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개처럼 살 것인가 사자처럼 살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25. 12:03

 

개처럼 살 것인가 사자처럼 살 것인가?

 

 

무엇이든지 집착하면 번뇌가 된다. 내남편, 내아내, 내딸, 내아들이라며 집착하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 세상에서 집착에서 자유로울 자 어디 있을까?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움은 원인에 대한 결과이다. 이는 사성제에서 고성제가 결과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성제가 결과에 대한 것이라면 원인에 대한 것은 집성제이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집성제를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라고 한다. 집성제에 대해서는미래에 다시 태어남으로 이끌고 환희와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 즐거워하는 갈애, 이를테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는데, 벗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한다.”(M141)으로 되어 있다.

 

집성제는 갈애에 대한 것이다. 집성제에 대하여 집착에 대한 것이라고 오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갈애라고 되어 있다. 갈애나 집착이나 비슷한 말이지만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을 집착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는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난다.”라고 서로 다른 고리로 설명하고 있다.

 

집성제에 대하여 집착이 아닌 갈애로 보는 것은 느낌과 관련이 있다.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를 낙수, 고수, 불고불락수라고 한다. 문제는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

 

갈애가 일어나면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나므로 갈애가 더욱 더 고착화 된다. 한번 집착이 일어나면 업으로서 과보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행위에 따른 과보를 받았을 때 업으로서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를 태어남이라고 한다. 그런데 태어난 존재는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집착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나는 집착된 존재이다. 무엇에 집착된 존재인가?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 이렇게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괴로운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남을 괴로움이라고 했다. 태어난 모든 것들은 숙명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

 

고성제를 보면 괴로움에 대하여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어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괴로움은 이뿐만 아닐 것이다. 하나하나를 열거하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a: 五取溫苦)”(S56.11)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오취온고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받는 최초의 괴로움이 태어남이다. 중간의 괴로움은 늙음이고 최후의 괴로움은 죽음이다.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괴로움에 압도되어 연소되는 듯한 괴로움이 슬픔이고, 그것을 참을 수 없어 통탄하는 괴로움이 비탄이다. 그 다음에 세계의 부조화라고 불리는 원하지 않는 감촉과 관련된 자의 신체적 질병의 괴로움이 고통이다. 그 질병이 있는 범부들에게 그 영향으로 생기는 정신적 질병의 괴로움이 근심이다. 슬픔 등이 많아져서 초췌해진 자들의 신음하는 괴로움이 절망이다. 정신적 소망이 좌절된 자들의 욕구가 파괴된 괴로움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형태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괴로움이다.”(Vism.16.59)

 

 



부처님이 초전법륜경에서 줄여서 말하지면(sakhittena)”이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오취온고가 모든 괴로움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이와 같이 여러가지 형태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괴로움이다.”(Vism.16.59)라고 선언한 것이다.

 

오취온고를 이해하면

 

괴로움을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고가 된다. 오온에 집착된 채 태어난 것 자체가 괴로움을 숙명적으로 안고 태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설령 즐겁다고 해도 오래 가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오취온고가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하나하나를 열거하면 수많은 겁이 걸려도 남김없이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온 바닷물의 맛을 한 방울의 물로 알 수 있듯, 일체의 괴로움을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투입하여 보여 주기 위해 요컨데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 괴로움이다.”라고 세존께서 설한 것이다.” (Vism.16.60)

 

 

그 사람에 대하여 다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얼굴만 보고서도 대충 알 수 있다. 얼굴에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질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질문은 그 사람의 개성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한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오취온고를 설명하기 위해 바닷물의 비유를 들었다. 바닷물이 어떤 맛인지 알기 위하여 다 마시지 않고 한방울의 물만 맛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괴로움이 있지만 마치 한방울의 바닷물로 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오취온고를 이해하면 나머지 괴로움도 다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좋고 싫음은 과거의 조건

 

