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훔쳐보는 것도 죄가 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28. 08:54

 

훔쳐보는 것도 죄가 될까?

 

 

불교에 오계가 있다. 불투도에 대한 것을 보면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키워드는 주지 않는 것, 삼가하는 것, 그리고 학습계율이다. 불투도계라 하여 단지 도둑질하지 말라.”라고 명령조로 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불투도계는 정언명령이 아니라 학습계율이다. 어기면 참회하여 다시 받아 지녀서 평생에 걸쳐 단계적으로 완성하는 계율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도둑질하지 말라!”가 아니라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삼가하는 학습계율을 지킨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오뉴월 산에 들에 가다 보면 고추농사한 것을 볼 수 있다. 풋고추를 보았을 때 별다른 생각없이 몇 개 딴 적이 있다. 남들이 그렇게 하길래 해 본 것이다. 나중에는 당연시되어 탐스러운 고추를 보았을 때 아무 생각없이 따게 되었다. 어느 날 주인이 거 따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비로소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언젠가 법당 대청소가 있었다. 오래된 창고가 있었는데 쓰지 않은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중에는 덧신도 있었다. 순간적으로 가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한개쯤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법당에서 사용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당 바닥이 차가워서 필요했는데 마침 덧신을 보자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가방에 넣어 차에까지 가지고 왔다. 그러다 갑자기 대체 내가 뭔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며 후회의 마음이 일어났다.

 

법당물건을 가져간 것은 분명히 물건을 훔친 것에 해당된다. 주지 않은 것을 가져 간 것이다. 그것도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이, 계를 지킨다는 사람이 훔치다니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법당용이라 하여 자신을 합리화하여 가지고 나온 것이는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도둑질한 것임에 틀림없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불자라 하여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순간적 탐욕으로 인하여 도둑질 하고 만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대로 있을 수 없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자 제자리에 가져다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지만 양심만은 속일 수 없었다.

 

고추따먹기와 덧신가지기는 도둑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지 않은 것을 가져 간 것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슬쩍 가져 가는 행위가 도둑질인 것이다. 반대로 주어진 것이라면 도둑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달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암시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도둑질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훔쳐보기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훔쳐보기도 도둑질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도둑질에 해당될 것이다. 블로그 댓글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재수할 때에 오다가다 스치는 여성들에 대해서 치솟는 욕정은 교과공부와 참선공부에 방해가 되었다. 분석을 해보았다. 결혼하지도 않은 저 여인을 대상으로 내 정욕대로 성적욕구를 푼다면 과연 옳은 가? 저 여인은 나로 인해 불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도 결코 행복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실행은 안했을 지라도 생각만으로라도 음심을 품은 것이 부끄럽고 그 여인에게 죄스러웠다. 그렇다면 마음에 거리낄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저여인이 행복해지도록 빌어주자. 마음이 끌리는 여인을 보면 정욕을 풀고 싶다는 마음을 접고 ‘부디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해지세요’라고 한번 두 번 기도를 해주다 보니 내 마음이 점점 떳떳해지고 평안하고 은은한 기운이 유지되면서 교과공부와 참선공부에 밑받침이 되었다.”(B법우님)

 

 

종종 좋은 글을 주시는 B법우님이 남겨 주신 글이다. 법우님은 훔쳐보기 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성찰하여 수행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글을 보면 훔쳐보기 한 것을 넘어서 욕정의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고 한다. 훔쳐 보는 것은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도둑질에 해당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간음까지 한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서 마음속으로 음행한 것이다. 매혹적인 여인을 보고서 불투도계와 불사음계 두 가지를 동시에 어긴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도 이런 행위에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출세간적으로 본다면 훔쳐보는 것도 죄가 된다. 주지 않은 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모든 것은 도둑질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 도둑이네.(S9.14)

 

 



상윳따니까야에 나오는 게송이다. 어느 날 수행승이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연못에서 아름다운 연꽃을 발견했다. 수행승은 연꽃에 매료되어 가까이 다가 갔다. 가까이 가서 연꽃을 감상했다.

 

수행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코를 대고 향내를 맡은 것이다. 그런데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수행승은 연꽃 향내를 취했다. 이를 보다 못한 천신이 벗이여, 그대는 향기 도둑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이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이름하여 향기도둑이라 했다.

 

봄이 왔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면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 같다. 여기에 벚꽃까지 피면 확실히 봄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벚꽃이 필 무렵 라일락도 함께 핀다는 것이다. 공원에 라일락이 필 때 향내가 난다. 향기중에 최상이 자스민이라 하지만 라일락향내도 이에 못지 않다.

 

라일락이 필 때 향내가 확 풍길 때가 있다. 바람에 실려 온 것이다. 라일락은 가까이 있어도 바람의 방향이 다르면 향내가 나지 않는다. 그럴 때는 코를 가까이 대야 한다. 코를 가까이하면 라일락 특유의 향내가 난다.

