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글만 쓴다고 타박하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0. 7. 31. 16:08

 

글만 쓴다고 타박하는데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하루 한건 쓰는 것이다. 또 틈만 나면 쓴다. 두 시간이 생겼을 때 이거 글하나 나오는 시간인데.”라며 글을 쓴다. 쓰다 보면 세 시간, 네 시간 걸릴 때가 있다. 글 하나가 나오기까지 보통 네 시간가량 소요되는 것 같다. 주로 오전에 쓰기 때문에 오전일과를 글쓰기로 보내는 것이다.

 

요즘 글쓰기와 함께 수행도 겸하고 있다. 사무실 중간에 세 평가량 명상공간을 확보해 놓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걷거나 앉는다. 생업이 있고 글쓰기가 있기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한다. 잠시 짬을 내서 일이십분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이나마 집중했을 때 일하는데 도움을 준다.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제 법우님으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블로그에 종종 좋은 글을 올려 주시는 B법우님이다. 때로 격려의 글도 받지만 때로 충고의 글도 받는다. 어제 글이 그랬다. 법우님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연꽃님께서 금요일에 니까야 강독에 열심히 참여하시고 이렇게 니까야와 연결하여 부처님 말씀도 소개하시고 현실생활에 적용하는 길도 알려주시는데 ...
제가 보기에는 달을 보는 것이 아니고 달 가리킨 손가락을 열심히 분석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음속에 계율, 지혜, 판단력,팔정도와 4성제가 아니 부처님 말씀이 다 들어있으며 정진으로 그 것을 드러내는 것이 저희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일일이 분석하다가 어느 세월에 지혜를 갖추고 보시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런지요? 어느 정도의 기본 교리를 알고 믿은 후에는 정진(알아치림, 화두참선), 정진이 할일 이라고 봅니다.”(B법우님)

 

 

법우님 글을 보면 불만이 있다. 또 불편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왜 법우님은 불편해하는 모습으로 충고를 했을까? 그것은 교학에만 몰두할 뿐 수행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썼으면 이제 글쓰기를 줄이고 수행에 전념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간화선도 포함되어 있다.

 

손가락론에 대하여

 

법우님은 글에서 손가락론을 말했다. 교학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종종 듣는다. 특히 선종계통 사람들에게서 듣는다. 아마 조사나 선사들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손가락론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진리의 경’(M26)에서도 드러난다.

 

부처님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후에 열반에 들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브라흐마 사함빠띠는 세상사람들을 위해서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부처님은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설해야 하나?”(M26)라며 설하지 않기로 했다.

 

부처님이 주저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함빠띠가 계속 간청하자 부처님은 마지못해하는 식으로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M26)라고 했다.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기존 신앙을 먼저 버려야 한다. 서로 다른 사상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를 설하기를 주저한 두번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곤란을 예견하고 극히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M26)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것은 진리의 말씀이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은 진리의 말씀이다. 어느 누구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보지 않는다. 부처님이 설한 진리는 달 그자체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손가락과 달로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에 비밀은 없다. 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은 진리의 말씀이다. 이것 외에 따로 비밀로 전승된 가르침은 없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된 비밀 가르침은 없다는 것이다.

 

게송, 응송, 여시어, 미증유법 등 구분교의 가르침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 빠알리 니까야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진리 그 자체이지 결코 손가락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교학승과 수행승이 다투었는데

 

B법우님은 정진을 강조한다.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알아차림이든 간화선이든 공부가 되었으면 수행을 하라는 것이다.

 

사실 교학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다. 사부니까야와 논장, 율장을 다 보고 이해하고, 숙지하려면 한평생 가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전을 너무 보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부니까야를 비롯한 수많은 빠알리경전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지만 사서 보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다.

 

경전을 보는 것 없이 수행만 하는 자는 지도 없이 길을 찾아 떠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라고 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Mahācundasutta)’(A6.46)에서 교학승과 수행승의 다툼에서 잘 알 수 있다.

 

교학승은 가르침을 중시하는 자들이다. 또 가르침을 설하는 자들이다. 강사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교학승은 수행승들을 이해 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학승은이들은 ‘우리는 선정에 든다. 우리는 선정에 든다.’라고 선정에 들고 명상에 든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A6.46)라며 말하면서 수행승을 헐뜯었다. 교학승은 수행승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번도 선정에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선정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 한 말이다.

