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설 수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2. 12:32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설 수 없다

 

 

그때그때 컨디션이 다르다. 어떤 날은 집중이 잘 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듯이, 마음도 시시각각 변덕이 죽끓듯이 한다. 미쳐 날뛰는 듯한 마음을 어떻게 제어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앉는 것이다. 눈을 감고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슬람사람들은 때가 되면 기도한다고 한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메카가 있는 곳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하는 방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골방과 자신만의 방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불교인들에게 기도라는 말은 맞지 않다.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바라는 타력적 기도는 자력적인 불교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찰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유일신교 따라하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일신교사람들에게 기도가 있다면 불교인들에게는 명상이 있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지켜보았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수행처에 가거나 집중수행 할 때를 제외하고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명상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명상을 해 보지만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었다. 만든지 두 달가량 되었다. 틈만 나면 앉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한다. 집과 일터를 시계추럼 왔다갔다 하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앉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비록 일이십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앉아 있는 순간만큼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좌선할 때 급한 마음으로 앉으면 실패하기 쉽다. 예비동작을 해야 한다. 행선을 하는 것이다. 불과 열 걸음 밖에 되지 않지만 몇 번 왔다갔다 하다보면 집중이 된다. 발을 올리고 나아가서 내리고 딛는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그곳에 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몇 분이라도 경행을 하고 난 다음 앉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일을 하다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책상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좋다. 밖에 나가서 산책하다 보면 몇 걸음 걷지 않아 해결책이 떠 오른다. 명상공간이 있다면 자리에 앉으면 될 것이다. 앉아서 호흡관찰을 하다 보면 해법이 떠 오를 수 있다.

 

명상의 이점은 매우 많다. 가장 큰 것은 아마 집중일 것이다. 명상을 하고 난 다음 일을 하면 집중이 잘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틈만 나면 자주 앉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한계가 있다.

 

가족이라는 족쇄

 

아직도 생활인으로 살고 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직장처럼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은 묶여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에서는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뻗은 대나무가 엉킨 것과 같으니”(Stn.38)라고 했다.

 

가족은 집착으로 얽히고 설켜 있어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라고 했다. 이 세상의 어떤 족쇄보다도 가족이라는 족쇄는 강력한 것이다. 쇠붙이로 만든 족쇄는 칼로 끊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인연과 집착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족쇄를 끊어 버리는 것은 어렵다.

 

가족이라는 족쇄를 끊어 버린 자들이 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를 말한다. 그들은 무소유의 청정한 삶을 살아 간다. 욕망을 여의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다. 무소유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수행자의 삶은 재가자의 삶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재가자의 삶은 번거로운 것이다. 재가자는 아내와 자식을 부양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맛지마 랏타빨라의 경에서는 재가의 삶에 대하여 재가에 살면서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거룩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M82.4)라고 했다.

 

랏타빨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장자의 아들로 아내가 여러 명 있었음에도 ,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깍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어떨까?”라며 출가를 결심하는 것이다.

 

공작새와 백조로 묘사된 재가자와 출가자

 

출가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이는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재가는 아내를 부양하고, 덕행자에게는 내것이 없어, 둘은 처소와 생활양식이 같지 않다. 재가자는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기 어렵지만, 성자는 항상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Stn.220)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Stn.221)

 

 



공작은 화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날개를 펼치면 컬러풀한 자태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공작은 높이 멀리 날지 못한다. 반대로 백조는 백색으로 심플하다. 또 백조는 높이 멀리 날아 갈 수 있다. 경에서는 재가자를 백조로, 출가자를 백조로 묘사했다.

 

출가자를 백조로 묘사한 구절은 종종 보인다. 법구경에서는 새김을 갖춘 님들은 스스로 노력하지 주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백조들이 늪지를 떠나는 것처럼 그들은 집마다 그 집을 떠난다.”(Dhp91)라고 했다. 백조는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승은 무소유이기 때문에 거처가 없다. 그래서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출가자에게 예경하는 이유

 

경에서 공작새는 백조를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재가자가 수행승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출가자의 수행조건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재가자의 출가자의 예경에 대한 것이다.

 

재가자는 번거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수행에 집중할 수 없다. 바쁘게 살다 보면 명상한다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 것과 같다. 집중수행할 때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출가자는 오로지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재가자보다 수행의 진척이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조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 수 있음을 말한다.

