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없이 음식을 즐기려면
랏타빨라 존자의 출가이유를 보면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의 경’에 따르면, 존자는 네 가지 이유로 출가했다.
첫번째 이유는“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라 하여,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 이유는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라 하여, 이 세상 어느 누구와도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세번째 이유는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라 하여, 저 세상으로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네번째 출가이유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M82.39)라 하여, 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랏타빨라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출가를 결행했다.
랏타빨라의 19게송
랏타빨라 존자는 네 가지 상실을 이유를 들어 출가를 결심했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의 경’에서는 모두 19개의 게송으로 출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똑 같은 게송이 테라가타 이십련시집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랏타빨라 존자가 읊었다고 일컬어지는 25개의 게송이 그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보다 6개가 더 많다. 참고로 공통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보라, 찬란한 형상을,
그것은 상처의 더미가 쌓인 것
질병이 많고 욕망의 대상으로
견고하게 지속하지 못하네. (Thag.769)
보라, 치장된 몸을,
그것은 뼈와 가죽으로 덮여 있을 뿐
보석과 귀고리,
옷에 묶여 아름답네. (Thag.770)
두 발은 헤나 염료로 장식하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여도
피안을 구하는 자를 속이지 못하네. (Thag.771)
머리는 여덟 쪽으로 따고
눈에는 연고를 발랐네,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여도
피안을 구하는 자를 속이지 못하네. (Thag.772)
새롭게 장식한 연고단지처럼
더러운 몸을 아름답게 꾸몄다.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여도
피안을 구하는 자를 속이지 못하네. (Thag.773)
사슴사냥꾼이 그물을 쳐놓았지만
사슴은 그물에 걸려들지 않네.
사슴사냥꾼이 울게 내버려두고
사슴은 먹이를 먹고 간다네. (Thag.774)
사냥꾼의 그물은 찢어졌지만
사슴은 덫을 건드리지 않았으니,
사냥꾼은 비탄해하겠지만
사슴은 먹이만 먹고 보금자리로 간다.”(Thag.775)
내가 세상에 부유한 사람들을 보건대
어리석어 재산을 얻어도 보시하지 않으니
탐욕스러워 재물을 쌓아두고
점점 더 감각적 쾌락을 열망합니다. (Thag.776)
왕은 폭력으로 땅을 정복하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전국토를 다스리며,
바다의 이쪽에 만족하지 않고
바다의 저쪽마저도 갖길 원합니다. (Thag.777)
왕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갈애를 떨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
불완전한 채로 몸을 버리니.
세상의 감각적 쾌락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Thag.778)
친지들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죽었다.’라고 울부짖지만
수의로 그를 감싸서 운반하고는
장작더미를 모아 그곳에서 불태웁니다. (Thag.779)
재산은 버려지고, 한 벌 수의만 입혀지고
불 꼬챙이에 찔리며 불태워지니
죽어 가는 자에게는 친족도
벗들도 친구들도 피난처가 되지 않습니다. (Thag.780)
상속자가 그 재산을 가지고 가고
사람은 그 행위를 따라서 저 세상으로 가니
죽은 자에게 재산이 따라다니지 않으니
처자도 재산도 땅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Thag.781)
돈으로 장수를 얻지 못하고
또한 재산으로 노쇠를 면할 수 없네.
인생은 짧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현자는 말합니다. (Thag.782)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과 만나고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얻어맞아 누웠으나
현명한 자는 죽음과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Thag.783)
그러므로 지혜가 재산보다 탁월하고
지혜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룹니다.
생에서 생으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Thag.784)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가니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윤회합니다.
적은 지혜로써 그것을 신뢰하는 자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Thag.785)
마치 도둑이 강도에 사로잡혀
악한 행위에 괴로워하듯이
사람들은 죽은 후에 다음 세상에서
악한 행위로 괴로워합니다. (Thag.786)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 (Thag.787)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청년이건 노인이건, 몸이 부수어지면 떨어지니
왕이여, 이것을 보고 출가했습니다.
진실한 수행자의 길이 보다 탁월합니다.” (Thag.788)
이와 같은 19개의 게송은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과 테라가타 이십련시집에서 병행한다. 테라가타에서는 추가로 여섯 개의 게송이 더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맛지마니까야에서 빠져 있다. 게송 774와 776사이에 있는 775번 게송이다. 테라가타에서 775번 게송은 “사냥꾼의 그물은 찢어졌지만 사슴은 덫을 건드리지 않았으니, 사냥꾼은 비탄해하겠지만 사슴은 먹이만 먹고 보금자리로 간다.”(Thag.775)라고 되어 있다. 게송 774번과 유사하다. 아마 유사하기 때문에 빼놓은 것으로 보여진다.
