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책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26. 15:25

 

 

 

책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 병란은 언제 끝날까? 코로나19가 세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방역을 잘 하여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 역병이 한풀 꺽이기는 했지만 언제 또다시 대유행 할지 모른다. 한번 바이러스가 생긴 이상 면역이 생기지 않으면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바이러스가 살고 있다. 몸을 숙주로 하여 살고 있는 바이러스는 우리 몸이 세계이고, 우리 몸이 우주인 것이다. 그런데 세력을 급격하게 확산했을 때 반세력이 형성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백신과 같은 항바이러스세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더 이상 확산되지 않는다.

 

 

 

 

 

 

 

집단감염 되어야 한다는데

 

 

 

최근 뉴스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19가 퇴치되려면 전국민의 70% 가량 집단감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가짜뉴스 같은 말이다. 그러나 학계의 권위자들이 말한 것이다. 국민들 대다수가 감염되어서 면역이 생겨야 바이러스대란이 막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집단감염론이 사실이라면 바이러스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마치 감기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약 80%사람들은 완치되기 때문이다. 다만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이나 나이가 들어 면역력이 약화된 사람들은 잘 낫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젊거나 건강한 사람들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감기가 걸리면 면역이 생긴다. 면역이 생기면 다시 걸리기 힘들다. 감기에 걸린다는 것은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일 것이다. 또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유아들에게 면역주사를 놓는 경우가 있다. 미리 항체를 투입하여 일어나는 것을 미리 제압코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몸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나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면역이 생겨야 억압할 수 있다. 퇴치는 불가능하다. 세력이 약화되어 있을 뿐이다. 면역이 약화되면 언제 또다시 세력이 강성해질지 알 수 없다. 면역강화를 위해서는 건강한 삶이 요청된다. 그런데 면역이라는 것이 반드시 육체적 면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면역이 생겼다.”라고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적 면역을 말한다. 어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당황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한번 면역이 생겨나면 다음에 똑 같은 상황이 발생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일종의 방어기제가 형성된 것이다.

 

 

 

방어기제는 무엇을 말할까?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잠재적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조절하거나 왜곡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이다라고 설명된다. 방어기제는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작동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는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는 수행으로 가능하다. 불교적 수행을 말한다. 평정과 관련된 말이 우뻭카이다. 수행과 관련해서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11번째 지혜에 해당되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는 범부가 올라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지혜를 말한다. 이 단계의 지혜 다음에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기 전단계의 지혜에 해당된다. 이를 빠알리어로 상카루뻭카냐나 (sakhārupekkhāñāa: 行舍智)라고 한다. 이 말은 현상을 뜻하는 상카라(sakhāra)와 평정을 뜻하는 우뻭카(upekkhā), 그리고 지혜를 뜻하는 냐나āa)가 결합된 복합어이다.

 

 

 

현상을 뜻하는 상카라는 여러가지 뜻이 있다. 형성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형성된 모든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제행무상이라고 하여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Sabbe sakhārā aniccā)”(Dhp.277)라고 했을 때도 사용된다.  

 

 

 

형성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무상하게 보아야 지혜가 생겨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7)라고 했다. 게송에서 키워드는 지혜(paññā), 괴로움(dukkha), 청정(visuddhi)이다.

 

 

 

법구경에 삼법인이 있다. 불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법의 도장이라는 뜻에서 세 가지 기준을 말하는데 그것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말한다. 그런데 삼법인에서는 공통적으로 지혜, 괴로움, 청정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체개고에 대해서는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Dhp.27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제법무아에 대해서는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Dhp.27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오온 밖에서 해법을 찾고자 한다면

 

 

 

삼법인은 불교의 도장과 같다. 도장을 찍어야 효력이 발생하는 공문서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삼법인에 괴로움이 들어간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다.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 (Sabbe sakhārā dukkha)”(Dhp.278)라고 했다. 회의론자들은 일체라는 말에 주목하여 왜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한다. 일체라는 말을 적용한다면 책상도 괴로워한다가 될 것이다. 이는 일체라는 말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는 십이처에 대한 것이다. 십이처는 오온을 떠나서 성립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고와 고소멸에 대하여 설한 것은 오온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오온을 떠나서 오온 밖에서 괴로움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성제, 팔정도, 연기와 같은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사성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성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라고 하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 이루어져 있다.

