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먼 나그네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오랜만에 학의천을 걸었다. 그 동안 늘 승용차를 이용하여 일터로 왕래했으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되어서 걷기로 했다.
학의천도 폭우로 인한 상처가 있다. 늘 건너 다니는 무지개다리까지 범람하면 큰 비가 온 것이다. 마치 연례행사차럼 일년에 한번은 이런 일이 일어난다. 도보길과 자전거길까지 범람해서일까 육중한 석재의자가 밀려 나 있다. 그리고 갈대는 모두 쓰러져 있다. 폭우가 할퀴고 간 처참한 모습이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굴다리를 지나면 일터가 나온다. 약 20여분 되는 거리를 알아차림 하며 걷는다. 한발한발 천천히 걷는 것이다. 뛰어다니거나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꾸는 일은 없다. “왼발, 오른발” 하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잡념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틈새를 비집고 생각은 기어 나온다.
사무실에 가면 해야 할 일이 있다. 밀린 일도 있지만 무엇보다 ‘의무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 하루 한편은 써야 하기 때문에 미리 구상을 해 둔다. 특별히 떠 오르는 것이 없으면 생각에 맡겨 둔다. 걷다 보니 가닥이 잡혔다. ‘나에게 두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라는 것과 ‘밭은 언제 갈려고 하는가?’라는 것이다.
나에게 두 시간이 주어진다면
늘 바쁘다. 혼자 일해도 늘 바쁜 것은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업 때문에 바쁜 것이다. 바쁜 와중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의무적 글쓰기이다. 좀처럼 시간은 나지 않지만 두 시간만 주어진다면 글이 하나 나온다.
사람들에게 두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보낼까? 두 시간은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간이다. 대개 인터넷 보는 것으로 보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튜브를 보며 보낼 것이다. 그러나 남는 것이 없다. 한번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무엇인가 남겨야 한다.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두 시간이 주어진다면 글을 쓸 것이다. 특별히 생각해 놓은 것이 없으면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하면 된다. 게송을 인용하고 게송과 관련된 인연담을 활용하면 더 좋다. 사람들은 이런 글쓰기를 좋아한다.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 글쓰기의 주제는 정해졌다. ‘밭은 언제 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늘 그렇듯이 글쓰기는 자극받아 쓰는 경우가 많다. 종종 인터넷 댓글에서 듣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로그인 하게 만든다.”라는 말이다. 상대방에게 반론하기 위한 말이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본 일부 승려들의 행태가 그렇다.
승려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스님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런 질문에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산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페이스북을 보면 그렇게 살지 않는 것 같은 승려들이 많다는 것이다. 취미생활이 부업인지 본업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그렇다. 일을 하는 승려들이 그렇다.
승려들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일을 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출가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을 하는 스님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경장이나 율장을 보면 출가자들이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규정되어 있다. 디가니까야를 보면 매우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해서는 안될 일의 종류에 대하여 짧은 크기의 계행, 중간크기의 계행, 긴 크기의 계행으로 하여 수백가지가 망라 되어 있는 것이다. 긴 크기의 계행에서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혹은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보시한 음식을 향유하면서 이와 같이 예를 들어, 수족에 의한 점괘, 전조에 의한 점괘,…점술과 같은 저속한 지식으로 삿된 삶을 삽니다.”(D2.46)
출가수행승이 점을 보아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말은 “신자들이 보시한 음식을 향유하면서”라는 말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 계행을 설명할 때 마치 선언문처럼 나온다. 신도들이 보시한 것을 먹고 살면서 동시에 신도들을 대상으로 먹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채없이 음식을 즐기려면
출가자들은 네 가지로 먹고 산다고 했다. 하나는 도둑으로 먹는 것이고, 두번째는 빚으로 먹는 것이고, 세번째는 유산으로 먹는 것이고, 네번째는 자신의 것을 먹는 것이다.
계행이 엉망인 자는 도둑으로 먹는 것이 된다. 생계형 출가자나 도피형 출가자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출가자가 일을 하여 신도들을 대상으로 돈벌이 한다면 계행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도둑으로 음식을 먹는 것과 다름없다. 도둑질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빚으로 먹는 자는 아직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수행승을 말한다. 계행을 지키며 살지만 아직 흐름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부채로 먹는 것이다. 시주들이 보시한 것을 먹긴 먹지만 빚진 것으로 먹는 것이다.
