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아날로그불교와 디지털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8. 14:51

 

아날로그불교와 디지털불교

 

 

답답했다.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초기불교가 있는 줄조차 몰랐다. 오로지 대승불교만 있는 줄 알았다. 경전중의 최고의 경전은 금강경이고, 좀더 본다면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금강경을 독송하면 좋다고 하여 아예 통째로 외워 버렸다. 2004년 불교에 입문한지 6개월 량 되었을 때이다.

 

화엄경도 구입하고 법화경도 구입했다. 읽다보면 무언가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한문투의 번역은 생경했고 내용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한번 치면 열 가지가 주르르 달려 나오는 것 같아 장황했다. 무엇보다 지금 괴로운 자에게 와 닿지 않는 내용이 많았다. 그럼에도 인내를 가지고 읽었다. 그래서인지 읽고 나서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승기신론을 사경했는데

 

이론을 알고 싶었다. 교리를 알면 답답한 마음이 풀려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대승불교의 교리를 잘 표현해 놓은 논서가 대승기신론이라고 했다. 이 한권만 읽으면 무언가 실마리가 보일 것 같았다.

 

서점에서 서광스님이 지은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을 구입했다. 불광출판부에서 나온 것이다. 한문원문과 원문번역, 그리고 서광스님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대승기신론을 먼저 읽어 보았다. 장황하게 전개되어 있는 경전과는 달리 깔끔하게 요약되어 있어서 구미에 딱 맞았다. 그러나 처음 접하는 대승불교의 교리는 이해가 쉽게 되지 않았다. 관련 글을 읽어 보기도 했다. 가장 좋은 것은 외우는 것이다. 외우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경과는 달리 글자수사 너무 많았다. 외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사경을 해보기로 했다. 20054월의 일이다.

 

대승기신론을 사경했다. 이전에 금강경, 천수경 등을 이백자 원고지에 여러 차례 사경한 바 있기 때문에 사경은 익숙한 것이다. 역시 이백자 원고지에다 한문을 한자한자 일없이 사경했다. 사경하면서 원문에 대한 번역을 보고 또 서광스님의 해설을 참조했다. 그러나 전부 사경하지 못했다. 7장 중에서 5깨달음과 생사윤회의 갈림길까지만 사경한 것이다. 이백자 원고지 세 개 분량이다.

 




대승기신론의 한마음(一心)사상

 

대승기신론을 보면 대승불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는 제1장 제1절이라고 볼 수 있는 서론의 저술동기에서 알 수 있다. 대승기신론의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 모두가 한몸이고 한마음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에 집착하고 정신적 물질적 현상에 집착한 결과 고통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17)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마음이다. 이를 한자어로 일심(一心)’이라고 한다.

 

대승기신론은 한마디로 한마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음사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어떤 한마음일까? 기신론에서는 대승의 의미에 대하여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들은 모두 한마음, 하나의 동일한 본질인 진여에서 나왔다.” (23)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여란 무엇인가? 이는 불생불멸하는 본질을 말한다. 본래 깨달은 마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중생은 처음부터 깨달아 있다고 말한다.”(84)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우리는 본래 깨달은 존재라고 했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본래 깨달은 존재임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선사들은 항상 자기가 원래 부처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수행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본래 깨달은 존재, 즉 내가 본래부처인 것을 수행으로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한마음사상은 참으로 단순하고도 명쾌하다. 내가 본래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깨달은 존재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본래부처이다.”라고 하여 내가 부처인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대신근(大信根)’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정말 나는 부처일까?”라며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상태가 커지면 큰 의심의 감정이 되는데 이를 대의정(大疑情)’이라고 한다. 나는 깨달은 존재임에도 왜 이렇게 망상에 빠져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용맹정진하게 된다. 이런 열정정인 의도를 대분지 (大憤志)’라고 한다.

 

불이론(不二論)과 연기법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대승기신론의 한마음사상에 근거한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초기불교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이는 깨달음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깨달음이란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을 모두 소멸시켜서 다시는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는 열반을 실현하는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청정한 삶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라며 아라한선언을 한 것이다.

 

동아시아불교의 한마음사상은 아날로그와 같다. 반면 부처님의 연기법은 디지털논리와 같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다른 것이다. 줄이나 선으로 따진다면, 아날로그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디지털은 점이 연결되어서 선처럼 보이는 것이다.

 

한마음사상의 깨달음과 연기법의 깨달음은 다르다. 한마음사상에서는 본질과 하나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진여삼매에 의하여 온 우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모든 부처의 법신이 중생의 몸과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안다.”(216)라고 했다. 이른바 불이(不二)’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불이론은 대승기신론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해서도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을 보는 것에 대하여 궁극적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은 연기법을 아는 것이다. 연기법을 안다는 것은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순환적 유전연기를 설한 다음에 반드시 역행하는 환멸연기를 설했다. 괴로움과 윤회의 결과로서 나타난 무명과 새로운 원인이 되는 갈애를 제거해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연기법은 조건발생이라는 사실이다.