 

 

 

사성제는 공통적으로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사고와 팔고를 설했다. 그런데 고성제를 보면 결론적으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a)”(S56.11)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키워드는 빤쭈빠다나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한자어로 오취온(五取溫)’이라고 한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꽉 쥐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했을 때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자신의 것이 된다. 즐거워도 자신의 것이고 슬퍼도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런데 모든 현상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만날 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세상은 우리가 만든 세상이다. 그렇다고 삼라만상산천초목을 만든다는 말이 아니다. 눈이나 귀 등으로 인식했을 때 세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S35.23)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일체는 빠알리어로 삽바(sabba)를 말한다. 앞서 법구경 삼법인에서 언급된 일체(sabbe)와 같은 단어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는 우리 몸과 마음인 오온을 말한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나서 다른 것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찾지 않았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분석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사성제이고, 팔정도이고, 연기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법인에 일체개고가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 마부출신 찬나

 

 

 

어떤 이들은 삼법인 중에서 일체개고를 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과 자연 등 모든 현상을 보니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인정할 수 있지만 일체개고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 바깥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 마치 부처님 마부출신 찬나가 일체개고를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다.

 

 

 

찬나와 관련하여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나경(D16)에서는 찬나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전에 찬나를 범벌에 처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수행승 찬나에게 하느님의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D16.123)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처벌이란 무엇일까?

 

 

 

하느님의 처벌은 빠알리어로 브라흐마단다 (brahmadaṇḍa: 梵罰)’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요즘말로 왕따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도 말 걸지 않고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이다.

 

 

 

찬나는 부처님의 마부로서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왔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심지어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에게도 내가 누군데!”라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는 열등에 따른 자만일 것이다.

 

 

 

승가의 찬나의 행위는 화합을 해치는 것에 해당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무도 상대하지 말하는 범벌을 내렸다. 이는 율장에서 말하는 권리정지조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찬나에게 일체개고를 알려주지 않은 이유

 

 

 

찬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찬나는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찬나는 말이 통할 것 같은 아난다에게 찾아 갔다. 찾아가서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훈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교시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설법을 해주십시오.(S22.90)라며 간청했다. 이에 아난다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합니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S22.90)

 

 

 

 

 

아난다의 말을 보면 무상과 무아에 대한 것만 있다. 고에 대한 것이 없는 것이다. 아난다는 왜 삼법인 중에서 고만 빼고 알려 주었을까?

 

 

 

아난다가 찬나에게 고를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도 괴롭고 경지[]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Srp.II.181)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찬나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수해승에게 일체개고를 알려 주었을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비안된 수행승에게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알려 주었을 때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라고 하여 책상도 일체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서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일체개고라고 했을 때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확장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몸과 마음을 벗어난 것에서 해법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이라는 사성제를 설했다. 그런데 고와 고소멸은 철저하게  오온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몸과 마음을 벗어나 바깥으로 확장한다면 일체개고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체개고를 우주로 확장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나무도 괴로워한다가 되고, ‘바위도 괴로워한다가 되고, 심지어 공산품인 책상도 괴로워한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 오온을 떠났을 때 삼라만상과 산천초목도 괴로워한다가 될 것이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온으로 한정하면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는 가르침이 성립된다.

 

 

 

아난다는 찬나에게 맞춤설법을 했다. 이는 찬나의 수준에 맞춘 눈높이교육이라고볼 수 있다. 그래서 먼저 무상과 무아에 대한 설법을 했지만 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이다.

 

 

 

찬나의 독백

 

 

 

괴로움에 대하여 알려면 먼저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야 한다.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면 괴로움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고, 이어서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일아난다. 그런데 찬나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설명해 주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경에서 찬나의 독백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파괴, 사라짐, 소멸, 열반에 뛰어들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안주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대신에 동요와 집착이 생겨나 나의 마음은 퇴전하여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한다.(S22.90)

 

 

 

 

 

찬나의 독백은 자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찬나가 무상과 무아라는 말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심하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나는 누구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궁금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찬나도 그랬다.

 

 

 

연기적 성찰이 결여되었을 때

 

 

 

찬나는 아난다가 무상과 무아에 대한 법문을 해 주었지만 무상과 무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만일 모든 것이 무상하고 모든 것이 무아라면 지금 존재하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무아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서 먹고 마시고 말하는 누구냐는 것이다. 마치 요즘 유아론자가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며 물어보는 것과 같다.