 




라일락철이 되면 향내를 맡곤 한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라일락 향내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경에 따르면 도둑질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훔쳐보기도 도둑질에 해당된다. 더구나 욕정의 마음까지 품었다면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것이 된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여인을 떠올리는 것만 해도 불선업이라고 했다. 이는 예전에 여인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유희했던 기억을 떠 올립니다.”(A7.50)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성적교섭의 경’(A7.50)에 따르면 성적행위 뿐만 아니라 훔쳐 보는 것, 떠 올리는 것, 심지어 다른 사람이 행위하는 것을 즐기는 것 등 일곱 가지에 대하여 계행의 파괴로 보고 있다. 비록 수행승과 관련된 출세간적인 가르침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마음속으로 음행하는 것이라면 불사음죄를 짓는 것이 된다.

 

오계는 신체적 언어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에 앞서 의도가 먼저 있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하고자 하는 것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음행하고 술 마시게 되는데 이는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가 되어서 악업을 짓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수에 그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의도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때도 악업이 되는 것일까? 마음 속으로 여인을 계속 생각하는 행위도 죄가 되는 것일까? 출세간법에 따르면 악업이 된다.

 

오계가 더욱더 확장된 것이 십계이다. 이를 십선계 또는 십선행이라고 한다. 천수경 참회게에서 볼 수 있는 십악참회가 대표적이다. 십악참회를 보면 탐, , 치가 삼독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음으로 짓는 죄도 중죄에 해당됨을 말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짓는 죄 못지않게 정신적으로 짓는 죄도 크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 메인뉴스를 보니 어느 40대가 한강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n번방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자 신분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여 몸을 던진 것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꾸 훔쳐보다 보니 점점 빠져 든 것이다. 나중에는 성범죄의 공범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거리에서 매혹적인 여인을 볼 수 있다. 매력적인 남성도 해당된다. 그럴 경우 자꾸 쳐다보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마치 꽃을 보는 것과 같다. 한번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볼 때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를 대고 향기를 취하기도 할 것이다. 심하면 꺽어서 화병에 넣고 혼자 보고자 할 것이다. 훔쳐보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보여진 것에 대하여 욕망이 발동되면 자꾸만 보게 된다. 자주 보면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이때 신체적 행위가 따른다. 의도한 것이 신체적 행위로 나타나 오계를 어기게 된다.

 

불교에서 계행은 단지 오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감각기관을 단속하는 것도 계행에 해당된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무한계율을 강조하고 있다. 행위하고 있는 모든 것이 계율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계율로 만든다면 수천권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무한계율에 대하여 무한청정적 계율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구천 하고도 또한,

백팔십 꼬띠와

오백만 하고도 또한,

삼만육천이 있다.

이들 제어의 계율들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설했고,

율장 가운데서는 생략을 통해

학습계율로 시설되었다.(Vism.1.132)

 

 

무한청정계율을 보면 지켜야 할 계율이 무한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 극히 일부만 계율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율장이 수범수제(隨犯隨制)’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범할 때마다 만들어진 것이다.

 

무한계율을 다 지킬 수 없다. 그래서 늘 깨어 있을 것을 강조한다. 지금 행위한 것에 대해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아난다에게 음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보지말라’ ‘말하지 말라’ ‘알아차림 하라라고 당부했다. 불교에서는 계행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고행이 된다.

 

그래도 욕정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인을 가족보듯이 해야 할 것이다. 나이가 어머니뻘 되면 어머니처럼 보고, 나이가 형제뻘 되면 누이처럼 대하고, 나이가 딸벌 되면 딸처럼 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자매같은 여인에 대하여 자매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S35.127)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인을 가족처럼 보았을 때 훔쳐보기도 덜할 것이고, n번방과 같은 곳에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은 도둑질이 된다. 훔쳐보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훔쳐보는 것도 시각강간이라 하여 불쾌하게 생각한다. 자꾸 훔쳐 보다 보면 더 큰 죄악을 짓게 된다. 꽃향기를 취하는 것도 향기도둑이라 했는데 훔쳐보기는 시각도둑이라 할 것이다. 동시에 음행이 된다. 그래서 훔쳐보기 하면 불투도계와 불사음계 두 가지를 동시에 어기게 된다.

 

오계를 어겼을 때 참회하면 된다. 훔쳐보기하여 불투도죄와 불사음죄를 지엇다면 참회하고 다시 짓지 않으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계로 복귀해야 된다는 것이다. 계를 다시 받아 지녀야함을 말한다. 만일 계를 다시 받아 지니지 않으면 파계한 상태로 있게 된다. 테라와다불교에서 법회할 때마다 오계를 받아지니는 것도 계를 계속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파계했을 때 즉각 계로 복원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오계는 평생에 걸쳐 단계적으로 완성되는 학습계율이다. 불투도에 대한 것이라면 도둑질 하지 말라라고 정언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지키지도 못할 계를 아예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며 불투도계를 받아 지니는 것이다.

 

수행승이 꽃향기를 맡는 것도 도둑질이고 훔쳐보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했다. 이런 행위를 반복하면 갈애에 따른 집착이 될 것이다. 집착이 되면 필연적으로 업이 되기 때문에 해탈의 길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함부로 쳐다보거나 훔쳐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단지 , 하거나 그렇네.”라며 알아차림하면 그뿐이다.

 

 

2020-03-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