 

교학승이 수행승을 헐뜯자 수행승이 발끈 했던 것 같다. 수행승은 교학하는 것 없이 오로지 수행만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수행승은 그러나 이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중시한다. 우리는 가르침을 중시한다.’라고 생각하지만,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A6.46)라고 교학승을 헐뜯은 것이다. 수행승은 교학승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얼마나 심오한지 몰랐기 때문이다.

 

교학승과 수행승의 다툼은 오늘날도 볼 수 있다. 대개 자신의 세계만 말할 뿐 상대방의 세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의 단점만 이야기하면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런 때는 상대방의 장점을 보아야 한다.

 

모임에서 그 사람의 단점만 보면 나오지 않게 된다. 그 사람에게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저는 그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는 부부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부부싸움을 칼로 물베기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사소한 다툼으로 갈라서기도 한다. 이는 그 사람의 단점만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분명히 장점도 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장점을 보고 갈 것이다. 그 사람의 단점 보다도 장점이 더 많다면 장점만 보고 가면 되는 것이다. 교학승과 수행승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 장점을 본다면

 

교학승은 교학승 나름의 장점이 있고, 마찬가지로 수행승은 수행승 나름의 장점이 있다. 서로 장점을 본다면 함께 갈 수 있다. 이에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러므로 벗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선정에 드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벗들이여, 이와 같이 ‘선정에 들면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A6.46)

 

 

불교공부를 하다 보면 크게 두갈래의 길이 있다. 한갈래는 학문의 길이고, 또한갈래는 수행의 길이다. 각자 취향에 따라 또는 성향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평생 교학만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평생 선방에서 수행에만 정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비난한다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된다.

 

장점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수행승에게는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이라고 추켜 세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학승에게는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이라고 역시 치켜 세워주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서로가 장점을 말해 주면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이나 교학승 중에 어떤 수행승이 더 우월한지에 대해서 말해지지 않았다. 단지 장점에 대해서만 말해져 있는데, 수행승에 대해서는 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amata dhātu kāyena phusitvā viharanti)”이라고 했다. 여기서 불사의 세계(amata dhātuṃ)’는 선정에 따른 열반을 체험한 것을 나타낸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경지가 교학승보다 더 우월하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교학승에 대해서는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puggalā dullabhā lokasmi ye gambhīra atthapada paññāya ativijjha passantī)”이라고했다. 여기서 심오한 의취‘gambhīra atthapadaṃ’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심오한 뜻의 경지라고 번역했다. 지혜로 꿰뚫음 paññāya ativijjha passantī’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통찰지로 꿰뚫어 보는이라고 번역했다.

 

교학승에게도 통찰지(paññā)

 

교학승이 교학만 한다고 해서 지식만 있고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산일 것이다. 경에서와 같이 심오한 경지와 지혜로 꿰뚫는 경지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수행승들이 교학승을 비난할 때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학문을 한다고 해서 말만 많고 아상이 높다고 보면 오산이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그와 비례하여 인격도 성숙되기 마련이다. 교학승은 많이 알고 있다. 더구나 지혜까지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통달했을 때 자연스럽게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심오한 의취라고 했을 때, 이는 초기불전연구원 각주에 따르면 덮여 있고 숨어 있는 무더기(), 감각장소(), 요소() 등의 뜻을 말한다.”(앙굿따라 4128번 각주)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 십이처, 십팔계와 같은 교학 전반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비담마를 안다는 말과도 같다. 이렇게 교리적으로 기본이 탄탄하게 갖추어졌을 때 부처님 가르침을 훨씬 더 빠르게 이해할 것이다.

 

다음으로 교학승은 지혜로 꿰뚫음(paññāya ativijjha passantī)’이 있다고 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초기불전연구원 각주에 따르면 위빳사나와 함께한 도의 지혜로서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앙굿따라 4129번 각주)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교학승이라 하여 오로지 교학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위빠사나 지혜라는 것이다. 교학승이 선정 체험은 하지 못했어도 찰나집중에 따른 위빠사나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세 가지 앎이 있는데

 

교학승이 통찰지로 꿰뚫어 본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명상과 꿰뚫음의 통찰지이고, 또 하나는 파악함과 질문함의 통찰지이다. 이와 같은 통찰지는 꿰뚫어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앎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1)지식에 의한 앎, 2)탐구에 의한 앎, 3)버림에 의한 완전한 앎의 세 가지 세간적 완전한 앎이 있다.”(Vism.20.3)라고 했다.