 

불자들은 스님이 지나가면 반배의 예를 올린다. 이는 불교교양대학에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스님같지 않아도 머리깍고 승복을 입었으면 일단 반배의 예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처럼 길거리에서 아무 스님에게나 반배를 했을 때 스님은 절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게 될 것이다. 반배의 예는 사미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노보살이 이제 갓 출가한 사미에게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새파랗게 젊은 스님에게 삼배의 예를 올리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는 스님들이 스님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삼배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Stn.221)라는 게송을 떠 올리면 달리 생각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이제 갓 출가한 사미일지라도 매우 빠르게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가자는 재가자와 달리 수행환경이 좋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도 없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빠른 시간내에 성자가 될 것이다. 성자가 되면 복전(福田)이 된다. 비록 갓 출가한 사미일지라도 성자가 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이유로 사미에게도 반배나 삼배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재가자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재가자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출가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했다. 이를 경에서는 공작과 백조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재가자에 대하여 땅 위에서만 사는 화려한 공작새로 묘사하고, 출가자에 대해서는 하늘 높이 날아 자유롭게 다니는 백조로 묘사했다. 그렇다고 재가자가 성자가 못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환경이 좋지 않아서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렇다면 재가자 먼저 성자가 되고 출가자가 나중에 성자가 되었을 때 누가 손위가 될까? 주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세존께서 까삘라밧투에 계실 때에 싸끼야 족들 사이에 논쟁이 먼저 진리의 흐름에 든 자는 나중에 든 자보다 오래 되었기 때문에, 먼저 흐름에 든 자가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을 받아야 한다.’라는 논쟁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어떤 탁발하던 수행승이 듣고 부처님에게 전했는데, 부처님은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라도 재가에 있다면, 출가한 사미에게 예경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재가자가 먼저 흐름에 들었더라도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할 것을 가르치고 수행승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시를 읊었다.”(Prj.II.276)

 

 

주석에 따르면 재가의 성자라도 사미에게 예경해야 한다고 했다. 재가에서 수행을 많이 하여 수다원이 된 자라도 이제 갓 출가한 사미에게 절을 하라는 말과 같다. 왜 그럴까? 비록 갓 출가한 젊은 사미일지라도 모든 것에서 조건이 좋기 때문에 매우 빨리 성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공작새와 백조의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출가자는 법랍으로 자리를 정한다. 법랍이 높은 자가 상석에 앉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들어왔더라도 먼저 깨달아 성자가 되었다면 상석에 앉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율장에서는 먼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먼저 출가한 자가 상석에 앉는다고 했다. 이는 이는 사리뿟따존자가 앗사지존자를 공경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재가불자가 제 아무리 뛰어나도 이제 갓 출가한 사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사미는 하늘 높이 나르는 백조처럼 빠르게 성장해서 도와 과를 이루어 더 멀리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가의 아나함일지라도 이제 갓 출가한 사미에게 예경하는 것이다. 사미는 빠른 시간에 아라한이 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사람을 깔보지 말라고 했는데

 

젊은 사람을 깔보지 말라고 했다. 젊은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깔보지 말아야 할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어리다고 해서 깔보지 말아야 할 것 네 가지는 왕족, , , 수행승을 말한다.

 

왕족으로 태어난 왕자는 나중에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깔보아서는 안된다. 뱀이 작다고 하여 깔보면 물렸을 때 독으로 죽을 수 있다. 아무리 작은 불이라도 방심하면 큰 불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이제 갓 출가한 수행승이라도 없신여겨서는 안된다. 왜 그럴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이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아들과 가축이 없어

그 상속자들은 재산을 알지 못하리.

자손이 없고 상속자가 없으니

그들은 잘린 종려나무처럼 되네.”(S3.1)

 

 

사미가 어리다고 깔보거나 없신여겨서는 안된다. 사미는 재가자와 달리 매우 빨리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재가의 성자도 이제 갓 출가한 사미에게 예경해야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어리다고 없신여긴다면 수행승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왜 그런가? 수행승은 참아 내기 때문이다. 수행승은 모욕을 받았을 때 언어로서 저주의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행으로 자신을 인내하여 참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의 불꽃으로 타오른다고 했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설 수 없다

 

불자들은 스님들과 마주치면 반배의 예를 올려야 한다. 재가의 도력이 높은 수행자도 출가자를 만나면 예경해야 한다. 설령 그가 스님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계행이 엉망일지라도 일단 예를 갖추고 보는 것이다. 참회하여 다시 정진한다면 빠른 시간내에 성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을 수 없다. 마치 공작새가 백조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재가자가 제아무리 훌륭해도 땅위에서 사는 공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갓 출가한 사미는 하늘 높이 더 멀리는 나는 백조와도 같다. 공작이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듯이,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설 수 없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예경해야 한다.

 

 

2020-04-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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