신을 섬으로 만들어라.

서둘로 정진하여 현명한 님이 되라.

티끌을 날려버리고 허물을 여의면,

그대는 천상계의 고귀한 곳에 이르리.”(Dhp.236)

 

 

2019-10-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