테라가타에 추가되어 있는 다섯 게송
테라가타에 추가되어 있는 다섯 개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믿음을 가지고 나는 출가하여
승리자의 가르침에 들어갔다.
출가는 나에게 헛되지 않았으니
허물없이 나는 음식을 든다. (Thag.789)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타는 불처럼
황금을 보기를 칼처럼 여기며,
모태의 탁태를 비롯한 고통을 보고
여러 지옥에서는 크나큰 공포를 보았다. (Thag.790)
이러한 재난을 보고 나서
그때 외경이 나에게 생겨났다.
거기에 자극받아 적멸에 들었으니,
일체 번뇌가 부수어 졌다. (Thag.791)
스승을 섬기어서 나에게
깨달은 님의 교법이 실현되었으니,
무거운 짐은 내려놓았고
존재의 통로는 제거되었다. (Thag.792)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의취가 있었는데,
그 의취를 나는 성취했으니,
일체의 결박이 부수어졌다.” (Thag.793)
테라가타에 추가 되어 있는 다섯 개의 게송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번째 게송인 789번 게송이다. 이 게송에서 랏타빨라존자는 ‘믿음으로 출가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80명의 뛰어난 으뜸 제자중에서 랏타빨라 존자는 ‘믿음으로 출가한 님 가운데 제일(saddhāpabbajitanaṃ aggo)’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랏타빨라 존자는 꾸루 국의 툴라꼿티따 시에서 부유한 대신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그리고 적당한 배필을 맞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든 것이 다 바뀌어져 버렸다. 부처님의 설법에 감화되어 출가하고자 한 것이다. 랏타빨라 존자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감행하여 허락을 받았다. 출가 후에 부모를 찾아줄 것을 조건으로 하는 일종의 조건부 출가였던 것이다.
랏타빨라 존자는 약속대로 부모님을 찾았다. 차례대로 탁발하다 보니 부모집에 이른 것이다. 처음에는 하녀가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목소리를 듣고 알아보았다. 가족들은 출가하지 않았으면 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부를 보여주었으나 무상에 대한 법문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네 가지 음식의 수용이 있는데
랏타빨라 개송 중에 “허물없이 나는 음식을 든다.” (Thag.789)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똑 같은 빠알리어 구절이 앙굴리말라의 게송에도 보인다. 테라가타 882번 개송을 보면 앙굴리말라가 “실로 나쁜 곳으로 이끄는 그 같은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닥뜨리지만, 빚 없이 나는 음식을 즐긴다.”(Thag.882)라고 되어 있다.
탁발을 하면 밥을 얻어 온다. 걸식하며 사는 출가수행자에게 음식은 어떤 의미일까? 주석에 따르면 네 가지 음식의 수용이 있다. 첫번째로는 도둑질한 음식을 즐기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빚진 음식을 즐기는 것이고, 세번째로는 유산의 음식을 즐기는 것이고, 네번째로는 자기 음식을 즐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청정도론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청정도론 제1장 계행을 보면 네 가지 필수품에 대한 수용에 대한 항목이 있다. 탁발음식에 대한 것도 이에 해당된다. 네 가지 수용은 다음과 같다.
1) 절도에 의한 수용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참모임 가운데 버젓이 앉아서 수용하는 것을 절도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2) 차용에 의한 수용
계행을 지키는 자가 성찰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을 차용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3) 상속에 의한 수용
일곱 가지 학인들의 필수자구의 수용을 상속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4) 주인에 의한 수용
번뇌를 부순 자들의 수용을 주인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Vism.I.125-127)
청정도론에 따르면 네 가지 수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최악은 절도에 의한 수용이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먹었을 때 음식을 도둑질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차용에 의한 수용은 음식을 먹을 때 빚진 자처럼 먹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성찰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러므로 옷을 수용할 때마다 성찰해야 한다. 음식덩이는 한 모금 마다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식전-식후와 초야-중야-후야에 성찰해야 한다.”(Vism.I.125)라고 했다.