유산으로 먹는 수행승이 있다. 이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행승을 말한다. 계행을 잘 지키고 정진하여 흐름에 들어 갔을 때 부처님 유산으로 먹는 것이다. 시주가 보시한 것을 부처님의 유산으로 생각하여 부채의식을 갖지 않고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것을 먹는 수행승은 아라한이다. 거룩한 경지에 오른 수행승은 복전(福田: puññakkhetta)이 된다. 아라한에게 공양하면 과보는 매우 크다. 일반사람보도 청정한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공덕이 더 크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에게 보시하면 그 공덕은 매우 크다고 했다. 그래서 아라한은 자신의 음식을 즐긴다.
출가수행자들은 밥을 먹을 때 무엇으로 먹는가? 도둑으로 먹는 자도 있고, 부채로 먹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부처님의 유산으로 먹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것으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부채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앙굴리말라 게송을 보면 “부채없이 음식을 즐기네.”(M86)라는 구절이 있다.
계행을 즐기는 수행승은 탁발한 음식에 대하여 부처님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먹는다. 아라한이 되면 음식을 공양받을 만하게 수행했으므로 역시 부채없이 음식을 먹는다. 이런 성자들에게 공양하면 큰 공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는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님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 길로 가신 님의 제자로서 공양받을 만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Stn.227)라고 했다.
출가의 삶은 왜 힘들까?
출가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일은 재가자들이 하는 것이다. 재가자들이 해야 할 일을 출가자들이 한다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가 된다. 그렇다면 출가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테라가타에 “출가는 힘들고 재가의 삶도 힘들다.”(Thag.111)라고 했다. 비슷한 게송이 법구경에도 있다. 법구경에서는 “출가는 어렵고 거시서 기뻐하기도 어렵다. 세상의 삶은 어렵고 재가의 삶은 고통스럽다.”(Dhp.302)라고 했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머리깍고 중이나 될까?”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스님이 되는 것이 가장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다 안되면 출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스님의 삶은 편한 것일까?
스님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편해 보인다. 일을 하지 않아서 편해 보인다. 재가자들은 일을 해야 살 수 있다. 일을 하기 싫어도 일을 해야 하고, 돈벌기 싫어도 돈을 벌어야 한다. 재가의 삶은 돈벌기 선수가 되는 것을 강요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설령 그가 돈버는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돈을 벌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래서 모두 돈벌기 선수가 되는 것이다.
스님의 삶이 편해 보이지만 제대로 산다면 어려운 삶이다. 이는 테라가타와 법구경에서 ‘출가의 삶은 힘들고 어렵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출가의 삶은 왜 힘들고 어려운 것일까? 그것은 출가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심오한 진리를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평생 도를 닦아도 어렵다. 이 생에서 어려우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이 생에서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최소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악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악처에 빠지면 언제 다시 인간의 지위를 회복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게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32)라고 했다.
이번 생에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이번 생에서 아라한이 되어 모든 윤회가 끝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최대 일곱 생이 소요된다. 그래서 “올바른 지혜로써 거룩한 진리 즉, 괴로움,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초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고귀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본다면, 그 사람은 최상으로 일곱 번 유전하다가 일체의 결박이 부서지는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It.17, S15.10)라고 했다.
집에서 사는 것은 고통이다
진리는 심오해서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재가의 삶은 왜 어려운 것일까? 그것은 부를 얻기가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다. 재가의 삶을 살면 돈벌기 선수가 되어야 하는데 돈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재가의 삶은 힘들고 어렵다. 왜 그런가? 재가의 삶은 재산의 축적이 목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산 축적의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또 재가의 삶은 가정에서 의무도 다해야 하고 직장에서 의무도 다해야 한다. 이런 재가자의 삶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거나 커다란 바다를 물로 채우듯 어렵다.”(DhpA.III.462)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사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했다.
집에서 사는 것은 고통이라고 했다. 재가의 삶이 어려운 것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세상의 삶은 어렵고 재가의 삶은 고통스럽다.”(Dhp.302)라고 했다. 이런 재가의 삶에 대하여 잘 표현한 시가 있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이라는 시이다.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재가의 삶은 등에 짐을 진 것과 같다. 그 짐은 가족이라는 짐, 직장이라는 짐, 사회라는 짐, 더 나아가 국가라는 짐을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짐 중에서 가족이라는 짐이 가장 클 것이다.