 

 

 

유아론자들은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오는 우문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무상과 무아라는 말을 단지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 발생하는 오해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는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인 것에 대하여 연기적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물질을 생겨나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한 것이다.”(S22.18)라고 했다. 이는 색, , , , 식 오온이 무상, , 무아인 것으로 조건발생에 따른 것임을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조건발생으로 본다면 무상과 무아가 단독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연쇄반응을 일으키듯이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S22.15)라고 설한 것이다. 그럼에도 무상과 무아라는 단어에만 집착한다면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며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찬나는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라는 단어 자체에 집착한 것이다. 제법무아라고 했을 때 나는 없는 것이 되어야 함에도 분명히 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S22.90)라며 의심한 것이다. 이런 의심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조건들을 성찰하지 않고 통찰에 대한 명상을 했다.(Srp.II.181)라고 설명했다.

 

 

 

찬나는 연기적 성찰을 하지 않았다. 찬나는 조건발생하는 연기적 성찰없이 무상과 무아라는 단어에만 집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난다가 무아라고 했을 때 무아는 무엇인고?”라며 계속 생각한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나는 누구인가?”가 되어 혼란에 빠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조건발생하는 연기적 통찰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을 또 다른 말로 조건법이라고 한다. 이는 연기의 구조가 조건발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에서도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일어나고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건발생할 때 자아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조건에 따른 발생과 상속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아가 되는 것이다.

 

 

 

아난다는 연기적 지혜가 없는 찬나에게 일체개고에 대하여 설하지 않았다. 만일 고에 대하여 설했다면 책상도 괴로워한다.”라고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더 나아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로운 것이라면 틀림없이 도(magga)도 괴롭고 과(phala)도 괴롭다고 볼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도를 닦는 것도 괴롭고 도를 닦아 이룬 경지도 괴롭다면 굳이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찬나의 지혜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난다는 삼법인 중에서 고를 빼고 먼저 무상과 무아만을 설한 것이다.

 

 

 

무상과 무아만 말하고 고를 말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에 대해 설했다. 이는 부처님의 관심사가 오온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온을 벗어나 바깥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찾고자 했다면 일체개고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상과 무아만 말하면 되었지 고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조건발생하는 연기를 통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설령 연기를 적용했다고 하더라도 상호의존적 연기만 적용한다면 이 세상을 법계연기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계연기에서 일체개고라는 말은 어색하다. 마치 책상도 괴로워한다라는 말과 같다. 모든 것을 상호의존적 연기로 본다면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며 유아론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란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함께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조건발생적 연기를 설했다.

 

 

 

연기에 대하여 단지 상호의존적 연기로 보면 법계연기가 되어 우주적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연기를 우주로 확장하지 않았다. 우리 몸과 마음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설했다. 이렇게 해야 삼법인이 성립된다. 만일 연기를 우주로 확대한다면 일체개고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상과 무아만 말하면 되었지 고는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불교는 괴로움을 해결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삼법인에 일체개고가 들어가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는 사성제의 구조로 알 수 있다. 사성제는 고와 고소멸이라는 이지연기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기가 12가지 고리로 확장된 것이 십이연기이다. 십이연기는 오온에 대한 것으로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연기적 흐름에 대한 것이다. 연기적 흐름에 자아가 있을 수 없다. 모두 조건 발생이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이런 십이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 그리고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연기의 가르침은 결국 고와 고소멸에 대한 것이다. 무상과 무아만 말하고 고를 말하지 않는다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사성제는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만약 행복에 대해서 설했다면 즐거움의 진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연기가 회전하면 결국 노병사가 되어 절망에 이르기 때문에 존재자체를 괴로움으로 본 것이다. 이런 괴로움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괴로움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의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세 가지 괴로움이다.”(S38.14, S45.165)

 

 

 

 

 

괴로움에는 육체적 괴로움도 있고 정신적 괴로움도 있다. 이런 고통의 괴로움은 괴로움 그 자체라 하여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주석을 보면 이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워하는 사람이나 좋지 않은 조건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나 좋은 조건과 이별하고 버리는 것을 얻지 못하고 슬퍼하고 비탄에 잠기고 곤궁에 처하는 삶의 일반적인 모든 형태의 정신-신체적 괴로움은 고고성에 속한다.”(상윳따4, 712번 각주)라고 했다. 이는 초전륜경에서 고성제에 해당되는 팔고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괴로움에는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각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과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이라고 한다.