 

연기법이 조건발생이라는 사실은 한마음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동아시아불교에서 말하는 한마음, 일심, 여래장, 진여, 불성 등으로 불리우는 아날로그적 사상과 반대되는 디지털적 사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법이 왜 디지털적 방식에 가까운 것일까?

 

조건에 따른 반도체의 원리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회사 다녔을 때에는 전자제품을 개발했었는데 회로설계 등 하드웨어를 담당했었다. 전자공학에서 가장 기초로 배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반도체원리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의 원리로 설명된다.

 

전자공학에서 다이오드는 온(on)과 오프(off)에 대한 것이다. 전류를 흘려 주면 도통이 되고, 전류를 흘려 주지 않으면 도통이 되지 않는다. 이때 조건이 있다. 전류를 흘려서 전압이 0.7볼트 이상이 되어야 통전 되는 것이다.

 

트랜지스터는 다이오드를 두 개 연결해 놓은 것과 같다. 트랜지스터는 스위치로서 역할을 한다. 전류를 흘려서 0.7봍트 이상이 되면 하이(high) 상태가 되어서 스위치가 온(on)으로 작동된다. 반면 0.7볼트 이하이면 로우(low) 상태가 되어서 오프(off)가 된다. 조건에 따라 하이와 로우, 10로 작동된다. 현재 볼 수 있는 스마트폰도 이와 같은 반도체의 온과 오프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반도체는 전류에 따라서 도체가 되기도 하고 도체가 되지 않기도 하다고 해서 반도체라고 한다. 철저하게 조건에 따라도체가 되기도 하고 무도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기법도 조건에 따른다.

 

조건에 따른 연기법

 

십이연기를 보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건(paccayā)이다. 조건이 없으면 결과가 생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라는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원리가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세간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여섯 감역이 만든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오온이 세상이기 때문에, 오온에서 생멸하는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른다. 조건발생하여 소멸하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적으로 발생하여 소멸한다.

 

십이연기에서 열 두 가지 순환고리는 모두 조건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건은 일종의 링크와 같은 것이다. 이런 십이연기는 선()이 될 수 없다. 마치 빨래줄처럼 매끈한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사인파(sine wave)처럼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사이클과 같은 것이다. 또 점으로 이루어진 선과 같은 것이다. 이는 연기가 원인(hetu: )과 조건(paccya: )과 결과(phala: )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불이론에 열반이 없는 이유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잘 말하지 않는다. 이는 대승기신론에서 보는 것처럼 한마음사상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마음이 되고자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한마음은 인정되지 않는다. 만일 한마음으로 되어 있다면 열반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열반은 조건이 소멸되어야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작되는 환멸연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동아시아불교에서 한마음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연기법이나 열반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한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마음인데 중간에 끊임이 없는 마음이다. 이는 조건발생하는 연기법과는 다른 것이다.

 

마음이 조건발생한다는 것은 이전 마음과 이후 마음이 같지 않음을 말한다. 이전 마음은 이전에 발생하여 소멸하고, 현재의 마음 역시 현재 발생하여 소멸한다. 다만 마음은 상속될 뿐이다. 조건발생하여 상속되기 때문에 이전마음과 현재마음은 다른 마음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오온에서는 끊임없이 색, , , , 식이 생멸하고 있는데 모두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마음은 조건을 차단하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 것이다. 십이연기에서는 열 두 가지 고리가 있다. 어느 고리이든지 차단하면 연기는 멈추게 되어 있다. 이는 불이론에 따른 한마음사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마음사상에서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해탈은 있지만 열반이 있을 수 없다. 반면 연기법에서는 조건발생이기 때문에 조건만 차단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갈애의 강을 건너지 않도록

 

십이연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고리만 끊어내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 고리는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는 고리를 말한다.

 

느낌과 갈애사이에 하나의 링크가 있다. 이는 경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vedanāpaccayā tahā)”(S12.2)라고 표현된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갈애의 강을 넘을 수 없음을 말한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등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의 강을 넘기 때문에 연기가 회전된다. 그래서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 등을 알아차리면 더 이상 연기가 회전하지 않게 되어 고리가 끊어진다. 이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십이연기 도표에 따르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했다.

 




삼세양중인과십이연기 도표를 보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하여 사성제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안에 모두 포섭된다. 사성제를 알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라고 볼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사성제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사성제는 연기적 구조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연기법을 떠나서 부처님 가르침을 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대승기신론에서는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그대신 여래장사상에 근거한 한마음사상이 강조되어 있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마음은 끊어지지 않는 마음이다. 마음이 끊어져야 열반에 이를 수 있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마음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면 열반도 이룰 수 없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어서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했을 것이다. 또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어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했을 것이다.