 

지식에 의한 앎물질을 저촉을 특징으로 삼고, 느낌은 감수를 특징으로 삼는다.”와 같이 법들의 각각 특징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사띠를 하여 법을 관찰했을 때 법이 명료 하게 드러남을 말한다. 탐욕, 성냄 등과 같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 법들을 말한다. 이를 법의 자상(自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탐구에 의한 앎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물질이 무상하고, 느낌이 무상하고라는 등의 표현으로 법들의 공통된 특징을 아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들은 무상, , 무아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를 법의 공상(共相)’이라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버림에 의한 완전한 앎이 있다. 이는 이러한 법들에 대하여 영원하다는 지각 등을 끊음으로써 생겨나는 특징을 대상으로 하는 통찰의 지혜가 버림에 의한 완전한 앎이다.

 

교학을 하면 세 가지 앎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지 교학적으로만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을 하여 법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학만 한다고 타박하지 말아야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에서 교학승과 수행승의 다툼을 통하여 몰랐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학승이라 하여 반드시 교학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다만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다. 수행승은 선정위주로 하고 교학승은 위빠사나 위주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의 경지가 다른 것이다.

 

경에서는 교학승과 수행승에 대하여 서로 놀라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dullabh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rare; difficult to obtain’의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경이로운 인간들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각자 자신의 분야를 인정하는 말이다.

 

교학만 한다고 타박하지 말아야 한다. 교학만 한다고 하여 수행을 멀리하지 않는다. 교학도 하고 수행도 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론적으로 알고 수행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고 수행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교학하는 사람도 수행을 겸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이기 쉽다.

 

교학승의 교만함에 대하여 말할 때 흔히 뽀틸라장로이야기를 한다. 법구경 282번 게송 인연담에 실려 있는 뽀틸라장로 이야기는 극단적이다. 삼장법사가 수다원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여 7세 아라한에게 담마를 배운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나치게 교학에만 매몰되지 않기를 바래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문제는 수행만 있고 교학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이론적 바탕이 없다 보니 매번 똑 같은 말만 하는 것이다. 빤냐완따스님의 발바닥에 핀 연꽃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어느 스님이 한번 앉으면 이내 호흡이 사라지면서 온갖 마음도 사라지고 결국 아는 마음 하나만 남는데 그 아는 마음마저 종종 사라지더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10년 전에도 했던 말을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선정력과 통찰력을 갖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깊은 삼매를 들었어도 수행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앞마음이 뒷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등을 말 했을 때 그래서 결국 뭐가 어떻다는 건가요?”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알려면 교학적 바탕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체계적이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것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이다. 이런 논서를 접하고 수행하는 것과 전혀 교학에 대하여 모르고 수행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이다.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방향이 잘못되면 목적지도 다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 하지 못하고 수행했을 때 전혀 다른 길에서 헤매게 된다. 교학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앉아만 있었을 때 매번 똑 같은 소리만 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글 쓰는 것이 일상이듯이 수행도

 

교학을 한다고 하여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학을 하면 수행을 병행하게 되어 있다. 글쓰기도 일종의 수행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글로 쓰면서 되새기는 것이다.

 

팔만사천법문은 방대하다. 평생공부해도 부족하지만 생활화가 되면 아무것도 아니다. 틈만 나면 쓰는 것이다. 두 시간 틈이 나면 두 시간 쓰면 된다.

 

글이 길다고 하여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쓰다보면 길어진다. 특히 경전을 근거로 쓰면 더 길어진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종종 보고 있다고 들었을 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글도 쓰면서 수행도 하면 더 좋다.

 

글만 쓰는 것에 대하여 수행은 어느 세월에라고 걱정한다면 오산이다. 수행도 하고 글도 쓴다. 틈만 나면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글만 쓰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글 쓰는 것이 일상이듯이 수행도 일상으로 하고자 한다.

 

 

2020-07-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