 

 

 

경에서는 세 가지 괴로움의 특성에 대하여 고고성, 행고성, 괴고성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괴로움의 자체와 괴로움의 형성, 괴로움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순서를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는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괴로움의 심오함의 의미의 순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다.

 

 

 

괴고성은 변화함에 따라 발생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하여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괴로움’을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즐거운 느낌은 괴멸에 의해서 고통을 야기하는 까닭에 변화의 괴로움이라고 한다.”(Vism.16.35)라고 했다.

 

 

 

행고성은 형성된 것의 괴로움을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는 평정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의 형성들은 생멸에 핍박을 받기 때문에 형성의 괴로움이라고 한다.”(Vism.16.35)라고 했다.  

 

 

 

행고성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접협회본 주석을 보면 행고성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측면으로 모든 조건지어져서 형성된 것의 괴로움을 나타낸 것이다.”(상윳따4, 712번 각주)라고 설명했다. 이런 행고성에 대하여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괴로움을 말한다.”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세 가지 괴로움의 특징이 있는 것임을 알았다. 이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은 행고성이다. 이는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7)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지혜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괴로움일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를 통찰할 수 있는 통찰지(paññā)를 가진 자가 행고성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통찰지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다름아닌 아라한일 것이다.

 

 

 

아라한은 조건지어져 형성된 세계 자체가 괴로움임을 아는 자일 것이다. 이는 책상도 괴로워한다.”라고 지혜없는 자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Dhp.277)라고 지혜로 아는자, 그리고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 (Dhp.279)라고 지혜로 아는 자가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Dhp.278)라고 지혜로 아는 자가 행고성을 아는 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출가는 아무나 하나

 

 

 

요즘 약국 앞에 줄이 서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생명과도 같은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긴 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면면을 보니 노인들이 많다. 저항력이 약하고 기저질환이 있는 노인에게 코로나19가 침투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사망률은 높지 않다. 50대는 1738명중에 10명으로 0.58%이고, 40대는 1252명 중에 1명으로 0.08%이고, 30대는 955명 중에 1명으로 0.1%이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감염되고 나면 면역이 생겨서 다시는 안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코로나19는 독한 감기에 걸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병이 나서 누워 있으면 괴로운 일이다. 고통 그 자체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괴로움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괴로움도 있다는 것은 다 아는 것이다. 그러너 더욱더 심오하고 미묘한 고통이 있다. 그것은 형성의 괴로움이다.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것도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따까에는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시오.(JA.IV.122)라고 했다.

 

 

 

출가는 왜 하는 것일까? 도피성 출가도 있고 생계형 출가도 있을 것이다. 이득과 명례와 칭송을 위한 출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불만족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랏타빨라의 경’(M82)이 있다. 랏타빨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네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로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라고 했고, 둘째로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라고 했고, 세번째로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라고 했고, 네번째로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M82)라고 했다. 이런 출가이유가 있기 때문에 머리가 칠흑같이 젊은 시절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출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에 대한 자각을 했을 때 출가할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먼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부터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의 경우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 때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출가를 결행하는 것이다. 출가하기 이전에 이미 무상, , 무아에 대한 통찰이 생긴 것을 말한다. 그래서 출가를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라며 출가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출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해법은 우리 몸과 마음에

 

 

 

출가는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야 마음이 생길 것이다.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면 괴로움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고, 이어서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연기적으로 통찰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단지 무상, , 무아라는 단어에만 집착한다면 고가 왜 들어 갔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연기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음을 말한다.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연기를 이해하면 고와 무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연기를 이해하면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든가, “책상도 괴로워합니까?”라는 질문같지 않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 바깥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며 마냥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오온과 십이처와 같이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것이다. 이를 일체라고 했다.

 

 

 

일체는 저 먼 우주에 도달해야 있는 것은 아니다. 오척 단신 우리 몸과 마음안에 해법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는 우주가 아니라 오온과 십이처이다.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말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맬 것이다.”(S35.23)

 

 

 

 

 

2020-03-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