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가르침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초기경전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전승과정에서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그 많은 경전을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가르침(Dhamma)에 크게 의존한다. 이는 법귀의에서 “담망 사라낭 갓차미”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말로는 “가르침에 귀의합니다.”가 된다. 여기서 사라나(saraṇa)는 영어로 ‘protection; help; refuge; a shelter’의 뜻이 있다. 그래서 법귀의는 법에 귀의의 뜻도 의존의 뜻도 있지만 피난처(refuge)의 뜻도 있다.
불교인들은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을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상가에 대해서도 피난처로 삼는다. 이렇게 삼보를 피난처로 삼아야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재가신자 마하나마가 “세존이시여, 재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S55.37)라고 말했다.
불교인이 되는 첫번째 조건은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이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내는 것이 불교인이 되는 첫번째 조건이다. 그럼에도 가르침(Dhamma: 法)을 의문하거나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페이스북에서 어느 출가승은 법을 의문했다. 초기경전을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모두 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불교인이 아니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했다면 가르침에 대하여 의문하거나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도들이나 가르침에 의문하고 의심한다. 외도들이나 전승과정에서 오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외도들이나 부처님이 경전에 있는 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담마에 대하여 의문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불교인이라고 하지만 무늬만 불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불교인인이라면 담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출가승이 그렇다. 법문 하는데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면 법문이라고 할 수 없다. 신변이야기나 가십,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일관한다면 새겨 들을만한 것이 없다. 받아 적을 것도 없다.
어떤 이는 초기경전에 대하여 폄하한다. 전승과정도 믿을 수 없고 부처님 말씀인지 확신도 없다는 것이다. 설령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모욕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능멸이다. 이런 말을 하고서도 법회할 때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가르침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부처님은 보리수아래에서 처음 깨달았던 그날 밤이나 열반에 든 그날 밤이나 깨달음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나이 들어 철이 들듯이 젊었을 때 다르고 늙었을 때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무상정등각, 즉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은 35세때나 열반에 들 때나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더 깊은 깨달음이 있었음이 아님을 말한다. 그럼에도 의문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의론자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불완전한 것이고 미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후대 부처님과 버금 가는, 더 뛰어나는 사람들이 나타나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을 부정하는 것으로 부처님과 가르침을 능멸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모두 사성제에 포섭된다. 사성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성제는 과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씀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그날부터 열반에 든 그 날에 이르기까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게송, 응송 등 구분교의 가르침으로 설한 수많은 가르침은 진리 그자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후대 마하야나에서는 이를 크게 왜곡했다. 부처님은 한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능가경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
나와 모든 여래
조금도 차별이 없다네.”(능가경 7권, 楞伽經之四)
능가경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을 실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구조가 이띠붓따까와 똑같다. 다만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라고 하여 달리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이띠붓따까에서 말한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는 말을 한마디도 한 바 없다고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마라고 한다. 초기경전에서 담마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부처님이 설했을 때는 일반 담마와 구분하기 위하여 대문자 D자를 써서 ‘Dhamma’라고 한다. 이 담마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진리’ 또는 ‘가르침’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을 참조하여 ‘법’이라고 번역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진리이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은 진리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이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부처님을 능멸하는 것이고 가르침을 능멸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이루고 난 다음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이해하기 힘드네.”라고 했다. 또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라고 했다. 부처님의 말씀하신 진리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이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다 보니 팔만사천 법문이 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 아닌 것이 없다. 니까야를 열어 보면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은 방편으로 폄하한다면 불교인으로 볼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담마는 진리 그 자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D16.53) 이렇게 부처님은 명백히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말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는 말이다.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부처님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그럼에도 다른 것에 의지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회의한다면 불교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가르침을 떠나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말한다면 외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된다. 불교인들이 의지할 것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다. 불교인들이 법회 때 마다 "가르침에 귀의하겠습니다.”라고 법귀의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의문하고 의심하는 회의론자들이 있다. 특히 초기경전을 믿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경전에 있는 문구를 인용하거나 경전문구를 인용한 법문을 보기 힘들다. 주로 자신의 신변 이야기로 때우는 것이 보통이다. 법문이라 말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없다. 그 대신 그 사람 말만 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면 그 사람의 종교가 된다. 예를 들어 김철수가 법문이라고 하여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면 ‘김철수교’가 될 것이다. 법문이라고 하여 중국조사스님 이야기만 한다면 ‘조교(조사불교)’가 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붓다사사나라고 한다. 붓다사사나가 ‘불교’이다. 한국불교에 불교가 있다고 하지만 불교는 없는 것 같다.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인데 부처님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사람 이야기만 있다. 설령 부처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고는 하지만 잘 들어 보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 같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정말 부처님 가르침인지 맞는지 확인하려면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말 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D16.98)라고 말했다.
의심나면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설령 큰 스님이 말한 것이라고 해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큰 스님의 말이 경전에서 부처님의 말씀과 일치하면 받아들이고 어긋나면 버려야 한다. 하물며 인터넷상에서 부처님이 설한 진리에 대하여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정도로 여긴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회의론자들은 초기경전을 의문하거나 의심한다. 그래서인지 읽어 보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설령 읽어 보았다고 하더라도 왜곡한다. 부처님이 설한 진리에 대하여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는 것이다. 말이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자도 설한 바 없다고 하면서 진리는 마음이나 뜻으로 스승과 제자사이에 전승되어 왔다고 말한다.
말로 설해진 것은 모두 손가락에 지나지 않은 방편일까? 진리는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은밀히 전승되어 온 것일까? 전등록을 보면 ‘그렇다’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동아시아불교에서는, 특히 중국불교에서는 진리는 말이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스승과 제자사이에서만 마음과 마음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오만이고 교만이고 자만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독점이다. 일반사람들은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들끼리만 진리를 독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설한 진리에 대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스승과 제자사이에 은밀하게 전승되어 왔다는 것을 부정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51)
부처님은 가르침을 다 설했다고 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한 것이 부처님이 말씀하고자 한 진리인 것이다. 그 진리가 오늘날 문자화 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의문하고 의심하여 진리는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뜻에서 뜻에서 전승되어 왔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후대 이런 자들의 출현을 예견해서일까 부처님은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51)라고 했다.
스승의 주먹이 있다. 스승은 죽을 때까지 주먹을 펴지 않는다. 제자들은 그 주먹안에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떠 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승이 죽을 때 주먹은 펴진다. 주먹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마치 주먹 안에 무언가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스승의 주먹, 즉 사권(師拳: ācariyamuṭṭhi)이라고 한다.
스승의 주먹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스승은 마치 무슨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마음과 마음에서 스승과 제자사이에서만 전승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불교가 그렇게 전승되었다면 불교는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은 진리이다. 오늘날 전승되어 온 방대한 니까야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 그 자체이다. 누군가 부처님이 설한 진리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부처님과 가르침을 능멸하는 것이다.
2020-07-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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