가족의 짐은 내려 놓기 힘들다. 친구와 인연, 세상사람들과의 인연은 끊어 버릴 수 있지만 가족과의 인연은 끊기 힘들다. 특히 처자식과의 인연이 그렇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라고 했다. 쇠붙이로 만든 족쇄가 강한 것이라고 하지만 칼로 끊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처자식과의 인연은 함부로 끊을 수 없어서 강한 족쇄라고 했다. 애정의 족쇄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재가자의 삶은 쉽지 않다. 가장의 짐은 매우 무겁다. 그런데 짐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깨달음으로 이끌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통의 자물쇠에 갇혀 사는 가장에 대하여 시인은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재가의 삶은 근본적으로 고통이다.
출가 수행자가 사랑스러울 때
출가자에게는 출가자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재가자에게는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 그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음은 무척 어럽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출가한다면 진리는 심오해서 보기 어렵고, 재가생활을 한다면 부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재가자가 하는 일을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본업은 소홀히 하고 부업에 열중한다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테리가타에서 로히니장로니가 읊은 이런 게송이 있다.
“일하기 좋아하며 게으르지 않고
최상의 일을 행하는 자로서
그들은 탐욕과 성냄을 버립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75)
로히니 장로니가 소녀 시절이었을 때 아버지와 대화했다. 아버지는 “그들은 일하기 싫어해서 게으르고 남들이 보시한 것으로 살고 잔뜩 기대하며 맛있는 것만 것 원하는데 왜, 네게 수행자가 사랑스러운가?”(Thig.275)라며 물었다. 이에 소녀 로히니는 수행승에 대하여 ‘일하기 좋아한다’라고 했다. 어떤 일인가?’ 최상의 일(kammaseṭṭha)’이라고 했다. 그것은 심오한 진리를 꿰뚫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세 가지 악의 뿌리를 제거하고 청정한 행위를 하고 그들은 일체의 악을 여읩니다.”(Thig.276)라고 했다.
청정한 삶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탁발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소유와 조건에 만족하는 삶을 말한다. 무소유이기 때문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소녀 로히니는 “마을에서 떠날 때에 아무것도 살펴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2)라고 했다.
출가자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한곳에 정착해서 살면 애착이 생겨난다. 처소에 대한 애착, 재물에 대한 애착, 사람에 대한 애착이 생겨난다. 이런 애착은 해탈과 열반의 길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 된다. 그런 수행승에 대하여 “창고에도 항아리에도 바구니에도 자신의 소유를 저장하지 않고, 줄 준비된 것만을 구합니다.”(Thig.283)라고 했다. 또 “금화도 받지 않고 금도 은도 받지 않습니다. 생겨나는 것으로 생활합니다.”(Thig.284)라고 했다. 소녀 로히니는 이런 수행승에 대하여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라고 했다.
갈 길 먼 나그네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조선후기 남구만의 시가 있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라고 했다. 농부는 밭을 간다. 수행자 역시 밭을 간다. 농부는 농사짓는 밭을 갈지만, 수행자는 마음의 밭을 간다. 그럼에도 출가수행자가 마음의 밭을 갈지 않고 농부가 밭갈듯이 일을 하면 어떻게 될까? 윤회는 아득할 것이다.
법구경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Dhp 60)라고 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모르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유익한 것을 모르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종식시킬 수 없고, 윤회를 끝내는 서른일곱 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길을 모른다.”(DhpA.II.12)라고 했다.
갈 길 먼 나그네가 있다. 피곤에 지친 나그네는 실제 길이보다 두 배나 더 멀게 느껴진다. 잠못 이루는 자에게 밤이 긴 것과 같다.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윤회를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일을 즐기는 출가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이 세상 삶을 살아간다. 다만 목적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둘 다 나그네라는 것이다. 왜 나그네인가? 이는 “존재의 윤회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나그네라고 한다.”(DhpA.III.46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러므로 나그네가 되지 말고 고통에서 빠지지 말아야 하리.”(Dhp.302)라고 했다. 윤회의 길을 걷는 나그네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출가자는 모든 면에서 조건이 좋다. 재가자들은 한철 안거 나는 것은 꿈도 꾸지못한다. 십일 집중수행하는 것도 큰 마음먹어야 한다. 그러나 출가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수행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재가자도 하찮게 여기는 일을 기웃거리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출가자는 재가자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출가자는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 취미로 하는 부업이 본업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부업도 하찮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시덥지 않게 보는 것들이다. 세상의 전문가들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추어 수준으로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출가자는 시주의 보시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신도들의 보시로 먹고 사는 입장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도대체 출가의 목적은 어디로 갔는가? 밭은 언제 매려 하는가? 마음의 밭은 언제 갈려고 하는가? 갈 길 먼 나그네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2020-08-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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