앙굴리말라 존자는 “빚 없이 나는 음식을 즐긴다.”(Thag.882)라고 했다. 연쇄살인자가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서 부처님 제자가 되었을 때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탁발음식을 수용할 때 빚 없이 음식을 먹는다고 했는데 이는 차용에 의한 음식의 수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랏타빨라 존자는 “허물없이 나는 음식을 든다.” (Thag.789)라고 했다. 여기서 허물없다는 말은 빠알리어 ‘anano’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Free from debt’의 뜻이다. 그래서 빚진 것 없이 탁발음식을 먹는다는 것이다.
앙굴리말라 존자나 랏따빨라 존자는 탁발음식을 수용할 때 빚진 것 없이 먹었다. 그래서 “빚 없이 나는 음식을 즐긴다.”(Thag.882)라거나, “허물없이 나는 음식을 든다.” (Thag.789)라고 했다. 이 말은 빠알리어“aṇano bhuñjami bhojanaṃ”라는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 빚진 것이 없거나 허물없는 것에 대하여 부채없이 음식을 즐긴다라고 볼 수 있다.
상속에 의한 수용은 어떤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유산으로서 음식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청정도론 설명을 보면 ‘일곱 가지 학인들’이라고 했다. 아라한을 제외한 사쌍팔배의 성자 또는 사향사과의 성자들을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세존의 아들이고, 그러므로 아버지가 소유한 필수자구의 상속자로서 필수자구를 수용한다.”(Vism.1.127)라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비로서 부처님의 아들로 인정받아 부처님의 유산과 같은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근거가 되는 경으로서 맛지마니까야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을 들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어야 하며 재물의 상속자가 되어서는 안된다.”(M3.3)라고 하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음식을 들 때 주인으로서 먹을 때가 있다. 이를 주인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걸식자가 밥을 빌어먹음에도 주인으로서 먹는 것이다. 이를 번뇌를 부순 자들의 수용이라고 한다. 아라한이 되면 주인으로서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들은 갈애의 노예상태를 뛰어 넘은 까닭에 주인으로서 수용하기 때문이다.”(Vism.I.127)라고 했다.
세 가지 음식 먹는 방식이 있는데
앙굴라말라 존자는 탁발음식에 대하여 빚 없이 음식을 즐긴다고 했다. 랏타빨라 존자는 허물없이 음식을 즐긴다고 했다. 이 말은 모두 “aṇano bhuñjami bhojanaṃ”라는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빚 없이 음식을 수용하도다.”라고 번역했다. 빚 없이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계행을 지키며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이다. 또 음식을 먹을 때 성찰하면서 먹는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 오관게가 있다. 공양할 때 읊는 게송을 말한다. 한 구절을 보면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음식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행을 지키면서 먹기 때문에 절도에 의한 수용과 차용에 의한 수용이 될 수 없다.
니까야에도 공양게송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을 보면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S35.239)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음식을 수용하는 것도 성찰하면서 먹는 것이 된다. 그래서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는 “몸에 기름칠하듯”(S35.239) 음식을 수용하는 것에 대하여 ‘계율로 먹는다’고 한다.
계율을 지키지 않은 자가 음식을 먹는 것은 도둑질 하는 것과 똑같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계율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먹었을 때 진정한 출가라고 볼 수 없다. 아마도 생계형 출가나 도피형 출가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집중수행할 때 선원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는 계율로 먹고, 사마타로 먹고, 위빠사나로 먹으라고 했다. 그래서 이 몸을 기름칠하는 정도로 음식절제를 하여 적당량을 먹는 것에 대하여 ‘계율로 먹는다’고 말하고, 이 음식이 여기로 오기까지 여러사람들의 노고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에 대하여 ‘사마타로 먹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음식을 집어서 입에 넣고 목구멍으로 넘길 때까지 전과정을 알아차림하는 것에 대하여 ‘위빠사나로 먹는다’고 말한다.
부채없이 음식을 즐기려면
계행을 지키는 수행자는 탁발한 음식에 대하여 빚없이 먹는다고 했다. 이렇게 계행을 지키는 수행자가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부처님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먹는다. 거룩한 존재, 즉 아라한이 되었을 때는 복전으로서 공양받을 만하기에 주인으로서 먹는다.
랏타빨라 존자와 앙굴리말라 존자는 음식을 수용할 때 부채없이 음식을 즐긴다고 했다. 두 존자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이는 상속에 의한 수용과 주인에 의한 수용을 모두 만족한다. 그래서 음식을 공양 받을 만하게 자신을 수행했기 때문에 ‘빚없이 먹는다’고 한다. 어쩌면 자기가 자기 것을 찾아 먹는다고 볼 수 있다.
2020-04-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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