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대 비참한 노령이여, 노년출가와 용맹정진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14. 17:12

 

그대 비참한 노령이여, 노년출가와 용맹정진

 

 

꽃이 지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마치 피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지는 꽃은 쳐다보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빛나는 이팔청춘에 관심을 보이고 늙은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경전에는 늙음에 대한 게송이 종종 보인다.

 

법구경에는 자라왁가(jaravagga)라 하여 늙음의 품이 있다. 몸이 늙어 가는 것에 대하여 잘 꾸며진 왕의 수레가 낡아 가는 것으로 비유했다. 칠보로 장식한 화려한 왕의 수레도 세월이 지나가면 낡아 지듯이, 아무리 잘 가꾼 이 몸도 결국 늙어 갈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늙어 가는 것을 슬퍼한다.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늙어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갖는다. 이렇게 본다면 이 몸은 내몸이 아닌 것에 분명하다.

 

이 몸이 정말 내몸이라면

 

이 몸이 정말 내몸이라면 내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늙지도 말고 병들지도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S22.59)

 

 

나는 몸의 주인일까? 오온에 대하여 통제권을 가지지 못하는 한 나는 결코 주인일 수 없다. , 느낌, 지각 등 어느 것 하나 통제권을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마음도 자신의 마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명색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발생해서 머물지 않고 곧바로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머물지 않고 소멸해 버리기 때문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시시각각 찰나찰나 변하는 몸과 마음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몸과 마음에 대하여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러다보니 늙어 갈 때 슬퍼한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늙은 사람을 싫어 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냄새일 것이다. 노인에게서 나는 특유의 노인내 같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인들도 노인 옆에 앉기 싫어하는 것 같다. 하물며 젊은 사람들은 어떨까? 지하철에 노인석이 비어 있어도 앉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노인내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인이 되면 서럽다고 한다. 홀로 된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이 피하는 것이 더 서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했을 때 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회환이 담긴 게송이 법구경에 있다.

 

 

젊어서 청정한 삶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Dhp.155)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젊음과 이 건강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교만하게 산 것이다. 젊음은 늙음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건강은 질병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에도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으로 보냈을 때 남는 것은 회한밖에 없을 것이다.

 

출가자라면 젊은 시절에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하고 재가자라면 재산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 때, 누구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을 때 비애를 느낄 것이다. 그래서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Dhp.155)라고 했을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몸은 아프고 아무도 찾는 이 없을 때 절망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노인에 대하여 쏘아져 버려진 회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라고 했다. 과거 왕년시절을 떠 올리며 회상해 보지만 마치 버려진 화살 같은 신세라는 것이다. 화살은 한번 쏘아서 숲에 떨어지면 다시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65세가 노인이 되는 기준이다. 노인이 되면 지하철을 무료로 탑승할 수 있다. 그래서 지공거사라는 말이 생겼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거사라는 뜻이다.

 

요즘은 누구도 65세를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지공거사의 연령은 상향조정되어야 한다. 최소한 10년은 상향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표 때문일 것이다. 이제 거대여당이 탄생했으니 과감하게 개혁했으면 한다.

 

왜 늙음이 괴로움일까?

 

노인이 되면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다고 한다. 노인이 노인을 싫어할 정도이면 젊은 사람들은 근처에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노인은 노인이 되고 싶다고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몸이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런 것이다. 명색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애를 느낀다면 늙음이 괴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사고(四苦), 즉 생노병사가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늙음은 괴로움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늙음의 괴로움에 대하여 이렇게 게송으로 표현했다.

 

 

지체가 이완되고

감관들이 변화하는 까닭에

젊음이 파괴되고

기력이 쇠토하는 까닭에.

 

새김 등이 상실되고

자신의 처자들에게서 조차

또한 무시를 당하고

점점 더 몽매해지는 까닭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간은 괴로움을 겪는다.

그 모든 것은 늙음으로 인한 것이니,

그러므로 늙음이 괴로움이다.”(Vism.16.45)

 

 



늙음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이는 노인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과 같다. 늙어지면 감각기관이 망가지고 신체기관도 파괴되어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 때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기억에 이상이 생겼을 때 가족들에게조차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치매가 대표적이다.

 

요즘은 오래 산다. 세 자릿수를 바라보는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몸의 기능이 망가지고 정신까지 혼미해졌을 때 삶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치 산송장같고 좀비와 같은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피할 것이다. 심지어 가족조차 멀리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거동이 불편해지면 요양원행이 된다. 이런 늙음의 괴로움에 대하여 타인에게 경멸을 당하는 등의 많은 조건에 의해서 심신의 괴로움이 생겨나는 까닭에 늙음은 괴로움의 토대이다.”(Vism.16.45)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늙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늙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이 늙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S22.59)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려면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법구경 115번 게송 인연담에 바후뿟띠까와 관련된 이야기 bahuputtikattherivatthu)’가 있다. 고령출가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후뿟띠까 장로니는 출가하기 전에 나이가 80세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10명의 자녀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었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식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자식들은 처음에는 어머니를 잘 모셨다. 그러나 며칠 가지 않았다. 나이 든 노모를 귀찮게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갈 곳이 없었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부처님의 교단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멸시받으며 집에서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생각하여 비구니교단을 찾아가서 출가를 요청했다.

 

그녀는 늦은 나이에 출가했다. 그러나 걸을 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낮은 건물의 기둥을 손으로 잡고 발걸음을 옮기며 수행자의 삶을 닦았고, 걸으면서도, 어두운 곳에서는 머리를 나무나 다른 것에 부딪칠까봐 나무에 손을 대며 걸으면서 수행자의 삶을 닦았다.”(DhpA.II.276-277)라고 했다.

 

그녀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밤새도록 수행자의 삶을 닦아야지.”라며 남들이 쉴 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용맹정진한 것이다. 이런 모습을 부처님은 향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바후뿟띠까는 거룩한 경지, 즉 아라한이 되었다. 부처님은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라고 게송을 읊었다. 바후뿟띠까는 노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하여 나이와 늙음을 극복한 극복한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흔히 말하기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특히 수행이 그렇다. 바후뿟띠까장로니처럼 나이 80세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바후뿟띠까가 재산에 만족하고 자녀에게 봉양받아 편안하게 일생을 마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보시공덕이나 지계공덕을 쌓아도 수행을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는 한 어느 세계에 태어날지 모른다. 사악처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후뿟띠까는 10명의 자녀들에게 버림받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하게 되었다. 용맹정진하여 도와 과를 이루었을 때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는 윤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하여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늙었다고 후회와 회환의 나날을 보낸다면 비참한 노령이라고 볼 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다. 바후뿟띠까 장로니는 80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실로 다섯 존재의 다발들은

완전히 알려졌고 뿌리째 뽑혔다.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Thig.106)

 

 

2020-05-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