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가 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31. 11:16

 

부처가 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

 

 

부처님오신날이 한달 연기되어 시행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맥빠진 부처님오신날이 되었다. 이미 지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오신 뜻을 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왜 이렇게 불상이 많을까?”에 대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누구일까? 불교인들이라면 당연히 부처님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도 부처의 형상을 한 불상에 예배를 한다. 타종교인들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할지 모르지만 불교인들은 불상 그 자체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돌이나 철, 나무로 된 우상에 절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불교인들이 불상에 예배하는 것은 부처님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함이다. 부처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살아 있는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아야 하고, 또한 한량없는 세월동안 목숨을 건 십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이는 정법이 사라졌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정법이 살아 있다면 부처님이 가셨던 그 길로 따라만 가면 된다. 그러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불상을 모셔 놓고 그 분을 닮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덕성을 생각한다. 그러나 초기에는 불상이 없었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탑묘에서 예배했다. 부처님은 이런 예배에 대하여 “ 이것은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탑묘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D16.113)라고 했다. 탑묘에 예배하는 것은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믿음을 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사후 약 오백년간은 무불상시대였다. 그래서 탑묘가 예배장소가 되었다. 이후 불상이 만들어져서 지금은 불교인들이 불상에 예배하고 있다. 불교인들이 불상에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은 기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행승이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D16.108)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임을 말한다. 최상의 공양은 궁극적으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인사할 때도 “성불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가 되기는 쉽지 않다.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야 하고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목숨을 것 십바라밀행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닮고자 한다. 부처님의 여러 덕목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아라한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가르침을 실천하면 부처님과 동급인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라한은 누구인가?

 

부처님의 열 가지 별칭중의 하나는 거룩한 님(阿羅漢: arahaṃ)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대아라한이다. 이후 전개되는 아홉 가지 별칭은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붙여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으로서 부처님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멀리 여읜 까닭에, 적을 쳐부순 까닭에, 윤회의 수레바퀴를 부순 까닭에, 필수자구 등이 가치가 있는 까닭에,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거룩한 님이라고 했다.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번역한 말이다.

 

아라한에 대하여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거룩한 님이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예를 들어 세상에 현자라고 생각되는 어리석은 자는 누구든지 불명예를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만, 그는 이와 같이 그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한 님이라고 한다.”(Vism.7.24)라고 했다. 이와 같은 아란한에 대한 게송이 있다.

 

 

“그 성자는 멀리 여읜 까닭에

오염의 적을 부수고

윤회의 바퀴살을 부순 까닭에

필수자구를 수용할 만하고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

거룩한 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Vism.7.25)

 

 

게송에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번역한 것이다. 누구나 거룩한 삶을 살면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거룩한 님, 즉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아라한이 되면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부처님의 열 가지 칭호 중에서 한가지에 해당되는 아라한과 동급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율장에서도 확인된다.

 

부처와 동급 아라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찾아 갔다. 찾아 가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설명하자 이해했다. 무아의 가르침을 설했을 때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번뇌에서 해탈했다. 이에 대하여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겼다.”(Vism.1.14)라고 했다. 부처님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아라한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평등사상이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평등사상은 출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야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부호의 아들 장자에게 가르침을 설했을 때 “그때 세상에는 일곱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겼다.” (Vism.1.18)라고 했다. 또 야사의 네 명의 친구들에게 가르침을 설했을 때 “이렇게 해서 열한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겼다.” (Vism.1.19)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모두 똑같은 결과를 얻었다. 마치 의사가 임상실험에서 성공한 것과 같다.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먼저 자신이 실험에 보고 이를 확신한 다음에 타인에게도 실험해 보았을 때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면 보편적인 것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도 그렇다. 부처님이 야사친구 오십명에서 동일한 가르침을 설했을 때 “이렇게 해서 그때 예순한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시료가 더 늘어난 것과 같다. 한두번 또는 대여섯번, 열번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것은 것이 아니라 오십명까지 확대된 것이다.

 

부처님은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되자 확신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전도선언을 했다.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떠나라.”라고 명령했다. 더 많은 아라한이 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도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 지역의 쎄나니가마 마을로 가겠다.”라고 했다. 한시가 급한 모습처럼 보인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에 한사람이라도 더 알려 주어야 겠다는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부처님은 우루벨라 쎄나니가마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깟싸빠 삼형제를 전도 전도했다. 삼형제를 따르는 천명도 전도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이와 같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에, 그 천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되었다.”라고 했다. 깟싸빠 삼형제를 포함하여 삼형제를 따르는 자들 모두가 아라한이 된 것이다. 마치 임상시험이 천명으로 확대되어 성공한 것과 같다.

 

유일무이한 사람

 

부처님을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될 수는 없다. 부처가 되는 것과 아라한이 되는 것은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서는 아라한이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유일무이한 유일한 사람이 있다. 그 유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분이 유일무이한 님이다.”(A1.174)

 

 

부처님에 대하여 유일무이하다고 했다. 이는 두 번째 부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정법이 살아 있는 시기에도 해당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빠알리삼장이 전승되어 오고 있고, 부처님의 팔정도 수행이 있고, 사향사과와 열반이라는 아홉가지 출세간법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정법시대인 것이다.

 

정법시대에서는 두 부처님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의 부처님만 있을 수 있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정법이 살아 있는 한 오로지 한부처님만 모셔야 한다.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오신날 부처님 그 분에 예경하고 공양하는 것은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처가 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

 

행복은 구호에 있지 않다. 행복한 자가 되려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정의는 구호에 있지 않다. 정의로운 자가 되려면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한 자, 즉 아라한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다. 부처님도 최상의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오신날 불상에 예배하고 공양한다. 단지 개인과 가족의 건강과 학업, 사업, 치유를 바란다면 기복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예배와 공양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면 거룩한 자가 되게 되어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부처와 동급이 된다. 부처님의 열 가지 덕목 중의 하나인 아라한과 동급이 되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라한이 되면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S22.59)라고 아라한선언을 한다. 부처가 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

 

 

2020-05-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