초기경전을 보면 못 배운 일반사람과 잘배운 부처님의 제자로 설명된 것이 많다. 못 배운 일반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일반범부라고 한다. 그런데 범부들은 호불호(好不好)’쾌불쾌(快不快)’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좋고 싫음은 과거의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결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느낌에는 크게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물리치려고 한다. 거머 쥐려 하면 탐욕이고, 물리치려 하면 성냄이다.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하고 일반범부라고 한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한마디로 과거의 조건에 따른 것이다. 과거에 경험했기 때문에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만일 처음 경험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은 과거 경험에 따른 조건발생으로 보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는 것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원인이 아님을 말한다. 과거의 경험이 조건이 되어서 나타난 결과로 보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괴롭다고 하여 불만을 표출한다면 또 다른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불쾌한 느낌이 발생했다면 괴로움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된다. 그럼에도 그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불쾌해한다면 또 다른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이전에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를 업의 윤전과 이숙의 윤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업으로부터 이숙이 생겨나고 이숙은 업을 생성한다. 업으로부터 재생이 있고, 이와 같이 세상이 일어난다.”(Vism.19.18)라고 했다.

 

결과보다는 원인을 더 중시해야

 

괴로움이 무엇인지 안다면 괴로움을 소멸해야 할 것이다. 사성제에서 멸성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멸성제는 도성제에 대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도성제가 원인이고 멸성제가 결과인 것이다. 

 

괴로움을 소멸하려거든 괴로움의 발생을 소멸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느낌이 갈애로 전개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은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십시오.”라고 말한다. 느낌에서 알아차리지 못하여 갈애로 전개 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소멸은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림 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하여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는 출구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사자의 개의 비유를 들었다.

 

 

여래들의 행동은 사자와 같다. 그들은 괴로움을 소멸시키면서 또한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치면서 원인을 중요시할 뿐, 결과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개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괴로움을 소멸시키면서, 괴로움의 소멸을 설할 때 자기학대의 고행을 추구한 가르침을 통해서 결과를 중요시할 뿐, 원인을 중요시하지 않는다.”(Vism.16.63)

 

 

여래들의 행동은 사자와 같다고 했다. 반면에 이교도들은 개와 같다고 했다. 사자와 개의 차이점은 목표물에 있다. 사자는 화살이 날라오면 그 화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수를 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는 곤봉으로 때리면 사람을 향하지 않고 곤봉을 물어뜯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결과보다는 원인을 더 중요시하게 여기지만, 이교도들은 원인보다는 결과에 더 집착함을 말한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면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괴로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근심한다고 해서 근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슬피운다고 하여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Stn.583)라고 했다.

 

고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 괴로움의 뿌리인 몸을 괴롭혀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자이나교도들이 그랬다. 이에 부처님은 그들을 개와 같다고 했다. 개를 곤봉으로 때리면 사람을 향하지 않고 곤봉을 물고 뜯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이라는 결과에 집착하는 것이다. 결과보다는 원인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처럼 살 것인가 사자처럼 살 것인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괴로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사고와 팔고를 들었지만 하나하나를 열거하면 수많은 겁이 걸려도 남김없이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Vism.16.60)라고 했다. 수많은 괴로움은 결국 오취온고로 귀결된다.

 

오취온고는 오온에 집착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수없이 나오는 정형구이다. 여기서 나의 것은 갈애에 대한 것이고, 나는 자만에 대한 것이고, 자아는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아야 괴로움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사자가 화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수를 향하듯이, 잘 배운 부처님 제자들은 괴로움에 주의 기울이지 않고 괴로움의 원인으로 항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호불호와 쾌불쾌를 경험한다. 그때마다 대응한다면 개가 될 것이다. 호불호와 쾌불쾌는 이전 경험에 따라 업이 익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결과에 대하여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은 개가 곤봉을 물고 뜯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는 또 다른 괴로움을 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했다.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나면 그대로 지켜 보는 것이다. 지켜 보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사자가 되는 것이다. 개처럼 살 것인가 사자처럼 살 것인가?

 

 

2020-04-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