 

뜻 글자의 한계로 인하여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대승불교가 강세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동시에 들어왔다. 그때 당시 사람들은 어느 불교가 좋은 것인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중국의 한시기에 인도에서 역사적으로 순차적으로 형성된 여러 사조의 불교가 거의 동시에 물밀 듯 들어왔을 때 정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천태지의스님은 6세기에 오시(五時)라 하여 부처님이 설법한 순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화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로 순으로 설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사상이 들어올 때 사상의 혼란을 겪는다. 불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중국에 동시에 전불교사조가 들어왔을 때 우선시하는 사조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열등하게 본 사조도 있었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전통에 바탕을 둔 중국불교에서 아함경은 가장 열등한 가르침으로 폄하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에 대하여 소승경전이라고 격하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인도불교는 논리적이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대표되는 언어가 논리적 설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인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중국 한자는 비논리적이다. 글자 한자 자체가 이미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로 된 뜻 글자는 한계가 있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분석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았는데 뜻글자로 이루어진 한자로는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서 탄생한 중국불교라고 볼 수 있는 선종에서는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강조했을 것이다.

 

중국불교에서는 언어나 문자보다는 마음과 뜻을 더 강조했다. 이는 한자라는 이미지로 된 문자의 한계로 인하여 논리적 표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종이 생겨난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점은

 

요즘은 디지털시대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아날로그와는 다른 것이다. 디지털은 01로 이루어진 조합으로 되어 있어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01은 하늘과 땅, 삶과 죽음처럼 두 개의 극단이라는 사실이다.

 

두 가지 극단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조건에 따라 왕래할 수 있는 것이다. 전자공학 반도체이론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0도 되고 1도 된다. 마찬가지로 연기법에서는 조건에 따라 발생도 하고 소멸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는 디지털논리에 더 가깝다.

 

중국선종과 같은 동아시아 불교는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비논리적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한마음(一心)사상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아시아불교는 아날로그논리에 더 가깝다.

 

전자공학도 출신으로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다 거쳤다. 대개 2000년을 전후하여 시기를 구분한다. 이전에는 아날로그 제품이 우세했고, 이후에는 디지털제품으로 전환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연결과 비연결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날로그는 연결되어 있어서 신호가 약해도 고스트현상과 함께 화면이 잡힌다. 그러나 디지털에서는 신호가 약하면 모자이크현상이 나타나면서 화면이 사라져서 블랙으로 변해 버린다.

 

디지털에서는 0 아니면 1이기 때문에 있고 없음이 명확하다. 또 디지털에서는 조건에 따라 0도 되기도 하고 1이 되기도 한다. 이는 반도체의 특성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회로를 이용하여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날로그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경계가 두리뭉실하기 때문에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디지털은 논리적이고 아날로그는 비논리적인 것이다.

 

전사회적으로 이제 디지털시대가 되었다. TV도 그렇고 통신제품도 그렇다. 그 중에서도 스마트폰은 디지털제품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디지털논리에 따라 개발되었기 때문에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다. 불교도 아날로그불교와 디지털불교로 나눌 수 있다.

 

아날로그불교와 디지털불교

 

동아시아불교는 아날로그불교이고, 초기불교는 디지털불교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조건에 따라 과보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마치 사건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불이를 강조하는 동아시아불교에서는 고리가 없다. 하나로 주욱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마음사상이 대표적이다.

 

이제 답답한 마음이 풀렸다. 처음 불교에 입문했을 때 외워도 보고 사경도 해 보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불투명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부터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팔고에 대해 말했는데 현재 처한 처지와 비교해 보았을 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 하여 갈애를 원인이라고 설했는데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번뇌즉보리 또는 생사즉열반이라고 했다. 오늘날 디지털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끊임없이 알차차림을 강조한다. 특히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기 전에 알아차리라고 했다. 갈애의 강을 건너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괴로움에서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했다.


위빠사나수행법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수행방법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본래 나는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수행이라는 것은 깨달은 존재로서 나를 증명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오늘날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시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지 의문이다.

 

이제 더 이상 답답하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명쾌하다. 마치 디지털논리를 접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자연과학이나 공학 등 이과계통 출신들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더 호감을 갖는다고 한다.

 

초기불교는 모든 것이 논리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부처님이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분석하여 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겠다.(S12.2)라고 했다.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vibhagavādin)’라고 말한 것이다.

 

분별론자로서의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것에서 명쾌하다.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없다. 그리고 경우의 수를 나열했다. 이런 점은 동아시아불교의 한마음사상 또는 불이사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즘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딱 맞는 종교가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동아시아불교는 아날로그불교이고, 초기불교는 디지털불교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2020-05-08

담다마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